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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89)화 (89/159)

89화

예상과 다르게 일리온의 거절은 단호했다. 혹시 라벤느를 향한 관심이 식은 건가 싶었으나, 그녀를 언급할 때마다 언뜻언뜻 비치는 애정은 전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럼 왜?

애정이 식은 게 아니라면, 면회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래서 일리온이 저렇게 나오는 거라면…….

맘처럼 되지 않는 상황에 아르티아는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할 말은 끝나신 거로 알고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자, 잠깐.”

서둘러 일리온을 붙잡아 보려 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설사 일리온을 붙잡는다고 해도, 무슨 말로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더 이상 라벤느를 구할 생각이 없다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아르티아는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리며 방으로 향했다. 그가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언제까지 손가락만 깨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리온이 그럴 마음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 교황의 도움을 받아 성물의 수리가 거의 끝났다. 상황은 안 좋았지만, 역전시킬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성녀님, 아르티아 성녀님!”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아르티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요?”

클라우스의 부름이라는 얘기에 아르티아는 감추기 힘든 불쾌함을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네, 바로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가만히 두는 법이 없군. 그녀는 끓어오르는 짜증을 삼키며 병사의 뒤를 따랐다.

도착한 알현실에는 자신보다 먼저 라벤느가 자리해 있었다.

감옥에서 며칠 고생을 해서인지 몰골은 썩 좋지 않았으나, 얼굴엔 연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르티아는 그런 라벤느의 모습을 힐끔 바라보다 클라우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쩐 일로 절 부르셨습니까?”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자네도 같이 들으면 좋을 것 같아서.”

또 무슨 쓸데없는 얘기를 하려고. 고개를 들어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턱을 괴고 있는 남자는 어디선가 많이 본 익숙한 지팡이를 이따금 바닥에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지팡이를 본 아르티아의 표정이 차츰 굳어 갔다.

“그건…….”

“아, 이거?”

그의 손에 들린 건 아르티아가 얼마 전 수리를 마친 성물이었다. 방에 잘 숨겨 뒀을 텐데, 어느 틈에…….

“우연히 주웠네. 혹시 그대 물건인가?”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는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방을 나오기 전만 해도 성물은 제 방에 있었다. 아마도, 일리온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방을 뒤진 모양이었다.

설사 클라우스가 성물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해도, 그 물건이 지닌 힘에 대해서는 아직 모를 것이다. 교황에게도 성물이 가진 힘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 미소가 이토록 불안한 걸까.

맞다고 대답한다면 추궁이 이어질 테고, 아니라 대답해도 이미 자신을 의심하는 상황을 피하긴 힘들어 보였다. 어차피 의심받는 상황이라면, 일단은 잡아떼는 수밖에.

아르티아는 긴장을 숨기며 태연히 대답했다.

“아니요. 제 물건은 아닙니다.”

돌아가는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리온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고, 성물마저 클라우스에게 뺏기고 말았다.

한순간도 그를 얕잡아 본 적 없었다. 경계하고 또 경계했는데, 자신은 또다시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그래? 그럼 주인을 찾는 건 다음에 하기로 하고, 하던 얘기를 마저 할까?”

클라우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르티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내 제안을 승낙하겠다고 했던가?”

“네. 생각해 보니, 황후 자리도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요.”

황후라고? 아직 혼란이 채 가시지 않은 아르티아는 두 사람의 대화를 쉽게 따라갈 수 없었다.

될 수 있는 한 클라우스 앞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잘게 떨리는 손끝까지 숨기기는 힘들었다.

설마 일리온이 라벤느를 구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것 때문인가?

“흠……. 형벌이 결정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죄인인 그대를 황후로 맞이하기엔 원로들의 반대가 심할 것 같군.”

“하지만 폐하께서는 절 맘에 들어 하셨잖아요?”

“글쎄, 취향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은 게 충격이 크단 말이지.”

시종일관 미소 짓던 라벤느는 이제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런 농담을 마음에 담아 두실 줄 몰랐습니다.”

“마음에 담아 두는 성격이라.”

클라우스의 장난스러운 모습에, 아르티아는 점점 더 괴리감을 느꼈다.

라벤느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던 클라우스는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야.기회를 놓쳤으면 포기해야지.”

그녀가 일리온과 무슨 작전을 짰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클라우스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녀도, 일리온도, 그리고 자신도.

라벤느는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말없이 서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폐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추수제에 나가겠습니다. 그 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클라우스의 표정은 이미 승기를 잡은 듯 보였고, 앞으로 이어질 대화에서 라벤느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추수제에 나가면 라벤느가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없을 테니까.

“살아남은 한 명은 죄를 모두 사면해 주시겠다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 조건이라도 있어야 다들 힘을 낼 거 아닌가?”

“마, 만약 경기가 끝나더라도 승자를 제외하고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클라우스는 라벤느를 지긋이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 말은, 죽은 척하고 시체들 사이에 숨어 있어도 살아남았다 할 수 있냐고 묻고 싶은 건가?”

라벤느는 속마음을 들킨 듯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참 방심할 수 없단 말이야. 그런 식으로 규칙의 애매함을 파고들려 하다니.”

그렇게 말하던 클라우스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경기의 규칙을 좀 더 명확하게 하지. 모두 쓰러지고 마지막에 서 있는 자를 승자로 인정하기로. 그 외에는 모두 패배한 것으로 간주하고, 혹 여전히 숨이 붙어 있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하겠다. 어떤가?”

클라우스의 말에 라벤느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르티아는 그런 라벤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을 잃은 그녀는 클라우스와의 대화에 완전히 말려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자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둘 다 그저 클라우스의 여흥을 위한 사냥감일 뿐이었다.

***

감옥으로 돌아오자마자, 뒤따라온 병사가 죄수들에게 공지 사항을 전달했다.

“나흘 뒤 있을 경기의 규칙이 변경되어, 다시 한번 공지하겠다. 새로 온 사람들도 있으니 잘 들어 두도록.”

그렇게 말하며 그는 경기 규칙에 관해 설명했다.

“경기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치러지며, 밖으로는 절대로 나갈 수 없다. 탈출을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사형이니 주의하도록. 무기는 아티팩트를 제외하고 모두 사용 가능하며, 기본적으로 제공해 주는 무기 외에 외부에서 들여오는 것도 인정한다.”

규칙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원작의 아르티아 역시 이 빌어먹을 경기에 참여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기는 모두 쓰러지고 최후에 서 있는 한 명을 승자로 인정하는 순간 종료되며, 경기가 끝난 뒤에는 숨이 붙어 있다 할지라도 모두 패배로 간주하고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한다.”

공지가 전달된 뒤 감옥 안은 또 한 번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말았다.

“뭐야, 무슨 규칙이 바뀌었는데?”

“쓰러지면 어차피 죽은 거 아니야? 사형에 처하겠다는 건 무슨 소리야?”

“죽은 척하고 살아 있는 놈들을 말하는 거 같은데?”

새로운 규칙의 뜻을 알아차린 사내들은 오히려 잘됐다며 호탕하게 웃었고, 나를 포함해 생존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은 이들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렇게 다들 신경이 곤두선 가운데, 난 다급히 돌아가려는 병사를 불렀다.

“저기요, 저는 아침에 면회 가느라 밥을 못 먹었는데요!”

“식사 시간은 이미 지났네.”

“어차피 나흘 뒤에 죽을 거, 밥이라도 먹게 해 주시면 안 돼요?”

병사는 날 보며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잠깐 기다리라 하며 돌아갔다.

“아가씨, 이 와중에 밥이 넘어가세요?”

병사와 대화하는 걸 들은 모양인지, 옆방에서 세르지오가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힘을 내려면 밥을 잘 먹어야죠.”

“뭐, 맞는 말씀이긴 한데…….”

“그리고, 여기 밥 은근 맛있거든요.”

“……아, 네.”

배식되는 밥은 클라우스의 특별 요청으로 인해 퀄리티가 꽤나 좋았다. 이게 다 힘없이 죽지 말고 충분한 구경거리가 되어 주라는 배려 아니겠는가.

그러니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먹어야지. 그가 원하는 대로, 힘없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감옥 안에서도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갔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확률을 올리기 위해 운동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의 압박감을 못 이기고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죽은 듯 가만히 누워 현실 도피하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일에 열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사각사각.

“뭐 하세요?”

옆에서 연신 부스럭거리는 게 신경 쓰였는지 세르지오가 말을 걸어왔다.

“손톱 정리요.”

“……이 와중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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