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이런. 아르티아가 아니라 미안하군.”
클라우스…….
금빛 머리카락은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물들어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고, 푸른빛 눈동자에는 어쩐지 즐거움마저 서려 있는 듯 보였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을 떼지 못하는데, 그런 내 모습이 볼만했는지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왜 내가 여기 있느냐는 듯한 표정이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잠시 자리를 옆으로 비켰다. 그 뒤에는 병사들과 함께 아르티아가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은 받아들이기조차 버거웠지만, 당장 해야 할 일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도망치는 것.
클라우스를 피해, 수풀 사이에 숨겨 둔 가방을 찾기 위해 서둘러 몸을 돌렸다.
“윽…….”
그러나, 온몸이 밧줄에 묶인 것마냥 말을 듣지 않았다. 클라우스가 무슨 짓을 한 모양이었다.
“하여튼 방심할 수 없군. 이걸 찾는 건가?”
그렇게 묻는 클라우스의 손에는 내가 들고 온 가방이 쥐어져 있었다.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네. 몰랐더라면, 폭죽 소리에 속아 이쪽에 설치된 폭탄은 눈치채지 못했을 테니까.”
말하는 뉘앙스가 마치 작전을 누군가 알려 줬다는 듯한…….
난 뒤쪽에 서 있는 아르티아를 바라보았다.
날 바라보는 그녀는 당황한 얼굴도, 두려워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고 무미건조한 눈으로 붙잡힌 날 응시할 뿐이었다.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알현실. 멍하니 바닥에 깔린 카펫의 무늬를 바라보았다.
수놓아진 무늬는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무늬들처럼, 아르티아의 목적 역시 쉽게 가늠하기 힘들었다.
대체 왜 날 배신한 걸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나? 아무리 원작 속 이야기를 더듬어 올라가도 그녀가 날 황제에게 밀고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에서 엉켜 갔다.
“포로를 탈출시키려 했다라……. 아무리 봐줘도 사형이겠군.”
“…….”
원작 속 라벤느는 끝내 사형을 당해 죽었다. 그리고 나 역시 돌고 돌아서 결국 원작의 결말에 도달한 모양이다.
사실 소설의 강제력 따위 믿지 않았는데, 이쯤 되니 그런 게 정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동안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던 걸까?
“할 말은 없나?”
“없습니다.”
있을 리 없었다. 그가 한 말이 맞으니까. 포로를 탈출시키려 했고, 실패했다. 그게 전부였다.
“생각보다 포기가 빠르군. 좀 더 발버둥 칠 줄 알았는데.”
“…….”
한동안 대답이 없자 클라우스는 재미없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일에 셀레스타인 공작도 관련이 있는 건가?”
“없습니다.”
일리온 얘기에 난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공작님은 전혀 상관없습니다. 이 일은 모두 저 혼자 벌인 일입니다.”
날 가만히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래. 원래라면 즉시 사형에 처해야 맞겠지만, 내 그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으니 한 번 더 기회를 줄까 하네.”
도움이라고? 네가?
말하는 것만 들으면 참으로 인자하기 그지없는 황제였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즐거움으로 희번덕였다.
“마침, 황후 자리가 비어 있는데 말이지, 어떤가?”
주변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움찔하며 그를 흘끔 바라보다 서둘러 자세를 고쳐 세웠다.
“……어떻다니요?”
“지난번 그 제안, 아직 유효하다는 얘기네.”
설마 연회 때 내게 했던 말을 말하는 건가?
그때도 믿지 않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지금은 더더욱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폐하께서 절 그리 총애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날 속일 만큼 대담한 인간은 흔치 않지. 그것도 두 번이나. 그런 의미에서 난 그대가 아주 맘에 들거든.”
정말 나를 맘에 들어 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저 빌어먹을 미소에 감추고 있는 속내를 왜 모르겠는가.
나와, 일리온, 그리고 아르티아 셋을 한 번에 엿 먹일 생각인 거겠지. 그게 네가 좋아하는 방식이잖아?
“그런데 어쩌죠. 폐하께서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내 대답에 병사들은 또 한 번 숨을 들이켰다. 그쪽에서 보기에도 내가 미친 여자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클라우스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던져 주는 먹이를 덥석 물었다간, 그 안에 들어 있는 독약을 삼키게 될 테니까.
그러나, 그걸 알고 있다 해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지금 내 행동은 좋게 말해 허세였고 나쁘게 말하면 발악이었다.
클라우스 역시 그 사실을 아는 듯 내 말을 하찮은 헛소리쯤으로 취급하였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안 그래도 마침 추수제 행사에 넣을 죄수가 부족했는데, 그대가 참가해 빛내 주면 좋겠군.”
그 말이 뭘 뜻하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을 보게 되겠군.
율리아라던가, 세르지오라던가. 차라리 목을 쳐 달라는 말이 혀끝에 맴돌다 흩어졌다.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던 클라우스는, 한 가지 잊은 듯 내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참, 공작에게는 내 미리 연락하겠네. 부디 그대의 활약을 보러 오라고 말이지.”
클라우스, 너는 정말이지 뜬금없이 강아지를 찾게 만드는 주둥이를 가졌구나.
내가 아무리 일리온에게 시달렸다지만 그는 여전히 일리온 발톱의 때만도 못한 놈이었다.
알현실을 나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병사들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는데, 앞서 걷던 병사가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성녀님?”
병사의 목소리에 난 고개를 들어 길을 막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르티아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무어라 정의 내리기 힘든 감정이 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난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성녀님께선 여길, 나가고 싶으신 거 아니셨나요?”
이내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메마른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 없었습니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그럼, 어째서…….”
어째서 내 제안을 받은 건데? 어째서 날 클라우스에 넘긴 거지? 도대체 왜?
그녀를 붙잡고 묻고 싶은 질문들이 많았지만, 머릿속은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날 이해한다는 듯 아르티아가 중얼거렸다.
“머리가 복잡하신 모양이군요.”
“……이럴 거라면 차라리 거절하셨어야죠.”
“그럴 순 없었습니다.”
“대체 왜……?”
“그건, 당신이 내가 알던 라벤느가 아닌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이 알고 있던 아르티아가 아니기 때문이죠.”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던 아르티아는 그 말을 끝으로 내 옆을 지나쳤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죠?”
그녀를 붙잡기 위해 뒤를 돌았으나, 병사의 제지가 좀 더 빨랐다.
그는 내 손을 포박한 쇠사슬을 쥐어 당겼고, 내 몸은 그대로 앞으로 질질 끌려갔다.
양손에 감긴 수갑이 아프게 팔을 조였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르티아가 알고 있던 라벤느가 아니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인 건데?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라벤느를 보며, 아르티아는 클라우스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클라우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벨리온을 쳐들어오던 날, 벨리온의 왕은 변변찮은 반항도 못 한 채 항복을 선언했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그런 별 볼 일 없는 항복이 클라우스의 성에 찰 리가 없었다. 그가 원한 건 전쟁이었지, 항복이 아니었으니까.
심기 불편한 그가 벨리온의 왕을 어떻게 농락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곧이어 병사들을 이끌고 신전을 찾아왔으니까.
거칠게 신전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유명한 성녀님께서 계시다던데.”
조금 나른해 보이는 듯한 목소리와 환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은 일순 천사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와 대동한 병사들은 사뭇 위협적이었다.
난데없는 황제의 등장에 겁에 질린 사제들 사이로, 나이가 지긋한 사제 하나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신전의 책임자인 에반이었다.
“제국의 태양께서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뭐, 여기까지 온 김에 관광이라도 할까 해서 말이네.”
그는 조금 전 항복을 선언한 나라의 백성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에 감히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정말로 관광이라도 하러 온 사람처럼 신전을 주욱 둘러보던 클라우스의 눈동자가 한곳에 멈춰 섰다. 백금발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 소문으로 들었던 성녀였다.
연신 장난스럽게 휘어지던 눈동자가 아르티아를 보더니 차갑게 가라앉았다.
겁에 질린 아이를 달래던 아르티아는 클라우스의 눈을 피해 몸을 살짝 돌렸다. 혹여 아이가 겁먹고 울지는 않을까.
“그렇군. 소문처럼 아름다우신 분이셨군.”
그리 듣기 좋은 칭찬은 아니었다. 그저 철창에 갇힌 동물을 구경하며 내뱉는 감탄사처럼 들렸으니까.
어느 쪽이든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빨리 돌아가 주기만 한다면 구경거리 취급쯤이야.
“뭐, 성녀도 봤으니 그만 돌아갈까?”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철수를 명령했다. 제 바람이 통하기라도 한 걸까?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그는 뭔가 잊은 듯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참, 기념품을 빠뜨릴 뻔했군.”
잔인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아르티아를 향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클라우스의 의중을 묻던 에반은 그가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었다.
“제, 제국의 태양이시여. 그 아이는 저희의 가족입니다. 그러니 부디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건 좀 곤란한 부탁이군.”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는 대단한 고민이라도 하는 양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러더니 에반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성녀님을 데려가지 않는 대신 그대들의 목숨을 가져가도록 하지.”
그의 말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제들은 일순 숨을 들이켰다.
“뭐, 소중한 가족이라 하니, 목숨 정도는 내놓을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는 무릎을 꿇은 사제의 등을 깔고 앉았다.
왜소하고 작은 등이 그대로 짓눌리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에반의 굴욕적인 모습에 보다 못한 사제들이 반발하려 했으나, 주변에 깔린 병사들의 위협에 누구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보란 듯 다리를 꼰 클라우스는 비릿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선착순으로 10명만 받아 볼까? 누가 가장 먼저 성녀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지 궁금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