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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93)화 (93/159)

93화

눈에 띄지 않고 사람을 죽일 방법을 몇 개 떠올렸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일리온의 감시가 너무 굳건해서 말이지.

뭐, 일단은 일리온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했으니 내가 모르는 계획이 있는 거겠지.

그렇게 클라우스를 암살할 방법은 마음속에 고이 접어 둔 채로, 돌아가는 상황을 잠시 지켜보았다.

일리온은 한쪽에서 병사들을 불러 서둘러 회장의 분위기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클라우스는 잠이 든 채 방으로 옮겨졌다.

분주히 움직이던 병사들은 간간이 날 흘끔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나더러 다시 감옥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도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내 옆에서 으르렁거리는 스피넬을 피하고 싶던가.

일리온 덕분에 정원 쪽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어 갔지만, 내겐 아직 풀지 못한 매듭이 남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상석을 바라보니, 때마침 새하얀 옷자락이 황급히 안쪽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라벤느, 그대는 일단 치료를…….”

“네! 치료받고 올게요.”

일리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며 황성 안으로 달렸다.

“의무실이 어딘지는 아나?”

“네, 알아요!”

“그쪽이 아닌…….”

무어라 더 말하려는 일리온을 뒤로하며 서둘러 중앙동으로 향했다. 부디 늦지 않길 바라며.

***

“어딜 그리 급히 가세요?”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아르티아를 향해 묻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날 돌아보았다.

급하게 뛰어온 탓에 연신 숨이 차올랐다.

“헉, 헉.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얘기를 나눴으면 하는데.”

보통 라이벌끼리 신경전을 벌일 땐 이것보다 더 그럴듯한 그림이 나왔던 것 같은데, 정신없이 계단을 내달린 내겐 안타깝게도 체면을 차릴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티아는 그 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저랑 얘기를 나눌 게 아니라, 좀 쉬셔야겠는데요.”

“아뇨. 우리 아직 할 말 많이 남아 있잖아요?”

숨을 몰아쉬며 아르티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오히려 내가 조금 걱정되는 눈치였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제가 가 볼 데가 있어서요.”

“그럼, 그러세요.”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르티아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발길을 재촉했다.

곧이어 조용한 복도에 또각거리는 발소리 두 개가 나란히 울렸다.

“왜 절 따라오시나요?”

“마침 가는 길이 같아서요.”

“어딜 가시는데요?”

“성녀님께서 가시려는 곳?”

의문형으로 대꾸하자 아르티아는 발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지금 하시죠.”

“도와드릴게요.”

“뭘 말이죠?”

“무엇이든요.”

그 말에 아르티아는 날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폐하께 복수하러 가시는 거죠? 그런데 빈손으로 가시게요? 칼이라도 가져올까요? 아니면 몽둥이라던가. 아, 차라리 밧줄은 어때요?”

“리슈펠트…… 양?”

아르티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전 당신을…….”

“배신했다고요?”

아르티아는 내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절 원망하는 건 압니다. 그걸 따지기 위해 절 찾아오셨다는 것도요. 하지만 저에 대한 처벌은 일이 다 끝난 뒤 해 주셨으면 합니다. 걱정 마세요. 도망갈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르티아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 보였다.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기억을 가지고 회귀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의 가족들은 어떻게 됐는지. 또다시 클라우스에 의해 잃고 만 것인지.

아르티아의 과거를 알고 있기에, 혼자서 이 지옥을 버텼을 그녀에게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

“원망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성녀님께 따지러 온 건 아니에요. 어차피, 우리 둘 다 서로를 이용하려 했던 것뿐이잖아요?”

“…….”

그날, 그녀가 날 배신한 걸 알았을 때 느낀 알 수 없는 감정의 정체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자신을 위로해 주던 일리온도 없이 혼자서 이 지옥을 버티고 있었다.

아르티아에게 그런 선택을 강요하는 현실이 얼마나 가시밭길이었는지 알 것 같아서, 차마 그녀의 잘못을 따질 수가 없었다. 나 역시 그저 방관자에 불과했으니까.

“지금은 말씀드린 대로 성녀님을 도우러 왔어요.”

“……어째서요?”

딱히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것도 아니고, 성인군자 흉내를 내려는 것도 아니었다. 내겐 그녀의 복수를 막을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다만, 아르티아의 과거를 아는 한 명의 독자로서 그녀가 좀 더 행복한 길을 걷길 바랄 뿐이었다. 그녀가 보낸 고통의 시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전 성녀님께서 좀 더 행복해지셨으면 하니까요.”

내 대답에 아르티아는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황금색 눈동자에는 혼란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행복을 빌어 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가요?”

“안 될 거 뭐 있나요?”

“……라벤느, 아니 당신은 정체가 뭡니까?”

어떡할까 망설이던 난 결국 아르티아에게 내 정체에 대해 털어놓았다.

다른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몸에 빙의했고, 그녀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다는 얘기를.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아르티아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당신의 존재가 평범하지 않은 줄은 알았지만, 저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실 줄 몰랐군요.”

“기분 나쁘신가요?”

“……조금요.”

역시 그렇겠지. 조금 스토커 같으려나.

내 이야기를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날 말리기를 포기한 것인지. 아르티아는 결국 내가 따라가는 걸 내버려 둔 채 클라우스의 침실로 향했다.

클라우스의 방 안은 생각 이상으로 삭막한 공간이었다.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침대뿐, 그 흔한 책장도, 책상도, 의자도 없었다.

하긴, 자다가 습격이라도 받을까 봐 병사들도 물린 채 주변에 결계를 치고 자는 사람인걸.

방에 대한 감상을 짧게 늘어놓는 사이, 아르티아는 침대 옆에 놓인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에반 님이 그러셨어요.”

에반이라면, 아르티아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그 사제를 말하는 듯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숨 쉬는 것조차 괴로우셨을 텐데, 애써 입을 열어 제게 말을 전하려 하셨죠.”

아르티아는 목이 잠긴 듯, 잠시 숨을 골랐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부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말라고. 에반 님의 말버릇이었어요.”

아르티아는 그렇게 말하며 클라우스를 내려다보았다.

“왜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네요. 아마도, 당신을 만나서 그런 것 같아요.”

“뭘 하실 생각이세요?”

지팡이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얘기해 줘야 하나,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생각해 보니, 클라우스를 그냥 죽이는 건 지나치게 관대한 처사 같아서요. 이왕이면 평생 괴로워하다 죽는 게 좋겠어요.”

“네?”

“같이 지내면서 저도 성격이 많이 바뀐 모양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아르티아는 미소 짓는 게 어색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말을 마친 아르티아는 손을 뻗어 잠들어 있는 클라우스에게 신성력을 쏟았다. 이내 클라우스의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이며, 푸른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일어나신 것 같군요.”

한동안 말없이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피던 그가 물었다.

“……뭘 한 거지?”

“잠든 당신을 깨운 거죠.”

“몸이 안 움직이는데.”

“그야, 정신만 깨웠으니까요.”

클라우스는 비웃음을 흘리더니 아르티아를 노려보았다.

“날 깨워 뭘 하려고?”

“마나를 모두 봉인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시 재울 거예요.”

클라우스는 의문스러운 눈으로 아르티아를 바라보았다.

눈빛의 뜻을 알아차린 아르티아는 친절하게 그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미리 말씀은 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앞으로 제가 할 일에 대해서.”

“고작 마나 하나 봉인하는 거로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는 이 상황이 퍽 우스운 모양이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면 자신에게도 타격이 클 텐데, 마치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제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르티아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존심 강한 당신은 다른 사람의 발아래 있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죠. 모든 걸 자기가 쥐고 흔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니까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겁니다. 그거야말로 당신이 죽기보다 싫어하는 일일 테니까요.”

“그 말을 하려고 깨웠나?”

“본인의 처참한 미래를 알고 있는 편이 좋을 듯해서요. 그래야 잠에서 깼을 때 놀라지 않을 테니까요. 아, 감사 인사는 괜찮습니다. 당신이 제게 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그렇게 말하는 아르티아는 아무래도 쌓인 게 많아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성격이 바뀐 걸 보면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지팡이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클라우스의 몸을 감쌌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빛은 이내 사그라들었고, 아르티아는 짧은 숨을 내뱉으며 지팡이를 거두었다. 봉인이 끝난 모양이었다.

이제 다시 클라우스를 재우기만 하면 되는데,

“하하하하.”

별안간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쥐새끼들끼리 뭉쳐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다며 의기양양한 꼴이라니.”

상황은 여전히 우리가 유리한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짜증이 나는군.”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연기는 순식간에 새하얀 시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해졌고, 난 눈앞에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그가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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