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아침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았지만, 일리온의 시선은 자리에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듯 문을 향하고 있었다.
파혼을 요구하는 라벤느의 말에 밤을 새워 고민했지만, 결국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답을 내리고 싶지 않은 거겠지.
막연히 생각하고는 있었다. 언젠가 그녀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걸.
다만, 흘러가는 시간을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본 행복은 제 손으로 먼저 놓아 버리기엔 지나치게 달콤하고, 중독적이었으니까.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무심한 듯 자신을 신경 써 주는 말들이 좋았다. 풀이 죽어 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거리는 미소가 좋았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아 주던 모습은 아직도 종종 입가에 미소를 그리게 했다.
그래서 그 모든 게 다 거짓말이어도 좋았다. 차라리 그 달콤한 거짓말에 잠겨 죽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꿈에선 언젠가 깨기 마련이고, 기다리는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다.
창밖 너머로 마차 소리가 지나가는 걸 들으며, 일리온은 비로소 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동시에 웬만하면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배고프다.”
터벅거리는 발소리, 덜컹거리는 의자 소리, 시끄럽게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까지.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을 거스르는 것투성이였다.
심란한 아침이 그녀 덕분에 더욱 심란해지고 말았다.
“라벤느는 아직 안 돌아왔느냐?”
스피넬은 그렇게 물으며 빵을 입에 넣었다. 자신의 고민을 날려 버릴 정도로 무신경한 목소리에 일리온은 마지못해 대꾸했다.
“돌아왔어. 그리고 조금 전에 다시 외출했고.”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녀의 말에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맞는 말이었다. 요즘 들어 라벤느의 얼굴을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뭐, 이젠 그 이유를 좀 알 것도 같지만.
일리온은 빵 부스러기를 흘리며 먹는 스피넬을 바라보다 어렵사리 운을 뗐다.
“지난번에, 내가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얘기 말인데…….”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스피넬과 대화하기 싫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먼저 자존심 굽히고 들어가도 좋은 얘기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넌 이게 저주가 아니라고 했었지.”
“그래.”
“그럼 뭐지?”
“어차피 죽을 놈한테 내가 왜 그걸 설명해 줘? 다시 말하지만, 난 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도와줄 생각도 없어.”
그렇게 말하는 스피넬은 일리온의 예상대로였다.
“……혹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없어. 이미 그럴 수 있는 시기를 놓쳤거든.”
“놓쳐?”
“그래. 뭐 한 10년만 더 빨랐어도 또 모르지. 살 수 있었을지도.”
스피넬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란 후라이를 포크로 찍었다. 그리곤 튀어나오는 노른자를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렇군. 너무 늦게 알았군.”
10년 전이라.
고작 반년 전만 해도 일리온은 삶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삶을 이어 가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그저, 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갈 뿐이었다.
가문을 위해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오히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이야말로, 삶의 저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제게 걸린 저주가 오히려 자신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건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못다 한 삶에 미련이 생기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 살 거처는 정했나?”
“고민 중이다. 라벤느가 아직은 떠날 마음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
“그럼 서둘러 정하는 편이 좋겠군. 이제 나갈 마음이 생긴 듯하니까.”
스피넬은 비스듬히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난도질한 계란이 들려 있었다.
“오늘따라 뭔가 말투가 다르구나. 평소에는 혼자 나가라며 으르렁거리던 녀석이. 헤어질 마음이라도 들었느냐?”
“……바라던 일이지 않나?”
가만히 얘기를 듣던 스피넬은 포크를 놓고 일어섰다.
“설마 네놈이 먼저 나가라고 한 건 아니겠지.”
그의 말을 오해한 모양인지, 붉은색 눈동자가 살벌하게 일리온을 노려보았다.
“라벤느가 먼저 나가겠다 했다.”
일리온의 해명에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뾰족하던 눈매가 동그랗게 변했다.
“라벤느가 그랬다고? 이상하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무슨 할 일?”
“글쎄다. 다 같이 행복할 방법……을 찾고 있다던가.”
며칠 전의 대화를 떠올리며 스피넬이 중얼거렸다.
다 같이 행복할 방법이라.
스피넬의 말을 되뇌며 일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기나긴 고민의 마침표가 찍힌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을 찾은 모양이지.”
그녀가 그리는 결말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 이상 제 이기심을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비록 제 인생은 동화 같지 않을지라도, 라벤느가 그리는 행복은 그녀가 좋아하는 소설과 같기를 바라니까.
***
아르티아와 약속한 당일. 모두가 잠든 새벽을 틈타, 아티팩트를 이용해 황성 주변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일리온은 외출 금지를 풀어 주면 내가 몰래 밖에 안 나가리라 여겼겠지만 잠잘 때까지 사람을 붙여 놓지 않은 건 그의 실수였다.
뭐, 나중에 돌아가면 잔소리를 듣겠지만…….
아, 이제 잔소리 들을 필요 없나?
나도 모르게 시작된 일리온 생각에, 자괴감이 땅을 파고 내핵을 뚫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런 생각 할 때야? 지금부터 아르티아를 탈출시키러 갈 거잖아.”
스스로를 다그치며 쓸데없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볼을 두어 번 때렸다.
그간 살면서 겪기 힘든 온갖 일들을 겪었지만, 역시나 새로운 사고를 치는 것만큼 두근거리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실패하면 뒤가 없는 낭떠러지라는 의미에서 더욱.
서늘한 새벽 공기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식혀 주길 바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챙겨 왔던 아티팩트를 성벽에 설치했다. 타이머가 달린 폭발용 아티팩트였다. 이 정도면 성벽에 작은 구멍을 뚫는 데는 충분할 것이다.
지금 시각은 새벽 4시였고, 해가 뜨기까지는 약 2시간가량 남아 있었다.
그사이 무사히 아르티아와 합류해야만 했다.
촉박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잡으려, 서둘러 입구로 향했다. 마침 식료품상 마차가 그 앞에 대기 중이었다.
조용히 마차 뒤에 붙어 몰래 따라 들어가려는데, 눈치 좋은 경비병 하나가 날 붙잡았다.
“잠깐, 하녀가 이 시간에 어딜 다녀오는 길이지?”
이왕 들여보내 줄 거 나까지 들여보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여기도 쓸데없이 성실한 사람들투성이였다. 모름지기 일이란 적당히, 대충, 설렁설렁해야 하는 법이거늘.
“심부름을 다녀왔습니다.”
“심부름? 이 새벽에?”
“네.”
“무슨 일로?”
“그게……. 드미트리 님께서 하녀장님께 드릴 물건을 가져오라 시키셨거든요. 로라 님 몰래 갔다 오느라 좀 늦었어요.”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 망설이며 핑계를 대자, 병사들은 이미 아는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양반 아직도 로라한테 빠져 사는구먼.”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포기하실 줄도 알아야지. 이 새벽에 하녀를 시켜 뭘 하시려는 건지.”
“누가 아니래. 괜히 자네가 둘 사이에 껴서 고생이 많네.”
다행히 그들은 큰 의심 없이 날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되려 격려까지 해 주며.
“뭐, 어쩔 수 없죠. 잘되면 좋은 일 아니겠어요?”
적당히 그들의 대화에 대꾸한 뒤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마법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가 아닌지라, 자칫 잘못하면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컸다.
하필이면 외모를 바꾸는 아티팩트는 범죄의 위험이 있어 안 판다나 뭐라나.
그 덕에 아무리 어둠에 의지한다 해도, 사람을 마주치는 건 최대한 피해야 했다.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며 미카엘과 함께 왔던 창고로 향했다.
그날 이후로 아무도 창고를 방문하지 않은 모양인지, 놓아두었던 물건은 그대로였다.
상자 안에 어지러이 놓인 물건들 틈에서 눈여겨보았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미카엘과 황성을 탐방했을 당시엔 처음부터 모든 계획이 구상된 상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르티아의 방을 지키는 병사들이 가장 발목을 잡았다.
가장 큰 고민은 그들을 어떻게 아르티아의 방에서 떼어 놓을까 하는 것이었다. 될 수 있으면 최대한 먼 곳으로.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던 차에, 마침 행사에 쓰고 남았다는 폭죽이 눈에 들어왔다.
폭죽이 터지면서 나는 커다란 소리와 연기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좋았다. 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을 쉽게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황성에 들어오기 전, 성벽에 설치한 폭탄의 소음도 감춰 줄 테니 더할 나위 없었다. 행사가 중지된 게 다행일 정도였다.
주머니에 폭죽을 가득 담아 들고 가장 먼저, 아르티아의 방 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폭죽에 불을 붙여 복도 끝으로 조심히 굴렸다.
이내 펑! 하는 소음과 함께 구름 같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뭐, 뭐야! 폭발인가?”
“콜록, 콜록. 이 연기는 다 뭐야?”
내 예상대로 아르티아의 방을 지키던 병사들이 가장 먼저 소리의 근원으로 달려와 주변을 살폈다.
복도를 가득 메운 연기에 두 사람은 우왕좌왕해 댔고, 그 틈에 나는 재빨리 지름길을 내달려 아르티아의 방과 가장 먼 곳으로 향했다.
헨젤과 그레텔이 된 것처럼, 황성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폭죽을 설치했고, 설치한 폭죽들은 하나둘 시간차를 두고 터졌다.
그리고 내 바람대로 황성 경비를 서던 병사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여기저기 내달렸다.
“어디야? 이번엔 어디서 터졌어?”
“동쪽 2층인가?”
“아까 중앙동에서 터지지 않았어?”
그렇게 그들의 시선이 완전히 다른 곳에 꽂힌 사이, 난 서둘러 아르티아와 약속한 성벽으로 향했다.
어둠에 숨어 흙길을 내달려 도착해 보니, 다행히 아티팩트는 제 노릇을 해 주었다. 조그마하게 뚫린 구멍은 사람이 지나가기 충분해 보였으니까.
“아르티아는 벌써 밖으로 나갔나.”
아무도 없는 걸로 보아, 그녀는 이미 구멍을 통해 밖으로 향한 모양이었다.
그녀와 합류하기 위해 나 역시 서둘러 구멍 사이로 몸을 던졌다.
그렇게 낑낑거리며 바닥을 기어 나오는데, 눈앞에는 처음 보는 신발이 바닥을 딛고 있었다.
여자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커 보이는 게, 딱 보기에도 남자 것 같은데…….
“성녀…님?”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