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내 말이 어지간히 뻔뻔했던 모양인지, 날카롭게 올라간 눈동자가 날 한 번 살피더니 시선을 거두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당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죠. 그보다 왜 절 찾아오셨나요?”
“말씀드렸다시피 얘기를 좀 할까 해서요.”
“글쎄요, 저 같은 것과 시답잖은 수다를 떨자고 오시지는 않으셨을 테고.”
지난번의 인연으로 좀 더 내게 호의적이지는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날 경계하는 로라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날 도와줄 사람이 로라뿐인걸.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한 난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찾아온 용건을 털어놓았다.
“부탁이 있어서요.”
“저 같은 하녀에게 무슨 부탁을.”
“성녀님의 식사, 제가 가져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네?”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성녀님을 뵙고 싶은데, 방에 갇히셨다고 들었어요. 그 방에는 오직 하루 세 번, 식사를 전달하는 하녀만 들어갈 수 있다면서요. 그래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안 됩니다.”
좀 더 완곡하게 말해 줘도 될 법하건만, 아주 직설적인 거절이 돌아왔다.
“이렇게 부탁드려도 안 될까요?”
“당신의 정체도 모르는데, 그런 부탁을 들어줄 리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당신께 진 빚이 있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그래.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하녀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그녀가 그리 쉽게 내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전개는 될 수 있는 한 피하고 싶었지만…….
“그럼 이건 어떨까요.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라면요?”
“……네?”
“그냥 좀 궁금하네요. 린이라는 아이가 살아 있다는 걸 폐하께서 아시면 어떻게 될까 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로라는 단박에 내 의도를 알아차렸고,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카나리아 양, 당신…….”
“카나리아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지만, 린과 당신은 아니잖아요.”
“…….”
그러나 화를 낸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약점을 쥐고 있는 건 나였으니까. 로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인지 분을 삭이며 입을 다물었다.
협박이라는 강수를 둬서인지, 어쩐지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당신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성녀님을 뵙고자 하는 것뿐이에요.”
다시 한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설득했다. 내 말에 한참을 갈등하던 로라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쩌다 제가 당신 같은 사람과 얽히게 됐는지 모르겠군요.”
안 그래도 요즘 그런 얘기 종종 들어요. 저랑 엮여서 좋을 일이 없어서 그런가.
“알겠습니다. 부탁을 들어드리지요.”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모쪼록 비밀로 해 주세요. 혹시라도 조사를 받게 된다면 당신은 제게 협박을 받았다 하시면 됩니다.”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로라의 대답은 차가웠고 단호했다. 오히려 안심이 될 만큼.
아르티아를 탈출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건 클라우스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이번 일을 들키게 되더라도 모든 책임은 카나리아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넘겨야만 했다.
카나리아가 라벤느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 클라우스에게 심증이 있다 해도 물증이 없는 한 날 잡아들이는 건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그라도 죄 없는 귀족을 증거도 없이 함부로 죽이지는 못할 테니까.
***
로라의 도움으로 그날 저녁 아르티아의 식사는 내가 가져가기로 했다.
방에 도착하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큰 의심 없이 날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트레이를 밀어 음식을 안으로 가져갔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아르티아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성녀님?”
“…….”
“깨어 계신 거 맞죠?”
“그냥 갖고 나가세요.”
몇 번이고 말을 걸자, 그녀는 귀찮다는 듯 내게 대꾸했다. 목소리는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혹시 음식이 입맛에 안 맞으시나요?”
“이젠 제 말도 무시하는 겁니까. 갖고 나가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쓰러지세요. 조금이라도 드시는 게 어떠세요?”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내 쪽을 돌아보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원망스럽게 날 노려보았다.
“왜요? 폐하께서 억지로라도 먹여 목숨이라도 붙여 놓으라 하던가요?”
그녀의 가시 돋친 말투는 원작의 후반부를 떠올리게 했다. 꺾여 버린 희망에 모든 걸 놔 버린 모습.
그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저녁을 드시기 싫다면 저와 대화를 나누시는 건 어떤가요.”
“……대화?”
아르티아는 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저예요. 라벤느 리슈펠트입니다.”
“……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지금 이 모습은 마법의 도움을 좀 받았죠.”
“당신이 왜…….”
“왜 여기 있냐구요? 그야 성녀님을 도와드리려고 왔죠.”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군요. 당신이 리슈펠트 양이라니.”
“그럼 우리 둘만 아는 얘기를 할까요? 지난번에 드린 성물 얘기라던가.”
내 말에 아르티아의 표정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그리고는 표정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앉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저와 하실 얘기가 뭔가요.”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어떤……?”
“여기서 나가요.”
아르티아는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혹여 밖에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이 들을까, 목소리를 좀 더 낮추었다.
“황성을 탈출하자는 얘기예요.”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렸다.
“어떻게, 아니, 왜 당신이?”
당황한 나머지 정리되지 못한 생각이 그대로 소리가 되어 튀어나왔다.
본인도 그걸 자각했는지 잠시 놀란 마음을 진정하며 내게 차분히 물었다.
“왜 당신이 제게 그런 제안을 하는 거죠?”
“성녀님을 돕고 싶어서요.”
“절 돕고 싶다니, 혹시 약혼자 때문인가요?”
날 경계하던 그녀는 이번에도 순순히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물론 곧이곧대로 믿을 거란 생각도 안 했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렇죠. 공작님께는 성녀님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성녀님도 이곳에 갇혀 있기 싫으시잖아요. 이 정도면 이해관계가 맞지 않나 싶은데.”
이유가 설명이 된 걸까? 황금색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으며 날 살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던 아르티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보시다시피 제 방은 24시간 병사들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뚫고 나갈 수 있죠?”
“제 제안을 받아 주시는 건가요?”
“그 전에, 영애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빠르게 오늘 황성을 돌며 구상했던 작전을 설명했다.
“곧 추수제 준비로 황성엔 최소한의 경비병들만 남게 될 거예요. 인력이 부족한 만큼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지면 시선이 그쪽으로 쏠릴 겁니다. 그사이 성녀님께서는 이걸로 갈아입고 방을 빠져나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트레이 안에 숨겨 왔던 옷을 꺼내 건넸다.
“하녀복……?”
“네. 새벽이고 사람이 적으니 하녀로 변장하면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전 서쪽 성벽 쪽에서 기다리도록 할게요.”
건네받은 옷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티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죠?”
“네?”
“며칠 뒤, 추수제 준비로 경비병들이 줄어들 거란 거요. 어떻게……?”
아직 내 말을 못 믿는 걸까, 아니면 여전히 날 경계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이럴 땐 나보다 더 신뢰가 높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편이 좋았다.
“공작님께서 하시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럼혹시 공작님께서도 영애가 여기 온 걸 알고 계시나요?”
하필이면 정곡을 찌르네. 거짓말로라도 알고 있다고 하는 편이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아르티아의 눈치가 좀 더 빨랐다.
“표정을 보니 모르시나 보군요. 하긴, 공작님께서 아셨다면 당신을 혼자 여기 보낼 일은 없겠죠.”
혹시라도 내 제안을 거절할까 봐 난 서둘러 그녀를 붙잡았다.
“성녀님도 여길 벗어나고 싶으시잖아요. 그러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내 간절함이 통한 걸까? 말없이 날 바라보던 아르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계획을 따를게요.”
***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미카엘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미카엘은 서둘러 널브러진 책을 치우며 날 맞이했다.
단정한 그의 외모와는 다르게 집무실은 조금 엉망이었다. 책 몇 권 치운 걸로는 티도 안 날 만큼.
“와, 미카엘 경. 개인 집무실도 있었어요?”
지저분하긴 했지만, 꽤나 큰 방인 건 사실이었다. 나이에 비해 높은 직책에 감탄하자 미카엘은 조금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이래 봬도 드미트리 님 다음으로 직책이 높답니다. 물론 아가씨와 공작님께선 잘 모르시겠지만요.”
말에 뼈가 있네. 그동안 시도 때도 없이 부려 먹은 게 많이 억울했던 모양이다.
“그럴 리가요. 물론 잘 알고 있죠.”
종일 그를 귀찮게 한 게 미안해 입에 발린 소릴 늘어놓는데, 그가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그보다 괜찮으시겠어요?”
“네? 뭐가요?”
“이제 돌아가셔야 하는데…… 저택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지는 않았을지…….”
그렇게 말하는 미카엘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실은 나도 그게 걱정되긴 해. 아직 핑계를 못 찾았거든.
혹시 몰라 릴리에게 살짝 메모를 남겨 두고 오긴 했다.
기분이 우울해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찾지 말아 달라고. 저녁까지는 돌아오겠다고.
“미카엘 경이 호출당하지 않았다는 건 아직 괜찮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내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저택이 평화롭길 바라며, 미카엘은 날 저택 뒤쪽 뜰에 데려다주었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저녁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저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했다.
아무래도 릴리가 잘 둘러댄 모양이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카엘과 작별 인사를 하고, 뒷문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쌀쌀한 밤공기 때문인지, 불이 꺼진 저택은 어쩐지 음산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괜스레 돋아 오는 소름에 팔을 쓸어 올리며 방문을 열자, 캄캄한 어둠이 날 맞이해 주었다.
“불을 켜 놓는 걸 깜빡했나.”
아무래도 릴리가 깜박한 모양이었다. 혼잣말을 하며 문 옆에 놓인 램프의 스위치를 누르자 방 안으로 따뜻한 불빛이 번졌다.
그러나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도 잠시,
“늦었군.”
등 뒤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