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아르티아는 황급히 에반에게 달려갔다. 그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숨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구나, 얘야.”
“그런 말씀 마세요. 지금 치료해 드릴게요, 에반 님. 그러니까 제발…….”
떨리는 손으로 에반에게 신성력을 쏟아 냈으나, 에반의 숨은 점점 사그라들어 갔다.
‘제발, 제발, 제발…….’
“아르티아…….”
에반은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 듯, 아르티아를 바라보며 꺼져 가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 말씀 마세요, 제발. 에반 님.”
그러나, 아르티아의 간절한 바람과 다르게 천천히 달싹이던 입술은 끝내 마지막 숨을 내뱉으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지키고 싶었는데, 또다시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말았다.
쏟아지는 슬픔은 이내 분노로 바뀌어,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 서렸다.
“절 잡아가시려고 오신 겁니까?”
“글쎄,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는 처음 만남과는 어쩐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흥미가 조금 떨어지는 듯.
“뭐, 딱히 가져갈 전리품도 없으니 데려가도록 할까? 신성력은 꽤 쓸 만한 듯 보이니 말이야.”
결국, 자신의 가치는 전리품 대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째서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버린 목숨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저 악마 같은 인간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을 것이다. 설사 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에반의 피로 붉게 물든 아르티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분노를 삼키며 클라우스의 말에 답했다.
“알겠습니다. 따라가지요.”
***
클라우스와의 만남을 되새기던 아르티아는,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라벤느의 앞에 섰다.
늘 의문이었다. 어째서 자신이 알던 과거와 자꾸만 어긋나는지. 어째서 항상 그 자리에 라벤느가 있었는지. 그리고 마침내 해답을 찾았다.
지금껏 라벤느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라벤느가 아니라는 사실을.
혹여 그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가진 채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닐까 했지만, 그녀는 라벤느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일까지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추수제 준비로 병사들이 황성을 비워 경비가 허술해진다든가 하는 사실을 말이다.
그건 그녀가 사형에 처한 뒤의 일이었다.
그녀 덕분에 애초의 계획과는 크게 틀어졌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도 있었다.
일리온은 그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 반역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 소중한 사람이 굳이 제가 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라벤느를 속였다. 일리온이라면 라벤느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자신은 그런 일리온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라벤느도 자신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나.
클라우스를 따라 황성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자신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사로운 감정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
축축하고 습한 길을 따라 감옥 안으로 향했다. 감옥도 이걸로 세 번째다 보니 집에라도 온 듯한 익숙한 느낌이었다. 어쩌다 이런 쓸데없는 것에 익숙해지고 말았는지.
좁은 통로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자, 그리운 얼굴들이 날 알아보고 창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라벤느?”
헛것이라도 본 듯 눈을 비비던 이들은 곧 내가 진짜 라벤느라는 걸 알아채고 눈을 치켜뜨며 노려보았다.
“이게 누구야? 공작 부인 아니신가?”
“우릴 여기 처넣더니, 본인도 잡혀 들어온 모양이지? 꼴 좋다!”
내 처지를 비웃는 말은 오히려 귀여울 정도였다. 이후 이어지는 말들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원색적인 비난이었으니까. 참으로 격한 환영 인사였다.
내가 또, 배운 사람으로서 이런 성대한 환대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어머나, 다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저 많이 보고 싶으셨나 봐요. 이렇게 반겨 주실 줄이야?”
좀 더 잘 보이도록 사슬에 묶인 손을 끌어 올려 흔들었다.
“앞으로 여러분을 못 보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하게 되었네요.”
그리고 내 감사 인사는 이내 더욱 격한 반응으로 되돌아왔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넣은 줄 알겠네. 나야말로 네놈들의 사기에 속아 넘어간 선량한 피해자라고!
사기를 칠 거면 좀 제대로 칠 것이지. 하나같이 나사가 빠져서는……. 덕분에 내가 아직 파혼도 못 하고 여기 있는 거 아니야?
뭐, 지금 와서 그들을 탓해 봐야 뭐 하겠는가. 이렇게 서로 으르렁대는 것도 이게 마지막일 텐데…….
“어차피 우리 모두 한낱 장미꽃이 될 운명 아니겠어요? 그러니, 남은 시간이라도 사이좋게 지내죠?”
안타깝게도 내 친절한 인사에도 불구하고 날 향한 욕설은 끊일 줄 몰랐다. 슬슬 귀가 따가워질 무렵, 앞서 걷던 병사가 내 행동을 제지했다.
“이제 그만,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따라오십시오.”
감옥의 분위기가 과열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뭐, 더 이상 나눌 이야기도 없기에 난 어깨를 으쓱하며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죄인인데 말 놓으세요.”
“그, 그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백작 영애였던 사람을 손바닥 뒤집듯 하대하는 게 마음에 걸리기라도 하는 걸까.
“어차피 열흘 뒤에 죽을 사람이잖아요. 잘 보여서 뭐 하게요.”
반쯤 체념한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순순히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바닥과 지푸라기 더미, 그리고 창 하나 없이 어두운 감옥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었다.
우연이 세 번 겹치면 운명이라던데 이쯤 되면 정말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자리가 내 운명이라고 말이다.
가만히 앉아 딱히 할 일도 없기에, 멍하니 아르티아가 한 말을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넘겨 온 위화감들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다.
이상하리만치 당당하게 연회장에 들어오는 모습도, 지나치게 날 경계하던 모습도.
그러고 보니, 학술제에서 일리온이 다쳤을 때도 알 수 없는 소리를 했었지. 왜 놓쳤을까.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게 다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하긴, 빙의자도 있는데 회귀자라고 없을까.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 어차피 곧 죽을 건데 상관없나.
“라벤느 아가씨.”
아르티아의 생각으로 머리가 아픈 와중에 누군가 조용히 날 불렀다. 벽 건너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세르지오?”
“절 기억하세요?”
그렇게 되묻는 목소리는 조금 들뜬 듯 보였다.
“그야, 뭐…….”
어떻게 내가 널 잊을 수 있겠니.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밤마다 이불을 차며 후회하는걸. 너만 안 만났어도 수명이 1개월은 늘었을 거라고.
“그런데 여긴 왜 들어오셨어요?”
“뭐, 어쩌다 보니.”
귀찮은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자, 그는 내 대답을 오해하고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실수를 하셨길래……. 설마, 공작님을 독살하려 했다던가!”
세르지오, 넌 여전히 눈치가 없고 약간 멍청한 구석이 있구나. 오랜만이었지만 여전한 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가씨를 다시 만나니 반갑긴 하네요. 사실, 다들 벼르고 있었거든요.”
“뭘요?”
왠지 예상이 가는 대답이었지만 달리 할 말도 없기에 그냥 물어보았다.
“살아 나간다면 가장 먼저 아가씨를 죽이러 갈 거라고요.”
“하하…….”
날 죽이고 싶은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추수제가 시작하면, 누가 날 죽일지 제비뽑기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
일리온은 멍하니 서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안타깝게도 아까부터 같은 곳을 맴돌고 있었다.
“일이 안 되는군…….”
우연히 알게 된 출생의 비밀과 쉽게 풀리지 않는 과거의 진실만으로도 머리가 아팠지만, 그 못지않게 앞으로의 일 역시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수많은 잡념이 머릿속에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빽빽이 늘어선 글자들이 눈에 들어올 리 있나.
그렇게 연거푸 한숨만 쉬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세바스찬이 들어왔다.
“주, 주인님!”
“무슨 일이야? 노크도 없이.”
일리온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들어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아, 아가씨께서…….”
세바스찬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얘기를 꺼냈다. 이제 막 운을 뗐을 뿐인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또 무슨 일인데.”
“……잡히셨답니다.”
앞뒤 다 자른 말이었지만, 대충 짐작이 가는 듯했다. 파혼을 요구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를 못 참고…….
일리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끝으로 누르며 물었다.
“잡혀? 누구한테?”
기껏 해 봐야 수도의 경비대겠거니 생각했는데 세바스찬의 입에서는 예상치도 못한 장소가 튀어나왔다.
“화, 황성에요.”
“황성?”
“포로를 탈출시키려다가 잡히셨다고…… 합니다.”
“…….”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머리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비단 낯선 단어의 조합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일리온은 이마를 문지르던 손을 내려놓고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방금 황성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그가 내민 건 황제의 직인이 찍힌 서신이었다. 종이를 펼쳐 보니 커다란 종이가 초라할 정도로 문장은 단 두 줄뿐이었다.
[라벤느 리슈펠트를 역모죄로 황성 제1 감옥에 가둠. 형의 집행일은 9월 10일.]
“9월 10일이라는 건…….”
“장미 연회를 말하는 거겠지.”
세바스찬의 물음에 일리온이 답했다.
그 행사에 딱히 이름이 있는 건 아니었다. 사흘간 진행되는 추수제의 수많은 행사들 중 마지막 날 진행되는 것으로, 장미 연회라는 건 귀족들끼리 편하게 부르기 위해 지어준 이름이었다.
행사가 끝나면 꼭 꽃이 핀 것 같다며 즐거워하던 황제를 보며.
참으로 악취미였지만, 어차피 죽을 죄수들이었기에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리온은 여전히 현실을 믿기 힘든지, 착잡한 표정으로 서신을 바라보았다.
포로라는 건 성녀를 말하는 것일 테다. 대체 왜 그녀를 탈출시키려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라벤느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싸매던 일리온의 눈에 소매 사이로 팔목까지 번진 반점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라벤느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나서부터 아르티아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었다. 한동안은 집요하게 아르티아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최근엔 방에 갇혀 밖으로 못 나오고 있다던데…….
일리온은 그간의 라벤느의 행적을 떠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세바스찬에게 마차를 준비해 달라 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