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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88)화 (88/159)

88화

황성의 경비병 맥스는 일리온과 라벤느의 대화를 보고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임무가 순탄치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전개가 그를 기다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맥스는 아연한 표정으로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면회실에 들어오기 전, 누구 하나 죽일 것 같던 살벌한 표정의 남자가 별안간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연한 모습으로 죄수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눈 뜨고 보기 힘들었지만, 영애의 말 또한 가만히 들어주기 힘들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라고 생각하는 건지…….’

성녀를 탈출시키겠다는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세웠다기에,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어쩌면 그냥 미친 사람은 아닐까 하는 불경한 생각이 잠시 들었다.

“키스도 허락받아야 하나요?”

일리온이 미적거리자, 라벤느는 이번엔 맥스를 향해 질문했다.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당황스러운 질문에 맥스는 잠시 주춤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일리온의 무릎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작님을 더 이상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마지막 작별의 키스를 하는 것으로 해요.”

저런 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라벤느가 대단한 것인지, 그걸 당연하게 받아 주는 일리온이 대단한 것인지.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던 맥스는 그냥 한 쌍의 바퀴벌레라 표현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바퀴벌레 중 한 명이 입을 맞추려다 멈춰서 자신을 돌아보았다.

“키스하는 것도 지켜보실 생각인가요?”

“네, 네?”

“아니, 뭐. 보고 싶으면 그러셔도 상관없지만…….”

하며 말을 줄이는 라벤느의 눈초리는 별로 무섭지 않았지만, 그 뒤에 있는 일리온의 눈빛은 조금 무서웠다.

“그, 그럼 잠시 뒤돌아 있겠습니다.”

맥스는 황급히 몸을 돌려 벽 쪽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어야 하는 건지.

클라우스에게 받은 명령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게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공작님, 자꾸만 그렇게 움직이지 마세요.”

“하, 하지만.”

“아이참. 그러지 말고 좀 더 내밀어 보시라니까요.”

“라, 라벤…… 읏…….”

이 끈적한 대화는 다 뭐란 말인가. 그리고 대체 뭘 내밀라는 건데, 응?

옷이 스치는 바스락 소리와 함께 간간이 들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맥스의 귀를 어지럽게 했다.

‘이 신성한 면회실에서 대체 뭘 하는 겁니까!’

당장에라도 귀를 막고 싶었지만, 모든 대화를 낱낱이 보고하라는 클라우스의 명령이 끝내 발목을 잡는다.

거사를 치른 두 사람은 한참 만에 떨어졌다.

“공작님, 이걸로 정말 안녕이에요.”

“……라벤느.”

“공작님을 만나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이제 후회는 없어요.”

대화를 듣던 맥스는 뒤를 흘끔거리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입맞춤은 끝났으나 두 사람의 모습은 여전했다.

“저는 이제 죗값을 치르러 가겠습니다. 인연이 된다면,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렇게 중얼거리며 라벤느는 눈물을 훔쳤다.

‘하, 다음 비번이 언제더라.’

이 넓은 세상에서, 사랑이라곤 오직 둘만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맥스는, 그 짧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생산적으로 보내기 위해 까마득한 비번 날짜를 세어 보았다.

그리고 쉬는 날까지 앞으로 일주일이나 남았다는 사실에 조금 더 슬퍼졌다.

양 볼에 살짝 홍조가 깃든 일리온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알겠네.”

‘간다고, 벌써?’

좀 더 매달릴 줄 알았는데, 일리온의 대답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뭐,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랴.

삼류 연극에도 안 나올 것 같은 둘의 사랑 노래를 드디어 끝내겠다는데.

그렇게 일리온이 돌아가고, 맥스는 라벤느를 데리고 감옥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혼을 쏙 빼놓은 임무가 드디어 끝이 보이는 듯했다.

“저, 병사님. 폐하께 말씀 하나만 전달해 주시겠어요?”

그러나 눈앞의 영애는 곱게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맥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뭘 말입니까?”

“지난번에 해 주셨던 제안,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그렇게 전해 주세요.”

“……네?”

맥스를 눈을 크게 뜨고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그날 클라우스의 발언이 너무도 충격적이라 이미 황성에 소문이 파다했다. 듣기로는 분명…….

“전달해 주실 거죠?”

방금 전까지 공작과 신파극을 찍어 놓고, 이제 와서 눈물 싹 닦고 클라우스의 황후가 되겠다니.

참으로 무서운 여자라 생각하며 맥스는 몸을 살짝 떨었다.

***

면회실을 나온 일리온은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라벤느의 감촉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듯했다.

뜬금없이 입맞춤을 하고 싶다는 말에 당황하긴 했지만, 그간 지켜본 라벤느라면 그 말에 분명 다른 뜻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라벤느는 입맞춤을 할 것처럼 굴다, 병사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자마자 곧바로 눈빛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제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빠르게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필요한 물건.’

간지러움에 몸을 비틀자, 그녀는 좀 더 손바닥을 내밀어 보라며 재촉했다. 달콤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렇게 몇 가지 물건을 적어 내린 라벤느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삶을 포기한 사람의 눈은 아니었다. 결의에 차 있는 눈빛엔 자신을 믿어 달라는 듯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미련 없이 무릎에서 일어나는 라벤느를 아쉽게 바라보던 일리온은, 이어지는 그녀의 연기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려 일부러 헛기침을 해야만 했다.

비록 짧은 대화였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 역시 선명히 보였다.

형의 집행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남은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공작님.”

그러나, 서둘러 황성 밖으로 나가려던 일리온을 누군가 붙잡았다.

일리온은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르티아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한 번쯤 만나서 얘길 나눠 볼 생각이었는데, 먼저 찾아올 줄이야. 잠시 고민하던 일리온은 기꺼이 대화에 어울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서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 듯했으니까.

“저와 손잡지 않으시겠습니까?”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긴 후, 주변을 살피던 아르티아는 조심스레 일리온을 향해 물었다.

“약혼녀를 구하는 데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도움이라, 제게 무슨 도움을 주실 수 있죠?”

“당신이라면 클라우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계시겠죠.”

그렇게 운을 뗀 아르티아는 그동안 보아 왔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그는 절대로 당신의 약혼녀를 풀어 주지 않을 겁니다. 그의 진짜 목적은 리슈펠트 양이 아니니까요.”

“목적이라니, 마치 폐하께 다른 뜻이 있다는 말씀 같군요.”

일리온은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그녀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가 노리는 건 당신이에요.”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르티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

눈앞의 일리온은 자신을 위해 반역을 저지르던 남자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의 구미가 당길 만한 패를 보여 줘야만 했다. 어설픈 대답은 소용없었다.

고민을 끝낸 그녀는 일리온을 직시하며 질문에 답했다.

“학술제 때, 기계의 방향이 틀어졌던 건 사고가 아닙니다. 클라우스의 짓이죠.”

아르티아의 예상대로 그 대답은 일리온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막연히 의심만 하던 일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일리온은 섣부르게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조급한 마음을 능숙하게 감추며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과연 어디까지 정보를 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마법부에서도 원인을 못 찾고 있던데, 어떻게 그걸 확신하시죠?”

“마나는 시전자마다 제각기 다른 흔적을 남긴다는 걸 아시나요?”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장미 그림을 감정했을 당시에 감정사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일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계의 하단 부분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마법부가 찾았을 텐데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제가 가려 두었으니까요.”

“가렸다고요?”

일리온은 질문에, 아르티아는 찬찬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신성력과 마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능력이죠. 제가 마나를 감지할 수 없는 것처럼, 마법사들 역시 제 신성력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클라우스가 남긴 마나의 흔적 위에 신성력을 덮어 찾을 수 없게 해 두었어요. 그게 드러난다면 클라우스가 증거를 지우려 들 테니까요.”

“…….”

그렇게까지 했다는 건, 아르티아에게는 자신을 만나기 이전부터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클라우스를 무너뜨릴 생각을. 

“이쯤 되면 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아시겠죠.”

결국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는 말인가?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만, 당신과 손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리라 확신에 차 있던 아르티아는 내심 당황하며 물었다.

“혹시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건가요?”

“방금 하신 말은 믿습니다. 단지, 당신을 믿지 않는 것뿐이죠.”

라벤느가 아무리 사고를 치고 다닌다 해도 아무 대책도 없이 아르티아를 탈출시키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사전에 얘기가 된 일이었겠지.

그런데 왜 라벤느만 잡히고 아르티아는 갇히지 않은 걸까.

클라우스가 그리 너그러운 인간은 아니니, 아르티아를 용서했다는 가정을 지우면 남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라벤느를 배신했다는 것.

역시나 아르티아는 그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절 믿어 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단지, 리슈펠트 양을 구하기 위해서는 제 도움이 필요할 거란 말이죠.”

그 말에 일리온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 역시 필요 없습니다. 구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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