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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92)화 (92/159)

92화

“승자를 선언해 주시지요, 폐하. 제 승리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숙였던 허리를 세우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언제나 미소를 머금던 그의 얼굴은 짜증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클라우스에게 알현을 요청했던 날, 처음부터 내가 노린 건 ‘살아남은 한 사람’이라는 모호한 경기의 규칙을 명확하게 하는 거였다.

수면제로 죄수들을 재우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클라우스라면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내 승리를 인정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일부러 황후 자리 같은 쓸데없는 얘기로 궁지에 몰린 척 연기를 했다. 클라우스가 방심해 내 진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는 내 예상대로 질문의 의도를 오해하고 경기의 규칙을 바꿔 주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부정할 수 없겠지. 네 입으로 직접 바꾼 규칙이니까.

“결계를 해제해.”

클라우스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결계를 해제했다. 성격 급한 그는 장막이 완전히 걷히기도 전에 순간이동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사람이 많은 곳에선 마법을 잘 쓰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온 걸 보니 어지간히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그대는 매번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폐하의 여흥에 도움이 되었다니 참으로 기쁘군요.”

“이럴 생각으로 궁지에 몰린 척 연기를 한 건가?”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척하자, 살벌한 눈빛이 찌를 듯이 날 쏘아보았다.

“설마 이런 식의 결과를 인정하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인정하지 못하면 어쩔 거지? 내가 규칙을 위반한 것도 아닐 텐데.

아무래도 규칙을 잊은 듯한 그를 위해 그가 정한 규칙을 친절히 상기시켜 주었다.

“모두 쓰러지고, 최후에 남은 한 사람을 승자로 인정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쓰러진 사람은 생사에 상관없이 사형에 처하겠다고도 하셨지요. 아 참, 무기는 모두 허가받은 물건이랍니다.”

야구 배트를 흔들며 설명을 덧붙였다. 자신의 여흥을 위해 다양한 무기의 사용을 허락했지만, 그게 이렇게 이용될 줄 몰랐겠지.

그러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게 결국 스스로가 만든 결과라는걸.

“그럼 지금 여기서 그대를 죽인 다음, 반입을 허가한 놈에게도 책임을 물어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클라우스는 검을 빼 들었다. 그래, 뜻대로 일이 안 풀리면 잘라 내 버리는 게 네 스타일이었지.

“하지만 그 전에…….”

그렇게 말하며 클라우스는 순식간에 내 뒤를 잡고선 목에 검을 겨누었다.

“검을 버리게, 공작. 약혼녀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클라우스.”

일리온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3층 테라스에 있는 걸 봤는데, 언제 달려온 건지……. 내가 분명 위에서 구경하라고 했을 텐데.

“폐하, 이건 약속하신 것과 다른데요.”

금방이라도 목을 찌를 것 같은 검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지? 황후가 되겠다는 얘기 말인가?”

그 말에 일리온의 미간이 살짝 움찔했다. 이 자식이,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승자가 되면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얘기 물어본 거라고! 안 그래도 일리온한테 무릎 꿇고 빌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일부러 일리온의 화를 돋우는 클라우스의 행동에 살짝 열이 받은 난, 지지 않고 맞받아쳐 주었다.

“어머, 고작 황후로 되겠어요? 이 고난과 역경을 헤쳤는데 황제 자리 정도는 주셔야죠.”

“재밌는 소릴 하는군.”

재밌다 말했지만, 딱딱하게 굳은 클라우스의 목소리는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양쪽에서 대치하는 사이 날카로운 검은 점점 더 내 목을 조여 왔고, 살짝 스친 피부 위로 붉은 핏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조금 걱정스럽다 싶더니 역시나 일리온은 화를 참지 못했고, 카지노 때처럼 피부 위로 검은 반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게 공작이 감추고 있는 비밀인가?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릴 듣긴 했는데, 조금 오싹하긴 하군.”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는 다른 병사들과는 다르게 일리온이 내뿜는 정체 모를 힘에도 태연히 서 있었다.

“경기에서 이기면 죄를 사면해 준다는 조건 아니었습니까?”

일리온은 더 이상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검을 버리지도 못한 채 클라우스를 노려보았다.

“뭐, 그럼 역모를 꾀했다는 죄는 없던 거로 하지. 하지만, 공작이 내게 검을 들이미는 건 그냥 넘어가 줄 수 없을 것 같거든. 그러니 지금부터 자네들에게 반역죄를 물을 생각이네.”

참으로 그럴듯한 논리였다.

“폐하, 솔직하지 못하시네요. 폐하께선 그냥 공작님을 죽이고 싶으실 뿐이잖아요.”

“그럴 리가.”

“광산에 폭탄을 설치하신 것도, 학술제 때 기계를 조작하신 것도 모두 폐하께서 하신 일 아닙니까?”

근거는 부족했지만, 그 두 사건의 범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클라우스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네들이 뭘 할 수 있겠나. 증거라도 찾아올 건가?”

“폐하께서 하셨다 인정하시는 건가요?”

내 질문에 클라우스는 하찮다는 듯 비웃으며 대답했다.

“인정 못 할 것도 없지. 어차피 그대들은 여기서 죽을 테니까.”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뭐?”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클라우스에 대해서라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부할 수 있었다. 성격, 대사, 행동 하나하나까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반드시 직접 나설 거라 생각했어. 넌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니까.

팡!

손끝에서 터지는 공 사이로 노란색 가루가 뿜어져 나왔다. 클라우스를 위해 따로 준비한 공이었다. 한쪽 면을 갈아, 뾰족하게 다듬은 손톱만으로도 금방 터트릴 수 있게.

가루가 터지는 걸 본 클라우스는 서둘러 내게서 거리를 벌렸지만, 이미 수면제를 들이마신 뒤였다.

“네가 감히…….”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마스크를 잘 써야 한다고.”

마스크를 살짝 끌어 올리며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죽일 것처럼 날 노려보던 푸른 눈은 차츰 빛을 잃어 갔다. 이내 눈꺼풀이 감기며, 그는 그대로 검을 놓치고 쓰러지고 말았다.

“라벤느!”

쓰러진 클라우스를 보며 손에 묻은 가루를 터는데, 일리온이 다급히 달려왔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제 손에 가루 묻었…….”

손바닥을 펼쳐 아직 떨어지지 않은 가루를 가리켰지만, 일리온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와 날 끌어안았다. 숨이 조금 막힐 정도로 꽉.

행여 꽃잎 가루가 그의 옷에 묻을까 봐 들어 올린 손이 어정쩡하게 허공에 멈춰 섰다.

“제가 위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기다렸어.”

“결국 내려오셨잖아요. 그렇게 절 못 믿으실 줄이야.”

“믿었어. 단지, 클라우스를 믿지 않았을 뿐이지.”

옷을 타고 들리는 심장 소리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울리고 있었다. 여러모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일리온에겐 미안할 뿐이었다.

“약속했던 상은 취소예요.”

“무슨 상을 줄 거였는데?”

“음……. 사실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어요. 공작님이라면 못 참고 내려올 것 같았거든요.”

내 대답에, 낮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고작 몇 시간 전에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오랜만에 재회한 기분이었다.

손에 가루가 묻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나저나, 이제 어떡할까요?”

일단은 자기 입으로 일리온을 죽이려 했다는 걸 인정했으니 그걸 빌미로 반격을 시도해 볼까 하는데.

“그건 걱정 말게.”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

“라벤느!”

이미 생각해 둔 게 있다는 듯 말하는 일리온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멀리서도 존재감이 확실한 시원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스피넬 님?”

“일리온, 이 망할 자식. 나한테 이놈들을 다 떠넘기고 혼자 가는 게 어딨느냐?!”

그렇게 말하는 스피넬은 손발에 기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이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좀 떨어져!”

거친 발길질에 온몸으로 그를 막던 병사 몇몇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신체 능력의 소유자였다.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일리온에게 물었다.

“스피넬 님도 오셨던 거예요?”

“……그래.”

잠깐의 침묵 뒤로 들린 대답은 짧았지만 어쩐지 말로 다 하지 못한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 너도 안 보이는 곳에서 고생이 많았구나.

한참을 병사들과 티격대던 스피넬은 기어이 그들을 모조리 떼어 내고 내게 질주해 왔다.

“자, 잠깐. 멈…….”

멈추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내게 몸을 던졌고, 중심을 잃은 난 그대로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마법도 못 쓰고 검도 못 다루는 녀석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게냐! 다시는 이런 일 벌이지 말거라.”

“스피넬 님…….”

“애초에, 저런 놈이 뭐가 이쁘다고 네가 이 고생을 해?”

“…….”

듣고 있는 저런 놈의 심기가 꽤 불편해 보이는데요, 스피넬 님.

그렇게 일리온을 흉보다, 또다시 내 부주의함을 혼내던 스피넬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퍼뜩 몸을 일으켰다.

“역시 내 저놈을 죽여 버려야겠다.”

“자, 잠깐만, 그건 안 돼요.”

당장에라도 클라우스를 죽일 것처럼 달려드는 스피넬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왜? 또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 막는 거냐?”

스피넬은 지난번 사건처럼 내가 막으려는 줄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아니라,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단 말이에요. 이따가, 아무도 없을 때…….”

스피넬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는데 어쩐지 뒤통수가 조금 따가웠다.

“흠흠. 그게 아니라, 우리 좀 더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해 보죠.”

“어떻게?”

음, 독약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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