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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79)화 (79/159)

79화

“끝났나?”

일리온은 소리를 낮춰 물었다. 대체 왜 따라온 거야? 내가 화장실 간다고 했잖아. 화장실까지 따라와야 속이 풀려?

미적거리며 가기 싫다는 뜻을 은연중에 비치자 일리온은 특유의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잔소리밖에 더 듣나 싶어 뭉그적거리며 슬쩍 앨리스 쪽을 바라보는데, 언제 온 건지 앨리스가 바닥에 앉아 있는 나와 일리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짱을 단단히 끼고서.

“여기서 뭐 하세요. 공작 부인?”

“애, 앨리스 양?”

발개진 눈가로 날 노려보는 앨리스는 상당히 무서웠다.

“그, 그러니까 바닥 청소?”

“공작님이랑요?”

“우, 우리 취미가 바닥 청소거든. 하하.”

“…….”

아무래도 내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 공작님. 청소도 다 끝났는데 돌아갈까요?”

앨리스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일리온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하여간, 이게 다 너 때문이라니까. 좀 더 구경할 수 있었는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누굴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일리온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아가씨!”

막 입을 떼던 일리온과 거의 동시에 릴리가 날 불렀다. 릴리는 일리온을 보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내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일리온의 잔소리가 시작될 타이밍이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어 릴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무슨 일이야?”

“저, 란셀 후작 부인님께서 오셨는데요.”

“아! 맞아. 오늘 좀 일찍 뵙기로 했었지.”

“라벤느, 아직 내 이야기 안 끝나…….”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죠, 공작님.”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한 일리온을 뒤로하고, 서둘러 릴리의 뒤를 따랐다.

일리온의 상태를 보아하니, 깜짝 파티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듯 보였다.

저녁이 되고, 손님들의 마차가 하나둘 저택으로 도착했다.

온종일 날 찾아다니던 일리온과 그를 피해 도망 다니던 나는 마침내 저택 입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서 오세요, 슈테란 후작님.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리온은 마지못해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고, 즉위 7주년을 축하드린다는 민망한 인사를 수십 번들이어야만 했다.

내 멱살을 잡지 않는 게 용할 정도였다.

“왜 하필 이런 쓸데없는 날을 기념하는 건가?”

간신히 여유가 생긴 일리온이 따가운 눈초리로 물었다.

“어머 쓸데없다니요? 공작님의 즉위 7주년을 기념하는 건데. 그거 아세요? 7은 행운의 숫자래요.”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이었다.

뭘 또 이해를 하려고 그래. 그냥 받아들여. 미카엘을 좀 본받으라고. 걔는 빠르게 포기하잖아.

“안녕하세요, 공작님. 건강은 좀 괜찮으세요?”

그리고 미카엘은 양반은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미카엘 경.”

“안녕하세요. 아가씨.”

인사를 건네는 그는 전보다 꽤나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안색이 안 좋은 게 여러모로 고생이 많은 모양이다.

“미카엘도 초대했나?”

“…….”

“당연히 초대해야죠. 저희가 미카엘 경께 받은 도움이 얼만데. 하하, 공작님도 참. 사람 무안하게.”

예상치 못한 일리온의 냉대에 미카엘은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고, 난 서둘러 미카엘을 끌고 회장으로 들어섰다.

“들키셨죠.”

“……네. 죄송합니다.”

그를 데리고 사람이 없는 테라스로 나온 나는 대역 죄인처럼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저는 어떡하라고요, 아가씨? 사고 때문에 위에서도 난리인데, 공작님한테까지 눈 밖에 나면 진짜 잘려요.”

“그러면 제가 좋은 일자리 하나 알아봐 드릴게요.”

미카엘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절망했다.

그에게 미안한 게 많은 난 한동안 그의 하소연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잘못한 것도 있지만, 또 한 번 그에게 곤란한 부탁을 해야 할 듯해서 말이다.

한동안 신세 한탄을 하던 미카엘이 진정되자, 난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저, 미카엘 경. 혹시 요즘 황성 분위기는 어때요?”

“그건 왜요?”

“그냥, 사건 이후로 어떤가 싶어서요.”

내 질문에 미카엘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 냈다. 하소연과 마찬가지로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말도 마세요. 완전 살얼음판이에요.”

미카엘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날 이후로 사건의 책임자들이 매일같이 문책당하고 있는데, 이러다 누구 하나 목이 잘리지는 않을까 걱정이라니까요.”

“저, 그럼 혹시 성녀님은?”

딱히 관심이 없는 마법부 일을 빠르게 넘기며 아르티아에 관해 물었다.

“성녀님이요? 들리는 얘기론 방에 갇히셨다던데요.”

“갇혀요? 왜요?”

“폐하께서 방에 가두라고 하셨다고만 들었어요. 그분의 생각을 저희가 어떻게 다 알겠어요.”

“그럼 혹시 성녀님을 뵙는 건…….”

“당분간은 힘들 거예요. 뭐, 폐하께서 마음이 바뀌시면 또 모르죠.”

“…….”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원작에선 그런 내용은 없었다.

아르티아는 추수제 준비로 황성의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탈출을 감행했고, 그전까지는 자유로이 황궁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물론 탈출에 성공한것도 어디까지나 클라우스의 계략이긴 했지만.

설마 방에 가둬 버릴 줄은.

이건 마치 일리온을 노리고 한 지시 같았다. 일부러 일리온이 아르티아와 만나지 못하도록.

혹시 클라우스도 일리온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원작과 너무 달라진 이야기에 머리가 아파 왔다.

“저, 미카엘 경. 뭐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아니요.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부탁을 듣기도 전에 미카엘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별거 아니에요.”

“아니요, 절대 안 돼요.”

“그러지 말고, 하나만 더…….”

막 미카엘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애걸복걸하려는데 커튼이 살짝 들춰지며 란셀 후작 부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머, 리슈펠트 양…….”

“아, 후작 부인.”

그녀는 나와 미카엘을 번갈아 보더니 눈을 깜박거렸다.

“어, 음. 혹시 제가 방해했나요?”

그제야 나와 미카엘의 모습이 오해하기 딱 좋게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난 황급히 미카엘의 옷자락을 놓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답니다.”

“다행이네요. 괜찮으시면 잠깐 나오시겠어요? 오늘 주인공이 안 계셔서 다들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안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일리온이 싸늘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공 두 분이 춤을 추셔야 연회가 시작하는 거 아니겠어요?”

“…….”

춤이요? 설마 나랑 저기 서 있는 공작님을 말하는 건 아니겠죠?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주인공이라 해 봤자 이 연회의 주최자인 나와, 이 연회의 당사자인 일리온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춤을 춰야 연회가 시작한다니. 연회를 시작하는 게 원래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클라우스와 춤출 때도 불편해 죽을 것 같았지만 일리온이라고 좀 더 나은 건 아니었다. 단지 다리를 밟아도 죽을 걱정이 좀 덜하다는 것뿐?

“미카엘 경이랑 사이가 좋나 보군?”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단둘이 테라스에 있는 건 말이 나올 것 같은데.”

춤을 추면서도 또 잔소리였다. 야단이고 잔소리고 이골이 났다 싶지만, 마음은 또 그러지 못한 모양이다. 대꾸를 하고 싶은 걸 보면.

“어머, 공작님. 설마 지금 질투하시는 거예요?”

“…….”

평소처럼 주접을 떨며 일리온을 바라보는데 대꾸하지 않던 일리온이 대뜸 물었다.

“그럼 안 되나?”

“……네?”

“그럼 안 되냐고 물었네.”

순간 나도 모르게 스텝을 멈추고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 불길한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언제부터였을까. 일리온의 태도가 전과 다르다고 느낀 게.

가정 교사를 피해 다락방에 숨었을 때였나. 아니면 그보다 더 전이었나.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긴 힘들었지만 아마 그 무렵일 것이다.

언뜻언뜻 보이는 그의 태도에 의문을 가졌지만, 그런 일리온의 변화를 애써 못 본 척 넘겼다. 모르는 척, 안 보이는 척. 

그게 편했으니까.

안 그래도 실타래처럼 엉킨 이야기에 나까지 끼어들어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들을 무시해 온 결과가 이거였다.

안 되냐고? 그야 당연히 안 되지. 올겨울을 넘기지 못할 네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을 때가 아니잖아?

넌 내가 아니라 아르티아를…….

“라벤느?”

움직임이 없자, 일리온은 내 이름을 불렀다.

“혹시 어디 안 좋나? 안색이 나쁜데.”

“아,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파티를 준비하느라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가 봐요.”

서둘러 스텝을 이어 가며 답했다. 일찍 들어가 쉬는 게 어떻냐는 일리온의 제안에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아가씨. 벌써 들어가시게요?”

“응. 넌 여기 남아서 다른 사람을 도와줘.”

일리온의 제안대로 잠시 방에 들어가 쉬다 오기로 했다.

내 안색이 안 좋아 보였는지 릴리가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냐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잠깐 쉬다가 다시 올 거니까.”

“저, 그럼 아까 만드신 케이크는 어떻게 할까요?”

“아, 그거.”

완전히 잊고 있었다. 기념일이라고 모처럼 후작 부인의 도움을 받아 만든 케이크였는데.

하긴, 지금 그게 중요한가.

“그냥 버려.”

“……네?”

“생각해 보니, 사람들 앞에 내놓을 만한 건 아닌 것 같아. 그냥, 버리자.”

그렇게 말하며 난 서둘러 회장을 벗어났다.

***

연회는 무사히 끝이 났지만 외출 금지는 여전했다. 그리고 더 이상 일리온을 설득하는 게 의미 없다고 판단한 나는 귀찮게 일리온을 조르는 대신 더 빠른 방법을 택했다.

“어서 오세요. 미카엘 경.”

일부러 릴리가 없는 시각을 노려 미카엘을 호출했고 다행히 미카엘은 내 호출에 응답해 주었다.

“왜 또 절 찾으세요, 아가씨. 그리고 이 복장은 대체…….”

미카엘은 내 차림새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물었다.

“마지막이에요.”

“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줘요.”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미카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무슨 일인데요?”

“황성에 데려다줘요. 그거면 돼요. 자세한 건 묻지 말고요.”

“공작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텐데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어차피 오래 볼 사이가 아니니까. 그 말을 삼키며 난 미카엘에게 애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에요.”

결국, 마음이 약한 그는 내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텔레포트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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