94화
자리에서 일어선 클라우스는 무척이나 기괴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그가 지나간 자리 위로 검은 연기가 발자국처럼 잔상을 남겼다.
“그래, 그 말이 맞아. 그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는 불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대를 얕잡아 본 건 내 실수였던 것 같군. 설마 이렇게까지 발버둥을 칠 줄은 몰랐는데.”
“발버둥이라니, 설마 폐하께서 지금 하고 계신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의 말을 받아치며 아르티아 쪽을 바라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르티아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움직임이 없다기보다는 뭐랄까……. 굳어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래. 지금은 그대가 쟁취한 승리를 맘껏 기뻐하도록 해. 어차피 얼마 가지 못할 테니까.”
지척까지 다가온 클라우스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그러니 내, 그대의 행복을 빌어 주겠네.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소중한 걸 잃게 될 그대를 위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새까만 연기에 둘러싸여 사라지고 말았다.
“……라벤느, 라벤느!”
몸을 흔드는 강한 충격에 퍼뜩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공작……님?”
방금까지 클라우스가 있던 자리에 어느새 일리온이 서 있었다.
“어, 언제 여기 오셨어요?”
갑자기 나타난 일리온의 모습에 당황하며 물었다.
“좀 전에 도착했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사람이 오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혼란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일리온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갑자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검은…… 연기요?”
일리온 옆에 있던 아르티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보셨잖아요. 검은 연기가 나더니 클라우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리고…….”
내 말에 아르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저와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네?”
숨을 거뒀다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는데.
난 두 사람을 뒤로하고 침대 근처로 다가갔다.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던 남자는 침대 위에서 누워 마치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티아의 말처럼 그에게서는 어떠한 생명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제 발로 걸어오는 걸 봤는데. 헛것이라기엔 그 기괴한 걸음걸이와 끔찍한 목소리가 너무도 생생했다.
“왜,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서요.”
그렇게 말하는 아르티아는 조금 분한 듯한 표정이었다. 클라우스가 그렇게 죽는 걸 원치 않았다는 듯.
“라벤느, 일단 진정해.”
일리온이 다시 한번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는 천천히 나와 눈을 마주치며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진정하고 천천히 설명해 보게. 검은 연기랑 또 뭘 봤나?”
아까 한 허무맹랑한 말을 믿어 주는 걸까?
클라우스가 했던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소중한 걸 잃게 될 거라는 말이…….
하지만 그의 시체를 눈으로 확인하니, 내가 본 게 진짜였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체가 움직였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정말, 헛것이라도 본 걸까?
걱정스레 내 안색을 살피는 일리온을 보며 난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봐요. 이제 괜찮아요. 그보다,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내 질문에 일리온은 클라우스의 시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시간은 걸리겠지만, 차차 해결할 테니.”
***
추수제의 마지막 행사를 즐기기 위해 모인 자리는 이내 서거한 황제와 이후의 일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장으로 바뀌고 말았다.
귀족들이 모인 방 안에서 어떤 공방이 이뤄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걱정하지 말라던 일리온을 믿기로 했다.
사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나와 아르티아는 방에서 나와 스피넬과 함께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일리온의 회의가 끝나길 기다렸다.
참으로 기나긴 하루였다. 아침 먹은 게 언제인지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지나친 피로로 인해 말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의자에 앉아 있던 난 고개를 들어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구경하세요?”
그녀는 창틀에 걸터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티아의 도움으로 마나를 되찾은 스피넬은 이따금 하늘 위로 불꽃을 쏘아 올렸다. 아무래도 돌아온 마나가 기쁜 모양이었다.
“노을이 지는 걸 보고 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녀의 옆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니, 넓은 정원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다시 한번 스피넬의 손끝에서 쏘아 올려진 불꽃은 붉은 노을과 어슴푸레한 밤하늘의 경계를 가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왠지 모르게 현실이 아닌 것 같은 풍경을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평화롭고, 평온한.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비로소 모든 게 다 끝났다는 실감이 났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렇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노을을 바라보는데,
“맥스 이 자식은 또 어디서 땡땡이를 치고 있는 거야?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놈이 아주 빠져 가지고.”
감상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툭 툭 꽂혔다.
“안 그래도 일손 부족한데 꼭 이럴 때만 귀신같이 사라지지. 아오, 잡히기만 해 봐. 연무장 뺑뺑이를 돌려 버릴 테니까.”
혼잣말을 하며 씩씩대는 병사는 그렇게 저 멀리 사라졌고 내 눈물 역시 쏙 들어가고 말았다.
부디 맥스라는 병사가 무사히 연무장 뺑뺑이를 돌 수 있길 기원하며, 난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마침 문이 열리며 일리온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회의는 잘 끝나셨어요?”
“뭐, 그럭저럭.”
그렇게 말하는 일리온의 표정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그대도 많이 피곤할 테니까.”
일리온의 제안에 아르티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녀님도 같이 가요.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는 없잖아요.”
“아뇨. 저는…….”
거절하려는 아르티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약속했잖아요? 여기서 탈출할 수 있게 도와드리겠다고.”
내 말에 아르티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살짝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내게 감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라벤느.”
모든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엔 벅찬 듯,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
“아가씨!”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릴리가 온몸을 던져 날 끌어안았다. 순간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일 정도로.
“이번엔 또 무슨 일을 저지르신 거예요. 아가씨는 황성에 갇혔다고 하지, 공작님께서는 입궁하신 지 5일 만에 돌아오셔서는 괜찮을 거라고만 하시고 이대로 다시 못 만나는 줄 알고 제가 얼마나…….”
날 끌어안은 릴리는 감정이 북받쳐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릴리…….”
“이제 아가씨 못 모시겠어요. 정말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고요!”
릴리의 얼굴을 바라보니, 이미 눈가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저택의 다른 사람들 역시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인지 낯빛이 좋지 못했다.
난 릴리를 잠시 떼어 낸 뒤, 날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걱정을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아, 아가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내 말에 릴리가 퍼뜩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 일어나세요. 아랫사람에게 고개를 숙이시다니요.”
“그래요. 일어나세요, 아가씨. 다들 아가씨께서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답니다.”
“……세바스찬.”
“주인님께서 다 설명해 주셨거든요. 그러니 고개를 드세요.”
“설명해 주셨다는 건…….”
말끝을 흐리며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는 나와 눈을 피한 채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네, 전부요. 그러니, 오히려 저희가 감사를 드려야죠.”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없는걸요. 결국 모두에게 폐를 끼쳤으니까요.”
감사는 오히려 내가 해야 했다. 모두를 곤란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위해 다들 애써 줬으니까.
“네. 물론, 아무 말 없이 혼자 거길 뛰어 들어가신 건 혼이 나셔야죠. 하지만 그와 별개로 아가씨께는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세바스찬은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를 따라 저택 사람들이 하나둘 내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순간,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홀로 조마조마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기를, 다시 이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또 빌었다.
마침내 돌아온 집은 너무도 따뜻하고 아늑해 온갖 감정들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녹아내린 감정들은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고, 이따금 내 등을 토닥여 주는 릴리의 손길 때문인지, 눈물은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
푹신한 침대와 따사로운 햇살. 잠을 깨우는 새소리마저 사랑스러울 정도로 평온한 아침이었다.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응.”
“식사하러 가셔야죠.”
식사라는 말에도 한참을 누워 있던 나는 근육통으로 삐거덕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비명을 지르는 근육들과 사투를 벌이고 거울 앞에 앉자, 처음 보는 사람이 거울 안쪽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냐, 넌?
“누, 눈이 많이 부으셨네요.”
낯선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 릴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밥 먹기 전까지 가라앉을까?”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요.”
“…….”
말없이 한숨을 푹 내쉬는데 릴리가 의아하다며 물었다.
“아가씨께서 별일이시네요. 평소엔 외모에 신경 안 쓰시더니.”
어쩐지 정곡을 찔린 것 같아 머리를 긁적였다.
“왜, 그런 날 있잖아. 좀 예뻐 보이고 싶은 날.”
“……음, 그렇다기엔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닌데요?”
“그건, 그렇지.”
빠르게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평소 같았으면 머리 빗어 주는 것도 귀찮다고 뿌리쳤을 테니까.
“저, 릴리. 혹시, 내 장점이 뭐라고 생각해?”
머리를 빗겨 주던 릴리는 멈칫하더니 날 바라보았다.
“장점이요?”
“그래.”
내 질문에 릴리는 미간이 패도록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아니, 그게 고민을 할 정도로 어려운 질문이었나.
마침내 길고 긴 고민 끝에 릴리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음, 운이 좋으신 거요?”
“…….”
그, 그것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