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이오니아 제국의 황제는 여러 의미로 유명했다. 특히나 천사처럼 아름다운 외모와는 다른 그의 잔인한 성품이.
클라우스의 실체를 눈앞에서 확인한 아르티아는 그 소문이 어떤 의미였는지 깨달았다.
자신들을 생각하는 듯 던져 준 선택지는 어느 쪽을 고르더라도 서로에게 상처만 남을 뿐이었다.
그리고 본인은 한발 떨어져 그 모습을 즐기고 있다니.
아르티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원하면 따라가 주면 될 것 아닌가.
“제가…….”
“제국의 태양이시여, 부디 이 늙은이의 목숨으로 안 되겠습니까? 부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자신의 입을 막으려는 듯, 에반이 한발 빨리 말을 꺼냈다. 그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 애원했다.
그러나, 에반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클라우스는 덤덤한 목소리로 숫자를 셌다.
“그럼 이제 9명 남았군.”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던 아르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옆에 있던 제인이 손을 끌어당기며 그녀를 다시 앉혔다.
그녀는 아르티아를 보며 고개를 두어 번 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인.”
“제 목숨도 가져가십시오.”
그러나 막을 새도 없이 제인은 손을 들어 희생을 자청했다. 그걸 시작으로 성당 곳곳에 있던 사제들이 손을 들고 일어났다.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 사제들은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르티아의 얼굴엔 슬픔과 함께 깊은 절망감이 스며들었다.
상황을 관망하던 클라우스는 어쩐지 맘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조소를 터트렸다.
맘에 들지 않을 만도 했다. 그가 원하던 그림은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모습이었을 테니.
“참으로 사랑받는 성녀님이군.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클라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검이 에반의 목을 치려던 찰나.
“제가 가겠습니다.”
“……아르티아!”
옆에 있던 제인이 말렸다. 아르티아는 그런 제인에게 눈물범벅이 된 아이를 안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애 고아인 자신을 갓난아이 때부터 키워 준 가족들이었다. 그런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혼자 남은 삶을 살아갈 바에야 차라리 황제의 손에 죽는 게 나았다.
그로 인해 모두가 살 수 있다면,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대신 희생하고자 했던 사제들도 같은 마음이었겠지.
“부디 절 데려가시지요.”
“서로 데려가라 난리니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난감하군.”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는 분명 웃고 있었다. 이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으면서, 사람 목숨을 저울질하며 어느 쪽이 나을지 가늠하는 그의 표정은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르티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살생은 피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르티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군. 맞는 말이야. 그럼 성녀님의 의견을 따라 쓸데없는 살생은 피하도록 할까?”
가까스로 그녀의 입에선 나직이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선택에 후회는 없다 생각하며, 주변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뒤로하고 그녀는 클라우스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처음부터 클라우스가 내민 선택지 그 어디에도 모두를 살려 주겠다는 조건은 없었다는걸.
그날 클라우스는 뒤따라오는 병사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신전에 남은 인간은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말고 모두 죽이라고.
그 사실을 깨달은 건 학술제가 있고 며칠 뒤였다.
모든 행동이 제한된 삶이었지만 그녀에게 단 한 가지 허락된 게 있었다.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
유일하게 삶을 버틸 수 있는 이유이자 원동력이었던 편지는 수 권의 책을 엮을 정도로 많았지만, 답장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그녀는 클라우스에게 신전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다.
“혹시, 신전에 편지가 도착하지 않은 건가 걱정돼서요.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 그러고 보니……. 말해 주는 걸 깜박했군.”
그렇게 운을 띄운 클라우스는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어쩐지 소름이 돋는 기분에, 아르티아는 팔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되물었다.
“혹시 편지를 깜박하셨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대의 가족들은 이미 다 죽었다는 얘기야.”
생면부지인 타인의 죽음을 얘기한다 해도 그토록 무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여기 데려오는 조건으로 살려 주기로 했던 사람들 아닌가?
“……그, 그럴 리가. 그때 분명 살려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글쎄. 그런 약속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눈물과 함께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여기 있더라도 그들은 클라우스의 그늘에서 자유로우리라. 그렇게 여기며 지옥 같은 하루를 버텨 왔는데, 이젠 그런 자신을 보는 것도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털어놓는 걸 보면.
끝없는 절망에 허우적대던 아르티아는 마침내 탈출을 결심했다. 더 이상 잡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탈출마저도 클라우스가 파 놓은 함정일 뿐이었다.
수없이 그를 원망하고 절망에 빠지면서도 그가 주는 한 가닥 희망을 놓지 못해 버텼는데, 그는 또 한 번 자신을 끝없는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일리온마저 사라지던 날, 아르티아는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클라우스의 눈앞에서, 그를 저주하며.
그러나,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은 벨리온이 이오니아 제국에 항복을 선언했던 날로 돌아와 있었다.
처음엔 꿈이라 생각했다. 너무 그리워, 꿈을 꾸는 거라고.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꿈이 아니었다. 멀리서 먼지구름을 날리며 다가오는 병사들은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 끔찍했던 과거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르티아는 서둘러 신전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클라우스는 대화를 통해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 따위 벌레만도 못하게 여겼으니까.
사제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심각한 아르티아의 표정에 하나둘 대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로 어린아이가 다가오더니 아르티아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르티아 언니, 리키가 보이지 않아.”
“리키?”
“응. 아까 같이 숨바꼭질했는데 아직 숨어 있나 봐.”
왜 하필 이럴 때. 아이를 원망할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아르티아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린아이를 제인에게 안겨 주며 먼저 달아나라 지시하고 다시 신전으로 돌아와 모든 방을 빠짐없이 살폈다.
“리키! 리키!”
“……아르티아 누나?”
온 신전을 뛰어다닌 뒤, 간신히 작은 방 안쪽에 있는 리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황급히 리키를 데리고 달아나려는데, 철컹거리는 쇠갑옷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거친 발걸음은 또 한 번 성당 문을 열고 들이닥쳤고, 아르티아는 리키를 안고 작은 방 안쪽으로 들어가 숨었다.
“신전이라 하지 않았나? 사람이 하나도 없군.”
익숙하고 나른한 목소리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상하군. 성녀라면 여기 있을 거라던데. 도망이라도 갔나?”
묵직한 쇳소리가 신전 바닥을 울렸다. 코앞으로 지나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아르티아는 리키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대로 흥미를 잃고 돌아가면 좋으련만…….
“사람이 없는지 샅샅이 수색해 봐.”
그러나 클라우스는 제 맘처럼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의 지시에 막 병사들이 움직이려는데,
“여긴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에반이 그를 막아섰다.
다른 사람들과 도망친 거 아니었나? 갑작스러운 에반의 등장에 당황한 건 아르티아도 마찬가지였다.
“아, 여기 사제인가? 성녀가 있다길래 보러 왔는데, 여긴 원래 이리 사람이 없나 보지?”
클라우스는 대수롭지 않게 에반을 보며 물었다.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신전을 떠났습니다.”
“빠르기도 하군. 자네는?”
“늙은이가 함께 가 봤자 짐만 될 것 같아 전 여기 남았습니다.”
에반의 말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자네를 제외하고 모두 달아났다 이거군. 그런데 말이야 아까부터 저쪽에서 묘하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는 고개를 돌려 작은 방을 바라보았다.
푸른색 눈은 마치 벽을 꿰뚫어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아르티아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글쎄요. 쥐가 돌아다니기라도 하는 모양이죠.”
“그럼 쥐인지 사람인지 확인해 볼까?”
그렇게 말하며 클라우스는 검을 빼 들었다.
그러나 검 끝이 향한 건 작은 방이 아닌 에반이었다.
그는 아르티아에게 스스로 나오길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아무도 없습니다. 저 하나뿐입니다.”
“그건 내가 알아볼 테니 그대는 조용히 하게.”
“못 믿으시겠으면 이 늙은이를 죽이시지요.”
아르티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반은 자신을 감싸기 위해 클라우스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일부러 클라우스의 심기를 거스르며, 자신에게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또 한 번 선택의 갈림길에 서고 말았다. 아무도 구할 수 없었던 과거. 그리고 또 한 번 에반을 눈앞에서 잃게 될 현실.
드디어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현실에는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르티아는 리키에게 작게 속삭였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나오면 안 돼. 알았지?”
제 말에 리키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르티아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치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클라우스가 반겨 주었다.
“역시 사람이 있었군.”
“이렇게 나왔으니, 부디 검을 거둬 주십시오.”
“그래야지. 그전에…….”
그렇게 대답하는 클라우스는 들어 올린 검을 무심하게 그었다. 검의 궤적을 따라 선명하게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에, 에반 님!”
“거짓말한 죗값은 받아야지 않겠나?”
그런 인간이라는 걸 왜 몰랐겠는가. 알면서도 아르티아는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숨어 있다 해도 어차피 발각될 거라면, 그전에 에반을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르티아는 자신이 얼마나 어설픈 선택을 했는지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협상이나 거래를 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인간의 절망을 구경하는 것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