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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91)화 (91/159)

91화

정원의 구조는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가운데는 공터가 넓게 자리하고 있고, 그 주변을 1m 높이의 나무 덤불이 벽을 만들어 감싸고 있는 형태였다.

그리고 정원 가장자리 쪽에는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아무래도 몸을 숨기려면 최대한 가장자리 쪽으로 가는 게 좋아 보였다.

죄수들도 같은 생각인지, 한 명씩 순서대로 들어오던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장자리 쪽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라벤느는…….

“마지막에 남는 한 명이 이기는 경기라고 했던가?”

“그래.”

“그런데 라벤느는 왜 저러고 있느냐?”

스피넬은 정원의 한가운데서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는 라벤느를 가리키며 물었다.

“……글쎄.”

“저러면 제일 먼저 죽는 거 아니냐?”

“……아마도.”

말없이 라벤느를 바라보던 일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저놈들을 다 죽이러 가야겠다!”

스피넬은 테이블을 쾅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좀 참으라고.”

“너라면 참겠느냐?”

당장에라도 3층 테라스에서 뛰어내릴 것처럼 발을 걸친 스피넬은 자신을 붙잡는 일리온을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다.

일리온의 표정은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 역시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듯,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말리지 마라. 애초에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네놈 때문이지 않으냐.”

스피넬은 일리온의 아픈 구석을 찌르며 쏘아붙였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라벤느를 좀 더 믿어 줘.”

하지만 일리온 역시 한 치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테라스 난간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렇게 많은 분들이 구경 오셨을 줄은 몰랐네요. 다들 반가워요!”

경기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라벤느의 경쾌한 목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울렸다.

***

“아, 아가씨. 지금 뭐 하세요?”

“보면 몰라요? 인사하잖아요?”

테라스를 향해 손을 흔들자, 클라우스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래, 그걸 보려고 한 거야. 지금 이건 선전 포고니까.

지금쯤 클라우스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못 하고 물러났던 사람이 이렇게 웃으며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실은 그게 다 내 연기였다는 걸 깨달으면 네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아가씨, 인사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도 빨리 숨어야죠. 벌써 북소리가 울렸어요.”

“기다려요, 세르지오. 이제 막 시작한 거니까.”

“네?”

세르지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차피 지금 가 봐야, 괜찮은 자리는 이미 앞사람들이 차지했을 거예요.”

주변을 쓱 둘러보니 다들 어찌나 잘 숨었는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감옥에 들어온 순서대로 사람을 들여보내는 것부터 이미 평등하지 않은 출발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원에 발을 내디딘 나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한가운데서 죽여 달라고 기다리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세르지오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몸을 숨긴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게 뭘까요?”

“그, 글쎄요…….”

“경기의 규칙은 간단하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될 때까지 서로 싸우는 것. 다시 말해, 경기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예요.”

이 경기에 가장 큰 문제는 제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흉악범 중에 호전적인 놈들이 많으니, 경기는 반나절을 넘기지 않고 끝나겠지만 아무리 뇌에 근육이 차 있더라도 어깨 위에 달린 게 장식이 아니라면 알 것이다. 먼저 싸울수록 불리하다는걸.

“그러니 다들 최대한 몸을 숨겨 체력을 아끼고 싶지 않을까요? 그래야 생존할 확률이 오를 테니까요.”

“그러면 여기 있을 게 아니라 저희도 빨리 숨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뇨, 저희는 안 숨을 거예요. 저희한테는 여기가 제일 안전하거든요.”

내 말에 세르지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릴 공격하려면 모습을 드러내야 할 텐데, 여긴 한 번 모습을 드러내면 숨기 힘든 곳이잖아요? 괜히 우릴 죽이려고 자신의 위치를 알려 줄 필요는 없죠.”

경기 초반은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다들 숨죽이고 있겠지.

그러니 어지간히 멍청한 놈이 아니고서야 우릴 공격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 리 없었다.

“아하……!”

세르지오는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손뼉을 쳤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딱히 더 유리한 건 없지 않나요? 언제까지 다들 우릴 지켜만 볼 것 같지도 않고…….”

그래, 아주 좋은 질문이야. 가끔 그렇게 생각이라는 걸 하는 티를 내 줘서 고마워. 내가 널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말이야.

“맞아요. 탐색전도 곧 끝나겠죠.”

정원에 풀어놓은 죄수는 30명 남짓. 정원이 넓긴 했지만, 서로의 위치 파악에 애를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전투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공격을 시도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북이 울린 지 얼마 안 된 이 시점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우린, 그사이에 홈런을 쳐 보죠.”

어깨를 풀 겸, 일리온이 가져다준 야구 배트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네? 호, 홈런이요?”

세르지오가 얼이 빠져 물었다. 그게 뭐냐는 눈빛이었다.

“자, 자. 아까 내가 가르쳐 준 거 있잖아요. 힘껏 던져 봐요.”

어린시절에 난 사람이 가득한 경기장에서 홈런을 쳐 보는 게 꿈일 정도로 야구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었다. 뭐, 어쩌다 보니 꿈은 꿈일 뿐이라는 소릴 하는 재미없는 어른으로 자라 버리고 말았지만…….

그런데, 그렇게 마음속에만 담아 두던 꿈을 이런 낯선 세계에서 이루게 될 줄이야.

다 네 덕분이야, 클라우스. 그러니 감사 인사를 담아, 첫 번째 홈런은 너한테 보낼게.

세르지오가 던진 공을 힘껏 쳐서 클라우스가 앉아 있는 테라스로 날렸다. 공은 당연히 결계에 부딪혔고, 클라우스 바로 앞에서 펑 하고 터지며 노란색 가루를 공중에 흩뿌렸다.

흩날리는 가루 때문에 클라우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었다.

“자, 다음 거 빨리 던져요!”

꾸물거리는 세르지오를 재촉해, 이번엔 오른쪽으로 공을 날려 보냈다. 또다시 결계에 부딪힌 공은 펑 하고 터지며 노란색 가루를 토해 냈다.

“다음, 다음!”

팡팡 터지는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연달아 공을 사방으로 날렸다.

“아가씨, 이 공이 정말 효과가 있는 거예요? 결계가 부서지기는커녕 금도 안 가는데요?”

세르지오는 착실하게 공을 던지면서도 여전히 의심스러운지 내게 물었다.

어머, 내가 언제 결계를 부순 댔니? 안 죽을 자신이 있다고 했지.

“세르지오, 그거 알아요?”

“뭘요?”

다시 한번 그가 던진 공을 날려 보내며 설명을 이어 갔다.

“라프의 꽃잎은 불에 태우면 숙면을 도와주는 효과가 있지만, 직접 흡입하면 강한 수면제가 된대요.”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요.”

“그러니까 지금 터지는 게…….”

이해가 느린 그를 위해 친절하게 마저 설명을 해 주려는데, 누군가 날 애타게 부르며 달려왔다.

“라벤느!”

이렇게 바쁜데 누가 날 찾는 거야, 진짜!

수풀 더미에서 불쑥 나타난 사람은 가드너였다. 생각보다 탐색전이 빨리 끝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죽이고 싶었던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멍청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한테 넘겨줄 수 없어서 말이야. 역시 네 목은 내가 따야겠다.”

그래그래, 어련하시겠어.

이럴 때를 대비해 따로 챙겨 둔 공을 가드너를 향해 던졌고, 그는 들고 있던 검으로 날아오는 공을 손쉽게 반으로 갈라 버렸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검술 솜씨는 꽤 쓸 만해 보였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만만했던 건가?

“이야. 그걸 단박에 자르시다니, 솜씨가 대단하시네요.”

손뼉을 치며 그의 능력에 감탄하자, 그는 보란 듯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고작 이딴 공으로 뭘 하겠다는…….”

“세르지오, 봤죠? 저 노란 가루가 바로 라프의 꽃잎 가루예요.”

가드너를 가리키며 세르지오에게 마저 설명을 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가드너는 내 설명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지만. 역시 그냥 멍청했던 모양이다.

“아가씨. 그 말은 이 가루를 마시면…….”

난 서둘러 챙겨 온 마스크를 쓰며 말했다.

“어머, 제가 말 안 했던가요?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이미 충분한 공기를 들이마신 세르지오는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세르지오, 넌 역시 착하고 조금 멍청한 구석이 있구나. 내가 여길 나가면, 널 석방할 방법이 없는지 알아볼게.

공터의 상황이 정리된 후, 황사 낀 하늘처럼 뿌연 정원을 거닐며 주변을 살폈다.

중간중간 잠이 든 사람들이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이 보였다.

“이야, 율리아. 너도 여기 있었구나. 제프는 저기 있네.”

납치당했을 때의 기억에 울컥해 제프의 볼을 쿡쿡 찔렀다.

반응이 없는 걸 보니 확실히 잠이든 모양이었다.

작전을 떠올리기 전,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과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일리온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조급한 마음에 시야가 꽉 막혀 있었다.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바보 같은 판단을 했고, 결국 소중한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말았다.

모두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거창한 소리를 해 놓고는 정작 주변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모두의 도움을 받고 있지 않은가.

야구 배트도, 백합이 수놓아진 마스크도, 라프의 꽃잎 가루도. 모두 이곳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들이 날 위해 준비한 선물들이었다.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는데 지나치게 먼 길을 돌아왔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안개처럼 퍼진 노란 가루가 천천히 가라앉으며 테라스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아래는 어떤 모습일까. 부디 속이 뒤집히는 모습이길 바라며, 클라우스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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