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서둘러 황성에 도착하긴 했으나 라벤느를 만나는 건 맘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면회가 금지되었습니다.”
면회 요청에 담당 병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지?”
“그 어떤 면회도 허락하지 말라는 폐하의 명이십니다.”
그래, 당연히 그렇게 나오겠지. 일리온은 조급함을 숨기며, 병사에게 물었다.
“폐하께선 지금 어디 계신가.”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직접 가서 부탁드리지.”
“그건 아마 안 될…… 겁니다.”
일리온을 상대하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인지, 병사는 자신 없게 말을 흐렸다.
“공작님께서 방문하면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을 하셨거든요.”
마치 자신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내린 명령처럼 보였다.
클라우스가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라벤느에게 관심을 두는 걸 경계했다.
유독 클라우스 앞에서 라벤느를 아내라고 칭한 것도, 곧 결혼할 사이임을 지속해서 상기시켜 준 것도, 괜한 관심을 거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하긴, 경고한다고 해서 들을 인간이 아니지. 클라우스라면 오히려 그 틈을 파고들 테였다.
결국, 약점을 쥐고 있는 건 클라우스였기에 일리온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럼 폐하께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네.”
그를 기다리는 것밖에는…….
“오늘로 닷새째라던데…….”
“닷새? 벌써 그렇게 됐어?”
이른 아침,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여간 그분도 대단해. 어떻게 한숨도 안 자고 같은 자리에서 그렇게 기다리지?”
“……내 말이. 그런다고 폐하께서 만나 주시겠냐고. 아무리 약혼녀 때문이라지만, 역모에 준하는 죄인데. 괜히 불똥이 튀면 어쩌시려고.”
“그나저나 그분 가끔 화낼 때 몸이 안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아?”
“너도 겪었어? 나만 그런 줄 알았네.”
그때를 떠올리면 다시는 마주치기 싫다는 듯 경비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멀리서 걸어오는 익숙한 인영에 바짝 긴장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떠오르는 태양 빛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금발이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집무실 방향이었다.
말단 병사들까지 얘기를 주고받을 만큼 일리온의 이야기가 황성에 퍼진 상태였다.
클라우스라고 모를 리 없었다. 알면서 일부러 만나 주지 않고 있었으니까. 일리온이 그 상태로 얼마나 버티나 궁금한 것도 있지만, 그의 목적은 조금 다른 데 있었다.
일리온이 아르티아와 자주 만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축복을 받는다는 걸로 미루어 보아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혹은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르티아와 만날 수 없도록 그녀를 방에 가둔 것이다.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면, 그가 가장 바라는 것부터 뺏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기대 이상의 반응이 되돌아왔다.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일리온이 아닌 라벤느가 반응했다는 게 의외였지만, 그녀는 역시나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만약 아르티아가 사전에 알려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손에서 놓쳐 버렸을 테니까.
‘다만 한 가지 의문인 점은 아르티아가 그 사실을 먼저 털어놨다는 건데…….’
클라우스는 자신을 찾아와 라벤느의 계획을 설명하던 아르티아를 떠올렸다.
‘그걸 왜 내게 말해 주는 거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망갈 생각도 없고요.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아르티아의 표정은 꽤나 당돌해서 기억에 남았다.
‘폐하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넘겨 드렸으니, 그 대신 신전 사람들에 대한 수배령을 거둬 주시길 바랍니다.’
그녀를 데려오던 날 클라우스는 도망쳤다던 신전 사람들에게 수배령을 내렸었다. 그 수배령을 풀기 위해 라벤느를 밀고했다는 얘긴데, 그 말을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뭐, 그건 따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집무실에 다다른 클라우스는 문 앞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으로 절 기다리는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이런, 아직도 날 기다리고 있었나? 그만 포기하고 돌아갈 줄 알았더니.”
일리온은 그런 제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공작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공작을 가두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게.”
“부탁드립니다.”
“정말이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군…….”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클라우스의 표정은 어딜 봐도 곤란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포로를 탈출시키는 건 역모나 마찬가지일세. 그녀랑 만나겠다는 건 공작 역시 역모에 가담했다는 얘기밖에 더 되나?”
클라우스는 여전히 너그러운 군주의 모습을 연기하며, 말을 덧붙였다.
“물론 자네가 그럴 리 없다 믿네. 하여, 이번 일은 약혼녀에게 죄를 묻는 것으로 사건을 끝낼 생각이니 이만 돌아가게.”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얘기를 나눌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일리온을 보며, 클라우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마지못해 허락을 내렸다.
“정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군. 죄를 저질렀다 한들 한때나마 사랑했던 약혼녀일 테니,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 정도는 주겠네.”
일리온을 뒤로하고 집무실로 들어가는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일리온을 잡아들일 명분이라면 차고 넘쳤지만, 단순히 두 사람을 역모죄로 가둬 처형해 버리는 건 재미없는 일이었다.
이왕 죽일 거라면 차근차근 목을 조르는 편이 즐겁지 않은가.
사랑하는 여자가 처참하게 죽어 가는 걸 바라보며 무너져 갈지, 아니면 주인의 목에 검을 겨누는 반역을 저지를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즐거운 구경거리임은 틀림없었다.
***
일리온이 면회를 온 건 감옥에 갇힌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감옥에 갇힌 그날 찾아오리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는 늦은 방문이었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라본 모습은 조금 지친 듯 보였다. 뭐, 그동안 생각할 게 많았겠지.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게.”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병사에게 부탁했다.
“죄, 죄송하지만 이 자리에서 나눈 모든 대화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붉은색 눈이 병사를 한 번 노려보았다. 따가운 시선에 움찔하긴 했지만, 그는 제법 용감하게 버텨 냈다.
“그냥 말씀하세요. 그리 숨길 얘기도 없잖아요.”
쓸데없는 신경전을 하는 두 사람을 막아서며 말을 꺼냈다. 딱히 일리온을 상대하고 있는 병사가 안쓰러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이 불편한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
“밥은…… 잘 먹고 있나?”
고작 물어본다는 게 그거야?
“그게 궁금하셔서 오셨어요?”
“…….”
죄인은 나인데 왜 그가 입을 다물어 버리는 걸까. 뭐 그리 어려운 얘기라고 뜸을 들이는지.
“파혼 얘기를 하러 오신 거면 공작님께서 원하시는 방향대로 모두 맞춰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말씀만 하세요.”
그가 하고 싶어 할 만한 말을 먼저 꺼냈다. 그간 내가 쳤던 사고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내 죄목을 추가한다 해도 들어줄 생각이었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일리온에게 더 유리하겠지.
그러나 일리온의 대답은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달랐다.
“폐하께 그대의 사면을 요청해 볼 생각이네.”
“……!”
그의 정신 나간 소리에 나도 모르게 제정신이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공작님께서도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를 하실 때가 있군요.”
비꼬려는 의도를 전혀 숨기지 않았지만, 일리온은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집행 전까지, 어떻게든 그대를 여기서 빼낼 생각이야. 그러니 너무 걱정 말게.”
“누가 뭘 걱정한다는 거예요. 저야말로 죗값을 치를 생각입니다. 공작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럼 계속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테니.”
그렇게 말하는 일리온은 한 치도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자신의 의지를 그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듯.
대체 이 허무맹랑한 소리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불현듯 원작 속 이야기가 떠올랐다. 설마 반역이라도 일으킬 건가?
그가 아르티아를 위해 무슨 일까지 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리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위해 뭔가를 하실 생각이라면 필요 없으니 관두세요.”
다급한 마음에 서둘러 선을 그었다.
클라우스는 일리온의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마법사였고, 어지간한 병력으로 싸움을 걸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이러니저러니 할 필요 없이 당장 원작만 보아도 실패하지 않았는가?
“말했다시피,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야.”
“저랑 파혼하면 쉽게 끝날 일이잖아요. 왜 그런 귀찮은 일을 할 필요가 있나요?”
북받치는 감정 때문인지, 마음과 다르게 목소리는 자꾸만 조급해져 갔지만, 나와는 다르게 일리온은 시종일관 차분한 모습이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그런 나 때문에 그대가 괜한 짐을 짊어질 필요는 없네. 그대에겐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으니까.”
마치,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난 그대가 살아갈 미래가 좀 더 빛나길 바라네. 좀 더 웃고, 좀 더 행복하고, 그대가 바라던…….”
일리온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진짜 사랑도 찾고.”
담담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날 그렇게 상처를 줬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그걸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애써 그의 말을 무시하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반박했다.
“쓸데없지 않아. 비록, 그대가 꿈꾸는 결말에 내 자리는 없겠지만 이걸로 그대는 숨 쉬는 매 순간 내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일리온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어쩐지 눈가에 눈물이 고일 것만 같아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끝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내 미련한 판단으로 저지른 일이었고, 그 피해가 일리온에게 미치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이제 와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모든 죄를 떠안고 죽을 생각이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 시신이라도 붙잡고 평생 슬퍼하면서 살라는 거야? 정말이지, 악담도 이런 악담이…….
참았던 눈물 몇 방울이 기어이 테이블 위로 떨어지고 만다.
역시, 몇 번을 생각해도 일리온이 죽는 건 싫었다. 날 위해 죽는 건 더욱. 그러니 제발 생각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 세계에서 배운 지식, 원작에 대한 지식, 뭐든 상관없으니 생각하자.
분명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고민하던 난, 고개를 들어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공작님, 키스하고 싶어요.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