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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82)화 (82/159)

82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놀란 숨을 들이켰다.

“고, 공작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일리온은 의자에 앉아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네.”

“…….”

불이라도 켜고 기다리지. 무섭게 왜 불도 안 켜고 기다리는 거야.

“마, 많이 기다리셨어요?”

“저녁에 돌아오겠다더니, 한밤중이 되어서야 나타나는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에는 내가 릴리에게 남긴 쪽지가 들려 있었다. 

“그, 그게…….”

“또 미카엘을 만나고 오는 길인가?”

“그럴리가요. 미카엘 경이라뇨.”

벌써 들켰나 싶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글쎄. 미카엘이 아니라면 무슨 수로 저택을 나갔는지 모르겠군. 내가 모르는 다른 아티팩트라도 있는 모양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넘기려 했지만, 일리온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걸어왔다. 걸어오는 모습이 어쩜 이리도 저승사자를 닮았는지. 

온통 새까만 게 갓만 씌워 주면 딱 저승사자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그는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혹여, 잘못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저택을 이 잡듯이 뒤졌네. 그런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군.”

그렇게 말하며 일리온은 주먹을 쥐었다. 손에 들린 쪽지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내 미래도 저 종이 쪼가리와 다르지 않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일리온은 살벌했다. 그의 이런 표정을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나도 모르게 땀이 차오르는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집을 나가기 전부터 이렇게 될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예상하던 것과 현실은 역시나 달랐다.

난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한 번쯤 겪을 마찰이라고 생각했다. 꼬여 버린 이야기를 풀고 그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선 우리 관계 역시 한 번 끊어 줄 필요가 있으니까.

단지, 언제가 좋을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현실은 그런 내 망설임에 채찍질이라도 하듯 날 궁지로 밀어 넣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잠깐 밖에 나갔다 왔어요. 저택에 있는 것도 따분해서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 갇혀 있을 이유가 없겠더라구요.”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하며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일리온은 그저 가만히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하루, 하루. 새장에 갇힌 새보다 못한 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버틸 수 있겠어요.”

“……그건 내가 지나쳤네. 하지만…….”

“아니요, 공작님.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그의 말을 빠르게 잘라 냈다.

버트의 보고서를 보았고, 그자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외출 금지가 길어지는 이유 역시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혹여라도 내가 또 다른 사고에 휘말릴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비록 보호가 좀 과했지만, 그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나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서 듣지 않았다. 들어 봤자 마음만 약해질 것 같아서.

“실은 더 이상 연기하는 것도 지쳤어요. 그러니, 공작님.”

흔들릴 것 같은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으며 일리온을 직시했다. 내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파혼을 요구합니다.”

할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이 몇번 달싹이다 떨어졌다. 

“어째서…….” 

그리고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를 보며, 난 보란 듯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서라니요. 공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부모님께서 좀 성화세요? 갚지도 못할 돈을 이미 받아 버렸고, 그 돈을 돌려드릴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

천천히 굳어 가는 일리온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버텼는데, 생각해 보니 공작님 옆에서 제 인생을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거 같아서요. 그러니, 굳이 말하자면 자유를 위해서? 뭐, 겸사겸사 진정한 사랑도 찾고요.”

“……그게 미카엘이라는 건가?”

“미카엘 경은 아니라니까요.”

혹시라도 괜한 불똥이 튈까 봐 빠르게 부정했다.

내 말을 믿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일리온은 여전히 일렁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파혼이라.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 텐데.”

“알고 있습니다. 위자료라면.”

“그걸로 끝날 일 같나?”

감정이 들끓는 눈이 매섭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대가 날 기만했다는 사실과 그간 내가 대신 수습해 주었던 사고들은 어떻게 감당할 생각이지?”

“…….”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반격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하며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무는데 일리온은 내 반응을 놓치지 않고 한 번 더 날 몰아붙였다.

“이제 와서 덜컥 겁이라도 나나? 아무래도 그대는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어찌 모르겠는가, 네가 하겠다면 할 인간이라는걸. 그걸 아니까 이러고 있는 거지.

그렇게 한동안 일리온의 시선을 피해 허공만 바라보는데 한풀 누그러진 음성이 머리 위로 들렸다.

“……차라리 거짓말을 하게.”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돌려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내 관심을 원해서 그랬다고…… 그렇게 말해.”

“…….”

“말하지 않았나? 날 사랑한다는 거짓말만큼은 눈감아 주겠다고. 그러니……, 제발…….”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비눗방울처럼 떨리고 있었다.

다락방에서 그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결국, 일리온은 처음부터 내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내 행동들을 모두 눈감아 주고 있었다.

정말 미련한 사람이었다. 손익은 그렇게 잘 따지는 사람이 어쩌면 그런 데서는 한없이 바보가 되는지.

원작 속의 그런 일리온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 마음이 향할 곳은 내가 아니었다.

할머니를 잃고 그 일에서 헤어 나오는 데 10년이 걸렸다. 아니, 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정말 그 기억에서 벗어난 것인지…….

그런데 일리온마저 나 때문에 죽게 된다면 그건 또 몇 년이 필요할까…….

남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던데,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더라고. 죄책감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고 무거워졌으니까.

그러니 더 후회하기 전에 각자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자. 난 여길 떠나고, 넌 아르티아의 곁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렇게, 자꾸만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다잡으며 난 좀 더 차갑게 일리온을 밀어냈다.

“아뇨. 이제 거짓말하는 것도 지쳤어요. 어차피 공작님은 안 속잖아요.”

“라벤느…….”

“그냥 공작님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파혼이 싫으시면 이대로 제가 말라 죽는 걸 구경하시면 되겠네요.”

부디 내 말이 그에게 진심으로 보일 수 있도록, 떨리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태연히 말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날 바라보았고, 나 역시 그런 일리온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다정한 그라면 차마 내가 말라 죽는 걸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 점을 이용해 일리온을 몰아세웠다.

그의 마음을 돌릴 가장 편하고 비겁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렇군. 이젠, 거짓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군.”

일리온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또 한 번 거짓말을 내뱉었다. 늘 그래 왔듯이.

일리온은 내게서 한 발 떨어지며 시선을 돌렸다.

“외출 금지는 풀어 주겠네. 대신 호위를 두 명으로 늘리지.”

“전 파혼을 요구했습니다.”

“…….”

“듣고 계시나요, 공작님?”

말이 없는 그에게, 잔인한 일인 줄 알면서도 대답을 재촉했다.

“그 건은……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게.”

그렇게 말하며 일리온은 방을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져 가는 걸 들으며, 참았던 한숨을 토해 냈다. 심장이 쉴 새 없이 뛰었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은 난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며 일리온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상처받은 얼굴이 뇌리에 박힌 듯 떠나질 않았다.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부정했던 감정 하나가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고통스럽게 심장을 움켜쥐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가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게 싫어서, 그래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해 버리면 여길 떠나고 싶지 않게 될까 봐. 나도 모르게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될까 봐…….

그랬는데 아무래도 더 이상은 안 되려나 보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눈물은 참아 보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자조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겠어…….”

좋아한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닌걸.

***

“어머, 아가씨. 괜찮으세요? 얼굴이…….”

아침 일찍 날 찾은 릴리는 내 몰골을 보고 놀라서 다가왔다.

“얼굴이 왜?”

“조, 조금 많이 부으셔서…….”

하…….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로 마주한 내 모습은 릴리가 호들갑을 떨 만큼 엉망이었다.

“저, 아가씨. 어제 혹시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한동안 말없이 거울만 들여다보던 내가 이상했는지 릴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냥. 바깥 구경.”

“혹시 나가시려거든 저에게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고 가세요. 어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내 대답에 릴리는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미안해.”

차마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약속은 못 하고 사과만 건넸다.

릴리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 분위기가 안 좋은 걸 알았는지 그냥 다물어 버렸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난 릴리를 보며 부탁했다.

“마차를 준비해 줘.”

“네? 하지만…….”

“오늘부터 외출 금지가 풀렸어. 그러니 마을에 나갈 생각이야.”

아르티아를 구하기 위해선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그러니 언제까지고 퉁퉁 부은 얼굴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가씨, 오늘은 그냥 집에 계시는 게…….”

“릴리.”

단호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날 말리려던 릴리는 내 얼굴을 흘끔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네. 준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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