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아가씨께서 공작님을 깜짝 놀래켜 주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거라면 이미 성공한 듯 보였다. 깜짝을 넘어 끔찍할 지경이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취소할 순 없나?”
“당일 취소하긴 쉽지 않죠.”
당일이라고? 이렇게 감쪽같이 속일 줄이야.
“방 안에 가만히 있으라는 것도 이것 때문이었군.”
“그럴 리가요. 그건 주인님의 건강이 걱정돼서였답니다.”
말이라도 못하면.
그에게 배신감마저 느껴졌지만, 말다툼을 해 봤자 제 얼굴에 침 뱉기였다. 일리온은 곧바로 이 일의 원흉인 라벤느를 찾았다.
“라벤느는?”
“응접실에 계십니다. 손님이 찾아오셔서요.”
“손님?”
어떤 손님인지 물으려는데 때마침 현관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처음 보는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 머리의 소년은 일리온과 눈이 마주치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노크를 해도 답이 없으셔서.”
“누구지?”
“저, 저는 안톤이라고 합니다. 혹시 저희 아가씨께서 여기에 오시지 않았나 해서요.”
하는 말로 보아하니, 아가씨를 찾기 위해 온 하인인 듯 보였다.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나?”
세바스찬의 질문에 아이는 공손히 대답했다.
“앨리스 리델 아가씨입니다.”
***
연회가 시작하기엔 이른 시각. 귀여운 얼굴의 손님이 날 보고 싶다며 찾아왔다.
“이,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 부인.”
아이는 전에 볼 수 없는 예의를 보여 주며, 치맛자락을 걷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앨리스 양. 어머나, 오늘은 아줌마라 안 부르시네요?”
답지 않게 공손한 아이의 행동에 맞추어 나름 공작 부인의 흉내를 내자 앨리스는 뜨끔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그간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부인. 부디 서, 선처를…….”
초대장을 보낸 뒤 앨리스의 반응이 궁금하긴 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잔뜩 얼어 있었다.
문밖에 시종이 없던 걸로 봐선 책임감을 느끼고 혼자 날 찾아온 모양인데…….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부채를 펼쳤다. 앨리스는 여전히 긴장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군요. 앨리스 양, 그간 제게 보여 주신 무례는 눈감아 드리기 참 힘든 일이죠. 그것 때문에 제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앨리스 양은 모를 겁니다.”
살짝 울먹이는 소리를 내자 앨리스는 하얗게 질려 고개를 들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부인.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벌이라……. 그래요. 벌을 받아야죠.”
부채를 접으며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자, 앨리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닫았다.
“그럼 눈을 감아 보세요.”
“네?”
“벌을 받겠다면서요?”
앨리스는 벌이란 얘기에 화들짝 놀라더니 결심한 듯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난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아주 살짝 딱밤을 때렸다.
요즘 누가 나한테 이렇게 벌을 내리더라고.
“아…….”
앨리스는 한쪽 눈을 살짝 뜨며 날 바라보았다.
“고, 공작 부인?”
그 얼이 빠진 얼굴이 웃겨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속았다는 걸 깨달은 앨리스는 금세 얼굴이 빨갛게 변해 날 바라보았다.
“그래서, 혼자 벌 받겠다고 여길 온 거야?”
“……네. 저 때문에 아버지를 곤란하게 할 수 없잖아요.”
곤란하게 하자고 초대장을 보낸 건 아니었는데. 물론 경악한 앨리스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욕망도 아주 조금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무작정 찾아올 줄은…….
“집에 얘기는 하고 온 거야? 안톤은 어쩌고?”
“…….”
안톤 얘기에 앨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안톤이랑은 싸웠어요.”
“왜?”
“저희 집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수도를 떠날 거라기에, 홧김에 그만…….”
그 성격에 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독설이라도 날린 모양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후회되는 모양인데…….
“그렇지만 안톤이 잘못했어요. 미리 말해 주면 좋잖아요. 그럼 나도…….”
“너도?”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열을 올리던 앨리스는 풀이 죽어 어깨를 떨궜다.
“알아요. 어차피 안 될 거. 이렇게 열을 올릴 필요도 없다는 거.”
“안톤이 평민이라서?”
내 질문에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문젠데?”
“문제죠. 전 귀족이고 그 아인 평민인걸요?”
“상관없잖아.”
“저, 부인. 그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앨리스는 아줌마에서 부인으로 격상된 내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제국의 법도 모르냐며 한마디 할 아이였으니까.
“안 되면 첩으로 삼으면 되지.”
“……네?”
앨리스는 지금 자기가 들은 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날 바라보았다.
“왜?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는데?”
“아줌……, 아니 공작 부인.”
“괜찮아. 아줌마라 불러도.”
난 너그럽게 아줌마라는 호칭을 허락하며 말했다.
“지금 그게, 10살짜리 아이에게 하실 말씀인가요?”
그리고 앨리스는 전보다 살짝 공손해졌을 뿐, 여전히 독설가였다.
똑똑.
“들어오세요.”
그녀와 안톤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는 사이 원치 않는 방문객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앨리스 또한 나만큼이나 일그러진 표정으로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부인,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앨리스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일리온에게 인사를 건네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일리온과 같이 온 안톤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그런 앨리스의 행동이 익숙한 모양인지, 안톤은 내게 고개를 숙이더니 황급히 앨리스를 쫓았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나?”
문 앞에 서 있는 일리온이 입구를 막으며 물었다.
“화장실이요.”
“그전에 할 말이 있을 텐데.”
표정을 보아하니 연회가 있을 걸 알아챈 모양인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보고 오신 그대로인걸.
“아뇨. 딱히 없는데요.”
웃으며 답하자 일리온이 짜증 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라벤느.”
“저, 정말 화장실이 급한데, 5분 안에 다시 올게요. 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때 듣죠.”
안 그러면 재밌는 구경을 놓칠지도 모르거든.
일리온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던지고 응접실을 나와 앨리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다투는 듯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앨리스 님, 잠시만요. 앨리스 님.”
앨리스는 안톤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귀찮게 왜 여기까지 찾아왔어?”
“아가씨가 걱정돼서 온 게 당연하잖아요.”
“어차피 곧 떠날 거면서 걱정은 무슨.”
아아, 앨리스. 너도 성격 좀 죽이자.
조금 전까지 심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고선 또 마구잡이로 독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래도, 그전까지는 아가씨의 시종이니까요.”
그러나 안톤은 그 나이대의 아이 같지 않은 참을성을 보이며 앨리스를 달랬다.
그런 차분한 안톤의 모습이 맘에 안 들었는지, 앨리스는 다시 한번 그를 밀어냈다.
“내 일에 참견하지 마.”
“네. 참견 안 할게요. 그러니까 떠나기 전까지만이라도 아가씨를 따라다닐 수 있게 해 주세요.”
허락을 구하는 안톤을 한동안 말없이 노려보던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금방 잊어버릴 거야.”
“네?”
“너 같은 건 금세 잊을 거라고.”
앨리스의 외침에 잠시 놀라던 안톤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금방 잊으세요. 저 같은 건 기억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아, 미치겠다. 얘들 지금 드라마 찍는 거야?
좀 더 보고 싶은 욕망과 두 사람 사이를 이대로 두고 봐도 되는 건가 하는 양심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나?”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불쑥 나타난 불청객을 보며 난 서둘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일리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지금 중요한 장면이란 말이에요.”
눈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일리온의 팔을 끌어당겨 옆에 앉혔다. 혹여 앨리스가 눈치채지는 않을까 했는데 그쪽은 여전히 다른 일로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온갖 악담은 자기가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안톤의 말이 상처였는지, 앨리스는 동그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런 앨리스를 안아 주지도 못하고 달래 주지도 못하던 안톤은 손가락을 휘젓더니 작은 나비 한 마리를 만들어 냈다.
푸른 빛으로 만들어진 나비는 천천히 날아 앨리스의 손등에 앉았다. 두 손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 내던 앨리스는 나비를 보고 놀라더니 안톤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나비를 만들어 봤어요. 눈물이 조금 그치실까 해서.”
그렇게 말하며 안톤은 온화한 미소로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히려 역효과였다. 앨리스는 더 목 놓아 울어 버렸으니까.
저러면 더 못 잊지. 안톤 쟤도 순진하게 생겨서 선수네 선수야.
“아, 아가씨. 계속 이렇게 우시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죄, 죄송해요. 아가씨가 나비를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앨리스는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짜증이 나는지 발을 굴렀다.
“나 앞으로 엄청 유명한 사람이 될 거야. 황성에 들어가서 일도 할 거고, 매튜 따위한테 시집도 안 갈 거야. 그러니까 너!”
엉망이 된 얼굴로 앨리스는 안톤을 가리켰다.
“기다려.”
“……네?”
“네가 반할 만큼 멋진 여자가 돼서 찾아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사랑 고백이나 다름없는 앨리스의 선언에 안톤은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더니 앨리스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가씨,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전 평민인걸요.”
“그런 건 상관없어! 내가 널 첩으로 맞이할 테니까!”
앨리스는 얼굴이 발개져 소리쳤고, 폭탄선언을 들은 안톤은 잠시 말없이 굳었다 웃음을 터트렸다.
“풉.”
“뭐, 뭐가 그렇게 웃겨? 내가 못 할 거 같아?”
“아뇨. 아가씨라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왜 웃는 건데?”
“그냥 조금 기뻐서요.”
그렇게 말하는 안톤은 무척이나 따뜻한 눈빛으로 앨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풋풋하다, 풋풋해. 어린애들의 사랑 얘기가 뭐라고 이렇게 재밌는지.
톡톡.
로맨스 영화의 도입부를 본 것 같은 기대감으로 헤실거리며 웃고 있자, 일리온이 내 손을 툭툭 건드렸다. 입을 막은 걸 풀어 달라는 뜻인 모양이다.
난 서둘러 손을 떼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