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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90)화 (90/159)

90화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어이없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여전히 돌멩이에 손톱을 갈며 대답했다.

“네.”

“……아가씨는 걱정도 안 되세요?”

“뭘요?”

“당장 내일 죽게 생겼다고요. 그런데 태평하게 손톱 정리라니요.”

한 가지 의외인 점은 그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멍청하긴 해도 의외로 정신력은 튼튼한 것 같단 말이지. 안 그래도 마침 그런 사람이 필요했는데…….

“세르지오, 내가 왜 이렇게 태평한지 궁금해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난 철창 밖으로 손을 빼서 좀 더 이쪽으로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세르지오는 예상대로 별 의심 없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건 안 죽을 자신이 있어서예요.”

“네? 어떻게?”

“쉿. 소리 줄여요. 당신에게만 알려 주는 거니까.”

내 말에 세르지오는 아예 철창 밖으로 귀를 빼고 내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방법인데요?”

“그건…….”

“그건?”

세르지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온 신경을 내 쪽으로 향했다. 난 잠시 주변을 살피다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내일 가르쳐 줄게요.”

***

이른 아침. 클라우스의 지루함을 달래 준다는 막중한 임무를 띤 죄수들은 하나씩 병사들에게 끌려 정원으로 향했다.

가기 싫다며 버티는 사람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순히 병사들을 따랐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장미 정원은 황성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커다란 크기에 잠시 놀라 바라보는 사이, 연륜이 있어 보이는 병사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기고에 가기 전에, 먼저 경기장에 관해 설명해 주겠다. 앞에 보이는 정원이 자네들이 싸우게 될 경기장이다. 주변에 푸른색 경계선이 보이나?”

병사의 질문에 죄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푸른색 경계선은 정원 주변으로 커다란 돔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마법으로 만들어 놓은 결계일 것이다.

“이건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특별히 만든 결계다. 만약 밖으로 나가려 한다면…….”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들고 있던 고기 한 덩이를 결계 쪽으로 던졌다.

결계에 닿은 고깃덩어리는 파지직 소리를 내며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될 테니 주의하도록.”

잿더미가 되어 버린 고기를 보며 죄수들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다음은 무기 창고로 갈 거다. 도착하면 각자 맘에 드는 무기를 고르도록 해. 그리고…….”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손짓을 했다.

“자네는 잠시 따라오도록.”

병사의 손짓에, 주변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혹여나 혼자만 열외를 시키려나 하는 의심이 담긴 눈초리였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상대는 클라우스였고, 그 인성 파탄자에게 열외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도착한 곳에는 예상대로 일리온이 서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더 상한 듯한 게…….

“밥은 잘 드시고 계세요?”

“……물어볼 게 그것뿐인가?”

“공작님도 저한테 그런 거나 물어봤잖아요. 지난번에 면회 와서.”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반가운 마음은 숨기기 힘들었다.

그렇게 싫다고 밀어내 놓곤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염치없긴 하지만, 일리온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 힘이 나는 듯했다.

“하여간 태평하군.”

“공작님이라면 제시간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말에 굳어 있던 미간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물건은 어딨어요?”

“여기 있네.”

그가 건넨 꾸러미를 받아 안에 든 물건을 살폈다. 손바닥에 쓴 글을 잘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일리온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완벽하게 물건을 준비해 주었다.

“검사는 끝났습니까?”

“그래. 원한다면 옆에 있는 부하에게 물어보게.”

일리온은 자신과 동행한 병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마법 반응 모두 확인했습니다. 검사 결과,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꾸러미에서 시선을 거두고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외부에서 무기를 들여오는 건 규칙 위반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죄인을 만나게 도와드리는 건 규칙 위반입니다. 공작님의 부탁이니 이번만 들어드렸습니다만, 오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안한 기색이 없는 게 일리온다웠다. 애초에 이렇게 날 부르지 않아도 무기 정도는 병사들을 통해 들여보낼 수 있었을 텐데.

“이제 가 보세요.”

“……정말 괜찮겠나?”

못내 걱정되는 모양인지 일리온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살아남기만 하는 거라면, 저한테도 승산이 있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되묻는 일리온은 여전히 미련이 가시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내 계획을 주절주절 나불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떡할까 고민하던 난, 일리온의 옷깃을 끌어당겨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딱히 들려도 별문제 없을 말을.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일리온은 비로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무리한 행동은 하지 말게.”

“걱정 마세요. 그렇게 절 못 믿으세요?”

“믿어.”

대수롭지 않게 평소처럼 농담을 던지자 조금은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곧이어 일리온은 내 두 손을 그러모아 짧게 입을 맞추었다.

“누구보다 그대를 믿고 있어.”

잔잔하게 반짝이는 눈은 보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한결같은 신뢰를 담고 있었다.

그 눈빛을 계속 바라보기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그, 그럼 가 볼게요.”

주변에 눈도 많은데 못 하는 말이 없다니까. 그랬다가 들키면 어쩌려고. 하여간…….

속으로 그의 무신경함을 투덜거리면서도, 손가락은 왠지 모르게 일리온의 입술이 닿은 곳을 쓰다듬고 있었다.

대기실에 도착하자 뜨거운 시선들이 내게로 꽂혔다. 이미 무기고를 한차례 다녀온 모양인지, 죄수들의 손에는 각색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 가드너 백작이 건들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이야, 이렇게 다시 만날 줄 몰랐습니다, 영애.”

“오랜만이에요, 가드너 백작님. 아, 이제 백작님이 아니셨죠?”

부채라도 펼쳐 들고 하하 호호 해야 할 것만 같은 대화였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둘 다 더 이상 귀족 신분은 아니었다.

“하하, 모두 영애 덕분이죠.”

“어머나,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마주 보며 웃어 주자 열이 받은 모양인지, 가드너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신을 믿지 않았는데, 앞으로 종교라도 가져야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소원이 이뤄질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으니까요.”

가드너는 그렇게 말하며 눈앞에서 손가락을 풀기 시작했다. 우드득 하는 소리가 사뭇 위협적이었다.

이제 보니 체격도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게, 저 주먹에 한 대 맞으면 가이아 여신이랑 인사하고 올 수 있을지도…….

“경기 전엔 싸움은 금지라는 설명 못 들었나?”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가 앞을 가로막으며 가드너를 제지했다.

“싸움이라니요, 그저 인사를 나누려는 것뿐입니다.”

가드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곤 병사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잠시 후에 다시 봅시다. 영애.”

난 다시 보고 싶은 생각 없는데.

“아가씨, 저 사람이랑도 아는 사이였어요?”

가드너가 사라지자, 세르지오가 슬금슬금 다가와 물었다.

“뭐, 그렇죠.”

“여러모로 인맥이 두터우시네요.”

이걸 과연 인맥이 두텁다고 해야 할까.

“아, 참. 세르지오, 이거 받아요.”

“네?”

난 그에게 자루를 하나 건넸다.

“이게 뭔데요?”

“내가 어제 말했잖아요? 여길 나갈 방법이 있다고. 공작님한테 몰래 받아 온 거예요.”

그에게 작게 속삭이자, 세르지오의 눈이 기대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황성 서쪽 건물. 테라스를 활짝 열어 술과 음료를 마련해 놓은 자리엔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좌석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일리온의 동행인 신분으로 참석한 스피넬이 정원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라벤느는 만나고 왔느냐?”

“그래.”

“그냥 가서 죽여 버리면 될걸, 왜 이런 귀찮은 짓을 보고 있어야 하는지.”

그 말을 그대로 황제에게 했다가는 그녀 역시 반역죄로 잡혀갈 일이었다. 물론, 일리온이라고 해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인정하긴 싫지만, 라벤느와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스피넬과 의견이 곧잘 맞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행동을 마냥 묵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다려, 얌전히.”

“내게 명령하지 마라.”

스피넬은 신경질적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잔뜩 굳은 미간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라벤느가 황성에 갇혔다는 걸 알게 된 후로 계속 저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황성에 쳐들어가겠다는 걸 말리느라 세바스찬과 릴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내가 아니라, 라벤느가 한 말이다.”

“라벤느가?”

“그래. 위에서 지켜보라고 하더군.”

제 옷깃을 잡아당기며 속삭이던 라벤느는 떨고 있었다. 그녀가 느끼는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로.

그렇게 떨고 있으면서,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농담을 던지다니.

‘위에서 얌전히 구경하고 계세요. 말 잘 들으면 끝나고 상을 줄 테니까.’

하여간 말은 잘한다니까.

또렷이 반짝이는 눈빛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라벤느였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영악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눈빛.

물론, 여차하면 당장에라도 뛰어들 테지만, 지금은 라벤느를 믿고 지켜볼 때였다.

일리온은 순서대로 정원으로 들어서는 죄수들을 바라보았다. 올해는 죄수가 많지 않다며 아쉬워하던 클라우스의 말대로, 숫자는 다 합쳐도 기껏해야 30명 남짓으로 보였다. 그게 라벤느에게 호재일지, 악재일지…….

일리온은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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