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텔레포트로 도착한 곳은 황성의 바깥이었다. 커다란 성문과 그 앞을 지키는 경비병을 보며 미카엘에게 물었다.
“성안으로는 텔레포트가 안 되나요?”
“네. 황성 안에서는 텔레포트가 금지예요. 아예 사용할 수 없도록 주변에 마법을 걸어 놓았죠.”
“그럼 다른 마법은 사용 가능해요?”
“저희처럼 등록된 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해요.”
미카엘의 얘기를 들으며 머리 위로 높게 솟아오른 성벽을 바라보았다. 두껍고 단단한 벽은 침입도 탈출도 쉽지 않을 듯 보였다.
“그럼 아티팩트는요?”
“아티팩트는 사전에 허가를 받고 들여와야 하죠. 그게 아니라면 입구에 설치된 장비에 감지가 되거든요.”
미카엘은 입구 주변에 설치된 푸른색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양은 달랐지만, 카지노에서 내 몸을 수색했던 것과 비슷한 장치인 듯했다.
혹시나 했던 또 하나의 가능성도 사라지고 말았다.
하긴, 황제가 사는 성인데 보안이 그리 허술할 리 없지.
“그나저나 텔레포트가 안 된다는 건, 설마 매번 제가 호출할 때마다…….”
“네. 성 밖으로 뛰쳐나와야 합니다.”
미카엘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여러모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미카엘 경.
그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건네며 부디 그가 오래오래 황성에서 일을 할 수 있기를 빌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는 미카엘과 동행하는 나를 큰 의심 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역시 미카엘을 부른 건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나와는 다르게 미카엘은 아무래도 이 상황이 찝찝한 모양인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 아가씨. 황성에 오신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하녀로 변장하신 것도 그렇고, 외모를 바꾸는 마법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그냥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며 난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실은…….”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 속삭였다.
“황성 구경을 하고 싶어서요.”
“……네?”
내가 또 무슨 폭탄을 던질까 긴장하던 미카엘은 맥이 풀린 얼굴로 물었다.
“구경이라면 언제든 하실 수 있잖아요. 굳이 이런 차림이 아니더라도.”
“하지만, 덕분에 아무도 절 못 알아보잖아요?”
“굳이 그러실 필요가…….”
“로망이었거든요. 아무도 모르게 황성을 돌아다니는 거요.”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셨죠. 그런 분이라는 거 알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이는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톡톡 두드려 주었다.
미카엘, 너무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아요. 이럴 줄 모르고 온 거 아니잖아?
물론 정말로 황성 구경을 하겠다고 이런 차림으로 온 건 아니었다.
원작의 흐름을 생각하면, 아르티아는 곧 성을 탈출할 결심을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원작과 다른 상황이었다. 클라우스의 변덕으로 강화된 경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르티아 혼자서는 성을 탈출하기는 힘들 것이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겠지.
그러니, 굳이 말하자면 사전 답사랄까?
미카엘의 안내는 자세했고, 황성에 오래 일한 사람답게 각종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게 처음인 나는 최대한 많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름길뿐만 아니라, 주요 건물의 위치나 경비병이 배치된 구역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황성 구석구석을 돌아보는데, 우연히 구석에 위치한 낡은 문이 눈에 띄었다.
“여긴 어딘가요?”
“아, 여긴 마법부 창고예요.”
그리 중요한 물건은 없는지 창고 문은 반쯤 열린 상태였다.
“열어 봐도 되나요?”
“아, 저기…….”
물론 그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내 손은 문을 열고 있었다. 동시에 안쪽에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래서 문이 제대로 안 닫혀 있었구나.
미카엘은 울상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하하. 죄송해요. 금방 정리해 놓을게요.”
쏟아진 물건 중엔 마법 도구뿐만 아니라, 행사에나 쓰일 법한 깃발이나, 폭죽, 꽃가루 같은 것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런데 이게 다 뭐예요?”
미카엘은 내 옆에서 정리를 도우며 말했다.
“얼마 전, 학술제 때 사용하려 했던 물건들이에요. 그날 사고가 나서 이후 행사가 모조리 취소되는 바람에 이렇게…….”
“아…….”
그런 슬픈 사연이 있는 물건일 줄은.
“버리기 아까워서 일단 모두 창고에 넣어 뒀어요. 내년에 또 쓸 테니까요. 그나저나 제대로 정리를 해서 놓을 것이지. 무턱대고 쌓아 놓은 모양이네요.”
누가 정리했는지 알아내서 한 소리 하겠다는 미카엘의 혼잣말 뒤로,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 중 하나가 내 시선을 끌었다.
“미카엘 경, 혹시 이 창고는 매번 열려 있나요?”
“아, 예. 보시다시피 잡동사니투성이라 굳이 자물쇠를 채워 놓지 않고 있어요.”
“그래요.”
그것참 도움이 되는 정보네요.
난 빙긋 웃으며 눈에 띈 물건을 상자 한쪽에 잘 정리해 두었다.
창고 정리를 끝내고 다음으로 아르티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기가 성녀님의 방이라구요?”
“네.”
방 앞에는 두 명의 경비병이 창을 들고 지키고 있었고, 마침 하녀 한 명이 트레이를 들고나오는 길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숨어 계세요?”
경비병에게 들켜 괜한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숨어서 바라보자, 그 모습이 이상했는지 미카엘이 물었다.
“이게 더 재밌잖아요.”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미카엘은 또 한 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티아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곧이어 주변을 살폈다.
성을 드나들 수 있는 입구는 정문 하나뿐이었고, 주변은 견고한 벽으로 막혀 있었다.
원작 속 아르티아 역시 성벽을 넘어 탈출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했고, 그녀는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새벽마다 황성을 찾아오는 식료품상의 마차에 숨기로 한 것이다.
마침 추수제 준비로 황성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되던 날이었고, 경비 역시 느슨했다. 덕분에 아르티아는 무사히 황성을 나갈 수 있었다.
다만, 그 모든 게 클라우스의 계략이었다는 걸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탈출이 성공했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전에 식료품상은 도적단의 습격을 받게 된다.
도적단은 그녀를 납치해 노예로 넘기고, 그녀는 결국 경매장에서 어느 귀족에게 팔리게 된다.
이쯤 되면 예상할 수 있겠지만, 그 귀족이 바로 클라우스였다.
그녀가 탈출을 결심할 만한 계기를 준 것도, 탈출할 수 있도록 풀어 준 것도, 그리고 마지막 희망을 앗아 간 것도 모두 클라우스였다.
그를 칭찬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데는 정말로 천재적이었다.
“미카엘 경, 이제 다른 데로 가죠.”
주변 조사를 끝낸 난 미카엘을 불렀다.
“어딜 구경하고 싶으신데요?”
“음…….”
창밖으로 건물들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들어 우리가 위치한 곳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요.”
미카엘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까요.”
황성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미카엘은 앓는 소리를 내며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가씨, 저도 이제 일하러 가야 해요.”
“어머, 아직 둘러볼 데가 많은걸요?
“정말 제가 잘리길 원하세요? 드미트리 님한테 자리 비운 걸 들켰다간 난리가 날 거라구요.”
그의 목소리는 많이 지친 것 같았다.
황성을 돌아다닌 지도 벌써 3시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으니, 지칠 만도 하지.
뭐, 황성의 지리도 눈에 익혔으니 슬슬 그를 드미트리에게 돌려줘야 할 듯싶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더 데려다주세요.”
“어디요?”
“주방이요.”
대답이 뜬금없었는지 미카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거긴 왜요? 혹시 배고프세요?”
뭐 배도 고프긴 한데, 그건 아니고.
“친구를 만나려고요.”
“그럼 그 친구한테 안내해 달라고 하시지.”
미카엘은 황성에 친구가 있는 줄 몰랐다며 살짝 투덜거렸다.
그럴 수만 있으면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 친구가 좀 무서워서 말이야.
황실의 주방은 곧 있을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정신이 없었다.
미카엘이 주방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의 하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미카엘 님?”
“아, 로라. 실은 사람을 찾는 중인데…….”
미카엘은 뭐라고 설명할지 몰라 어설프게 말을 흐리며 날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로라 님. 저 카나리아예요. 오랜만이죠?”
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카나리아라구요? 그쪽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클라우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학술제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었으니까.
대신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해 미카엘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는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카나리아 님이 맞아요.”
“카나리아…… 님이요?”
“아, 아니. 카나리아.”
로라의 질문에 미카엘은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그렇군요. 여긴 어쩐 일로 찾아오셨나요?”
곧바로 용건을 묻는 그녀는 여전히 날카롭고, 상황 파악이 빨랐다.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저랑요?”
“네. 아 참. 미카엘 님은 이제 그만 가 보셔도 돼요.”
내 말에 미카엘은 머뭇거리며 날 한쪽으로 이끌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아가씨, 만에 하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대체 무슨 일을 꾸미시는 겁니까.”
“꾸미다니요? 그냥 친구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뿐인데요?”
순진한 얼굴로 되묻자 미카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갈등했다. 내 말을 믿어도 되나 싶은 모양이다.
“그보다 일이 많으신 거 아니세요? 정시에 퇴근하시려면 어서 가 보셔야죠.”
정시 퇴근이라는 말에 미간이 패일 정도로 고민하던 미카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모셔다드릴 테니 얘기가 끝나면 어디 가지 마시고 절 찾아오세요.”
“네, 그럴게요.”
“꼭이에요, 꼭. 어디 갇혀 계셔도 안 되고, 잡혀 계셔도 안 되십니다. 아셨죠?”
당부는 꽤나 자세하고 구체적이었다. 대체 네 머릿속에 난 어떤 사람인 거야? 아니, 뭐. 만날 때마다 갇혀 있고 잡혀 있긴 했지만…….
그동안 해 온 짓이 있어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지만, 미카엘은 그 대답마저 못 미더운지 몇 번이고 내게 신신당부하고서야 돌아갔다.
하여간, 걱정이 많은 것도 병이라니까.
미카엘이 돌아가고, 나와 로라는 잠시 자리를 이동했다.
“마법으로 외모를 바꿀 정도면 평범한 분은 아니시군요.”
사람이 없는 복도에 멈춰 서자, 로라는 내 정체를 경계하며 말을 꺼냈다.
“그럴 리가요. 보시다시피 평범한 사람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