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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77)화 (77/159)

77화

“제가 다칠 일이 어디 있겠어요.”

난 황급히 그의 말에 대꾸했다.

“그래, 그대가 다칠 일이 어디 있겠어. 미카엘이 있는데. 안 그런가?”

“하하. 미카엘 님은 왜?”

“아님, 카나리아라고 불러 줄까?”

“…….”

어정쩡한 자세로 바닥에 앉아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늘 빗나가지 않는 건지. 예상대로 일리온은 내가 카나리아라는 걸 알고 있었다.

클라우스도 그렇고, 일리온도 그렇고. 제3의 눈이라도 가진 거야?

당황한 호흡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덕분에 일리온을 내려다볼 수 있는 건 좋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올려다보는 것보다는 나을 줄 알았는데 일리온은 일리온이었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카나리아는 누군데요? 설마 지금 제 앞에서 다른 여자 얘기를 하고 계신 거예요?”

“다른 여자?”

“정말 섭섭하네요. 공작님께서 쓰러지셨을 때 옆에서 지킨 건 전데, 공작님은 카나리아라는 여자 얘기만 하시고. 설마 저 몰래 만나는 여자인가요?”

일리온은 내 뻔뻔한 연기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빠르게 잘못을 인정했다.

“그렇군. 내가 실수를 했네.”

이렇게 빨리 포기한다고? 좀 더 집요하게 물을 줄 알았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과에 내 거짓말이 먹혀들어 갔나 싶었는데, 그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날 앉혔다. 정확히는 그의 무릎에.

어어…… 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에 눈만 깜빡이며 일리온을 바라보는데, 그는 보기 힘들 만큼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의 얘기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데 말이야.”

“……고, 공작님?”

어정쩡하게 안긴 자세를 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데 날 가둔 팔은 미동이 없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미소 역시 여전했다.

“그, 그러고 보니, 사람들을 불러와야겠네요. 공작님께서 일어났다는 걸 모두에게 알려야…….”

“천천히 하게. 지금은 그대와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방해받고 싶지 않은 사람의 표정이 아닌데요? 가식적인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 일단 이 손부터 풀어 주시는 게…….”

“그전에, 학술제 날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말해 주겠나? 말했다시피 그대의 이야기에 집중해 볼까 해서.”

“아하하, 제 이야기 말이죠…….”

이로써 내 얄팍한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걸 깨달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떨궜다.

결국, 일리온의 추궁에 못 이겨 그날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아르티아에 대한 것만 빼고.

“하아.”

내 이야기를 들은 일리온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어디서부터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군.”

“그럼 화를 안 내시는 방법도…….”

헤실거리며 눈치 없는 소리를 늘어놓다 살벌한 일리온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손은.”

“네?”

“제대로 치료했나?”

그거라면 걱정할 거 없었다. 성수의 효과가 좋아서인지 흉터 하나 남지 않았으니까.

일리온의 눈앞에 손을 펼쳐 보이자 걱정스러운 얼굴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그러나 안도감이 스친 것도 잠시뿐,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나?”

“죄송해요.”

“뭐가?”

“공작님을 위험에 빠뜨려서요.”

내 말에 그는 또 한 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며칠 전의 일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일리온은 또 내가 입바른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이번엔 진심이에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어요.”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온 것도, 클라우스를 속이려 했던 행동도 모두 반성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내 잘못이었으니까.

쏟아질 잔소리를 기다리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가 아파 왔다.

이마를 부여잡고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는 선생님처럼 엄한 표정으로 날 나무랐다.

“내가 다친 건 그대 때문이 아니니 사과할 필요 없어. 그보다, 왜 자꾸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건가? 폐하를 속이는 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아나? 혹여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그렇게 말하는 일리온은 화를 참는 듯 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곤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쩔 뻔했어?”

날 가만히 보던 일리온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못 나가게 하면 어디 가서 다쳐 오진 않을 줄 알았더니…….”

“…….”

“더 다친 곳은 없나?”

“괜찮아요. 공작님 덕분에.”

그럼에도 일리온은 내 말을 못 믿겠는지, 내 손을 쥐어 살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 손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저, 혹시 걱정……하셨어요?”

“빨리도 물어보는군.”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꼬는 걸 봐서는 일리온이 맞는데 손을 살피는 표정은 조금 심각해 보였다.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서둘러 잡힌 손을 빼고 투덜거렸다.

“……그, 그렇다고 딱밤을 때릴 거까지는 없잖아요.”

“그건 거짓말한 벌.”

유치하게. 부루퉁한 표정으로 괜히 이마를 문지르다 다시 한번 사과를 건넸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걱정을 끼친 걸 알았다면 앞으론 제발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말게.”

그건 장담 못 하겠어, 어물쩍 대답을 피하고 넘어가려는데, 누가 일리온 아니랄까 봐 그는 집요하게 한 번 더 물었다.

“대답은?”

“……네.”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이대로 대화가 끝나려나 했는데, 일리온이 갑자기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혹시 클라우스에 대한 거라도 물어보려는 건가? 그거라면 아직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대답해야 잘 넘길 수 있을까 싶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일리온이 입을 열었다.

“미카엘이랑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가?”

“……네?”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본다는 게, 고작 그거야?

***

일리온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저택은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세바스찬의 얼굴엔 근심이 걷혔고, 스피넬은 종종 찾아가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일리온이 깨어났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아직 정말 중요한 건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일리온과 아르티아, 그리고 거기에 막 끼어든 클라우스까지.

세 사람의 일을 떠올리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원작에서라면 일리온이 성녀랑 친하게 지냈으니 눈엣가시였던 게 맞지만 지금 일리온은 아르티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축복을 받으라고 한 것도 내가 거의 애원하다시피 해서 받고 온 거니까. 덕분에 난 광산에서 사고나 당하고.

“참, 릴리. 그때 광산에서 말이야.”

“네, 네?”

차를 마시며 릴리를 부르는데, 릴리가 지나치게 당황하며 날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광산에서 난 사고.”

“아, 네. 사, 사고요.”

얘가 왜 이래? 허둥거리는 릴리는 어딘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그때 나 말고 다친 사람은 없었어?”

“어, 없었어요. 다들 점심시간이라 밖에 있었거든요.”

“그래? 다행이네. 근데 왜 사고가 난 건지는 알아? 실은 그때 폭발음 같은 걸 들은 것 같은데…….”

“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어색하게 고개를 젓던 릴리는 할 일이 떠올랐다며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내가 뭘 물어봤다고 저렇게 도망가는 거지? 그냥 왜 사고가 났냐고 물어본 것뿐이잖아?

릴리의 반응이 아무래도 수상해 세바스찬을 찾아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공사 현장이라는 게 워낙 위험하다 보니 말이죠.”

그렇게 말하는 세바스찬 역시 묘하게 대답을 피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보다 아가씨. 연회 준비 말인데요, 어떻게 할까요? 지금이라도 취소하는 게 좋을까요?”

“왜 취소해요?”

“주인님께서 아직 완전히 회복하시지 않으셨으니, 미루는 게 어떨까 해서요.”

물론 일리 있는 말이긴 했지만 취소할 생각은 없다. 아직 내 외출 금지가 풀리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일리온을 밀어붙이기엔 좋은 기회였다.

“아니요. 그대로 진행하도록 해요. 공작님께서 건재하시다는 걸 보여 줄 필요가 있으니까요.”

내가 빙긋 웃자 세바스찬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묘하게 질문을 회피하는 세바스찬을 보며, 다시 한번 확신했다. 역시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맞다.

반응을 보아하니 나 빼고 다 아는 눈치인데.

어떡할까 고민하던 난 곧장 일리온의 집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나 빼고 다 아는 일이라면 일리온이 모를 리 없지.

주인이 없는 집무실은 조용했다. 며칠 자리를 비웠지만, 책상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렇게 도둑고양이처럼 책상 서랍을 뒤지자, 일반 보고서와는 조금 다르게 생긴 서류가 보였다.

보고서에는 버트라는 자의 신상과 광산에서 발견된 폭발물에 대해 기록되어 있었다.

“폭발물?”

그날 내가 들은 파열음은 폭발물이 터지는 소리가 맞았던 모양이다. 보고서를 보면 사람 하나 죽일 생각으로 설치한 것 같은데.

그날 급하게 일정이 바뀐 걸 생각하면 폭탄이 노린 건 내가 아닐 것이다.

“혹시 이 사건도…….”

만약 이 사건 역시 클라우스가 계획한 거라면 어쩌면 일리온과 아르티아의 관계가 내 생각만큼이나 지지부진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클라우스에게 다른 목적이 있던가.

원작에서 아르티아가 황궁을 탈출했던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황성을 탈출하려다 황제에게 잡혀 다시 성에 갇혔던 이야기를.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황성에 들러 봐야 할 듯했다.

***

방 안에 가만히 있는 건 고역이었다. 회복이 모두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저택 사람들은 혹여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봐 자신을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했다.

아무리 환자라고 하지만 지나친 과잉보호였다.

세바스찬은 한술 더 떠서 그나마 보고 있던 서류마저도 모조리 뺏어서 들고 가 버렸으니.

실로 오랜만에 갖는 자유 시간이었지만 없는 것만도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택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하녀들의 움직임이 어쩐지 조금 부산스러웠다.

‘뭘 저리 바쁘게들 움직이는 거지?’

묘하게 들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일리온은 현관의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세바스찬?”

“아, 주인님?”

“이게 다 뭔가?”

현관을 가득 장식한 꽃은 자신이 지시한 적 없는 물건이었다.

“이게, 그러니까. 연회 준비를…….”

세바스찬은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말을 흐렸다.

“연회?”

“네. 주인님의 즉위 7주년을 기념하는 연회지요.”

대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란 말인가.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한 명뿐이니까.

“대체 왜 내버려 둔 건가?”

자신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멋대로 진행된 일에, 일리온은 세바스찬을 질책하며 물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뭐라고?”

“아가씨께서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라고요. 밖에 나가는 것만 빼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구나.

일리온은 며칠 전 스스로 내뱉었던 말을 떠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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