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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76)화 (76/159)

76화

구멍이 뚫렸던 손등은 다행히 성수의 도움으로 아물어 가고 있었다.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폭발한 아드레날린 덕분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걸어 볼 만한 도박이기도 했다. 어차피 거기서 못 하겠다고 해도, 우리 둘 다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손등 하나로 넘길 수 있다면 오히려 싸게 먹혔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클라우스와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며 원형 경기장 위쪽을 달렸다.

저 멀리, 경기장 안쪽에서 미카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에게 가는 가장 가까운 계단으로 뛰어가는데 손이 탁 하고 잡혔다.

나도 모르게 휘청거리는 중심을 잡고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일리온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공작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아까 그 일을 얘기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미카엘에 대해서?

“무슨 일이신데요?”

마음은 조급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며 물었다.

“자네 말인데, 혹시…….”

붉은 눈동자가 날 살피며 물었다. 뭘 물어보고 싶은 걸까.

혹시 정말 미카엘이랑 사귀냐고 물어보려는 걸까? 에이 설마.

그게 아니면…….

불현듯 불안한 예감이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산 넘어 산이란 말은 누가 했던가. 간신히 클라우스에서 벗어났나 했더니…….

설마 들킨 건가 싶어 반쯤 체념한 상태로 그의 말을 기다리는데 순간 경기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굉음이 울렸고 이내 몸이 기울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건 시야를 가득 메운 새파란 하늘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걸 본 뒤였다.

“……공작님?”

난 불안한 목소리로 일리온을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급히 날 껴안은 그의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일리온은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아, 아가씨. 괜찮으세요?”

소란에 놀라 달려온 미카엘이 보였다.

“미카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갑자기…….”

“사고가 있었어요. 기계가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기계라고? 아까 우리가 나사를 조였던 그 기계?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카엘, 사제를 불러 주세요. 아니, 공작님을 데리고 가 주세요. 그게 빠르겠어요.”

“걱정 마세요. 지금 당장…….”

말을 꺼내던 미카엘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미카엘뿐만 아니라, 주변으로 몰려왔던 사람들 모두가 무릎을 꿇고 한쪽을 바라보았다.

난 애써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뒤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클라우스가 느긋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런, 공작이 많이 다쳤군.”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말투는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째서 또…….”

그의 뒤를 따라온 아르티아는 끔찍한 참상에 입을 가리고 말을 흐렸다. 그리고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일리온에게 향했다.

“아르티아. 멋대로 굴지 말게.”

그러나 이내 클라우스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아르티아는 발걸음을 멈추고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하오나 폐하, 공작님께서…….”

“그대가 공작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설마 절 의심하시는 건가요?”

아르티아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대야말로 주제를 모른다 생각하지 않나? 손님 대우를 하고 있지만, 그대가 적국의 포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지금 한시가 급한데 이런 쓸데없는 대화를. 클라우스 눈에는 쓰러진 일리온 따위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참다못한 난 그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하지만 괜찮으시다면 공작님을 신전에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커다란 구둣발이 저벅이며 다가왔다. 그리곤 몸을 낮춘 그는 내게 작게 속삭였다.

“그래. 어서 데리고 가게. 곧 부군이 될 사람인데 죽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소름이 돋을 만큼 즐거워 보이는 눈동자가 날 바라보았다.

***

그 일이 있고 난 뒤 3일이 지났다.

외상은 모두 치료가 끝났지만, 일리온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원작에선 일리온이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손쉽게 성녀를 구하고 사고를 피했으니까.

‘나사는 모두 조여진 상태였습니다. 아가씨께서 드미트리 님과 사라지시고, 다시 한번 꼼꼼히 점검했으니까요. 분명 문제가 없었는데, 기계가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사고에 대해 설명하던 미카엘의 말을 떠올렸다.

기계가 갑자기 방향을 틀고, 사고가 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클라우스가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클라우스는 내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감히 그를 속이려 했던 것에 대한 복수인지, 눈엣가시 같은 일리온을 치워 버리려고 하는 속셈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이번 일로 확실한 건 클라우스가 일리온뿐만 아니라, 내게도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뭘 그리 혼자 열심히 생각하느냐?”

“아, 스피넬 님.”

“너답지 않게 표정이 어둡구나.”

스피넬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그냥 좀 혼자 생각을 하다 보니…….”

난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며 답했다.

“설마 이번 일이 너 때문이라 생각하는 거냐?”

“…….”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난 입을 다물었다.

“하긴,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긴 했지.”

윽…….

“지금 생각해 보니 네 탓이 맞는 것 같구나.”

스피넬의 말은 가차 없었다. 그런데도 반박하지 못하는 건 그녀의 말이 구구절절 맞기 때문이다. 의도가 뭐였건, 결과가 이랬으니까.

“물론, 네가 다쳐 오는 것보다는 그 녀석이 다치는 게 낫지만.”

스피넬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하녀가 가져다준 쿠키를 오독오독 먹었다.

“가서 살펴보지 않아도 괜찮겠냐?”

“공작님의 상태라면 세바스찬에게 매일 보고를 받고 있어요.”

“집사를 귀찮게 하지 말고 직접 찾아가는 게 더 빠를 것 같다만?”

“…….”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뿐.

일리온의 일에 끼어드는 게 나은 건지, 이대로 멀어지는 게 나은 건지조차 확신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죽기 전에 임종을 지킨다더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구나.”

“……스피넬 님. 공작님 아직 안 돌아가셨어요.”

난 억지로 웃으며 스피넬의 말을 정정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저러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지. 원래도 오늘내일하던 놈이지 않…….”

탁!

스피넬의 말을 자르며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저 먼저 방으로 돌아가 볼게요.”

“괜한 데 화풀이를 하는구나.”

내 반응에 스피넬은 어깨를 으쓱이며 나머지 쿠키 하나를 입에 넣었다.

스피넬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일리온은 나 때문에 다쳤고, 그에게 찾아가지 않으면서 세바스찬을 귀찮게 하는 것도 사실이었으며, 그녀의 말에 화가 나 화풀이를 한 것도 맞았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은 어느새 일리온의 방 앞에 멈춰 섰다.

“괜히 사람 마음 심란하게 임종이니, 뭐니 쓸데없는 소릴 해서…….”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고 일리온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조용했다.

널찍한 침대 위에는 일리온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자고 있었다.

……아, 앞으로 죽음이라는 단어 금지. 괜히 부정 탈라.

난 고개를 휘휘 저으며 좀 더 가까이 가서 그를 살폈다.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자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네.

“무슨 좋은 꿈을 꾸길래, 잠만 자는 걸까.”

이쪽은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피가 마르는 기분인데.

“공작님, 할 일 많잖아요. 잔소리도 묵혀서 듣는 거 찝찝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요.”

어차피 들을 수도 없는 투정 섞인 바람을 늘어놓았다.

그 순간 일리온이 몸을 조금 뒤척이며, 기다란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 아니 잠깐만. 일어나라고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일어나란 말은 아니었는데.

일리온은 시야가 흐릿한지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그걸 본 난 서둘러 침대 아래로 몸을 숨겼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일단은 숨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까 일어나라고 했던 말 취소할게. 빨리 다시 잠들어. 빨리!

침대 아래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데, 머리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하나.”

“…….”

“라벤느?”

아니, 내가 보여? 이렇게 완벽하게 숨었는데? 고개를 돌려 보니 미처 숨기지 못한 머리카락 몇 개가 침대 밖으로 삐져나가 있었다.

머리가 길어 봐야 쓸모가 없다니까, 정말.

할 수 없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밖으로 나온 나는 일리온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바, 바닥에 먼지가 왜 이렇게 많담. 하녀를 시켜 청소를 좀 하라고 해야겠어요.”

내 말에 일리온은 날 빤히 바라보더니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일어나자마자 보는 게 이런 모습이라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손을 뻗어 내 머리에 붙은 먼지를 떼어 주었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다친 덴 없는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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