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상석엔 클라우스뿐만 아니라 신분이 높은 귀족 서넛이 그 뒷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일리온도 거기 있다는 얘기였다.
하필이면 보는 눈은 왜 그리도 많은지. 결국, 도망도 못 치고 클라우스가 있는 상석에 다다랐다.
그래. 별거 아니야. 안에는 로라도 있다고 했으니 쟁반만 전달해 주고 오면 되는걸.
일리온이나 클라우스가 한낱 하녀에게 관심이나 가지겠어?
최대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상석의 입구를 통해 조용히 들어갔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그냥 이따 다시 오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아수라장에 난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리 봐도 내가 낄 자리는 아니었다.
“거기, 자네 의견은 어떠한가?”
“…….”
“방금 들어온, 그래. 자네 말이야.”
클라우스의 말에 상석에 있던 대여섯 명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저요?”
소리도 없이 들어왔는데 내가 온 건 대체 무슨 수로 안 거야? 눈이 뒤에 달리기라도 했나.
“이름이 뭐지?”
“카, 카나리아라고 하옵니다.”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물음에 답했다.
“그래, 카나리아. 이자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어떤 벌을 주면 좋겠나?”
무릎을 꿇고 있는 하녀와 바닥에 깨진 찻잔으로 상황은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걸 이제 막 들어온 나한테 물을 일이냐고!
하,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전 그저 당신께서 아끼시는 아르티아를 살리려고 한 것밖에 없단 말이에요.
일단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적당한 대답을 떠올리는데, 하필이면 하녀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아직 앳돼 보이는 아이는 릴리 또래로 보였다.
어쩌다가 다른 놈도 아니고 클라우스 앞에서 실수를…….
난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숙였다.
“죽을죄를 지었다면 죽음으로 다스리시는 게 옳다고 생각하옵니다, 폐하.”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뭐라 해도 그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을 테니까.
“의외의 대답이군.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 대답을 하지 않던데.”
클라우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날 바라보는 시선들이 여전히 따가웠다.
“하오나, 폐하. 오늘처럼 좋은 날 미천한 하녀의 피로 폐하의 손을 더럽히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 그녀를 죽여 달라고 말하려던 건 아니었다. 단지 클라우스의 기분을 맞춰 주려 한 것뿐.
혹시 알아? 기분이 좋아 내 부탁을 들어줄지.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군.”
다행히 내 말이 맘에 들었는지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날 대신해서 자네가 이 아이에게 벌을 주게.”
“……네?”
“죽음으로 다스리는 게 옳다 하였으니, 그에 맞는 벌을 주면 되겠군.”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얼어붙은 듯한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랬었지. 넌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이었지.
주제도 모르고 감히 그녀를 구해 보겠다고 나설 일이 아니었다.
***
클라우스는 즐거운 표정으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상석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클라우스는 어렴풋이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을 바꾸긴 했지만, 몸에 걸린 축복의 마법까지 숨길 수 없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엉뚱한 짓을 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안 그래도 지루한 차에 잘됐다 싶어 클라우스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기대와 다르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날 대신해서, 자네가 이 아이에게 벌을 주게.”
이렇게 말하면 과연 어떻게 나올까? 죄송하다고 빌까, 아니면 눈앞의 여자를 죽일까?
클라우스는 순전히 라벤느의 반응이 궁금했다. 하녀의 실수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제안이 아무래도 충격적이었는지 라벤느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제 뒤에 있는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검을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군. 죽이기를 택했군.’
바닥에 엎드려 비는 것보다는 맘에 드는 선택이었다.
“검이 무거워서 그런데, 좀 더 짧은 건 없을까요?”
병사가 허리에 찬 장검을 내밀자 라벤느는 단검으로 바꿔 달라 부탁했다.
이 정도 압박 속에서도 검의 길이마저 따질 정도라니.
원래도 운과 수완이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대담하기까지 했다.
검을 바꿔 온 라벤느는 이번엔 제 앞에 서 있는 하녀를 바라보며 요청했다.
“제가 좀 더 잘 찌를 수 있게 반듯하게 서 주시겠어요?”
“……네?”
고개를 든 하녀는 죽음을 직감했는지 온 얼굴이 눈물투성이였다.
힘이 빠진 하녀는 일어서려다 몇 번이고 주저앉았고, 라벤느는 잔인하게도 그런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폐하께 피가 튀면 안 되니, 이쯤이 좋겠네요.”
이 와중에 피 튀길 것까지 걱정하다니.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라벤느의 행동은 충분히 클라우스를 만족시켰다.
“절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원망하려거든 당시의 실수를 원망하시길.”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검을 찔렀다. 이내 선명한 붉은 피가 바닥을 적시며 하녀가 쓰러졌다.
“기사님, 죄인의 시체를 치워 주세요. 폐하께 이 꼴을 보여 드릴 순 없잖아요?”
라벤느는 쓰러진 하녀를 스커트로 살짝 가리며 몸을 돌렸다. 피로 적신 흰색 앞치마와는 다르게 그녀의 얼굴은 믿기 힘들 정도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상황이 정리되고, 뒤에 앉아 있던 귀족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었다.
한낱 하녀가 정말로 자신들 앞에서 사람을 죽일 거라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경악과 혐오가 가득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눈앞의 하녀는 태연했다.
방금 사람을 죽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폐하, 이런 차림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송구스러우니, 이만 물러갈 것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클라우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로라는 분노에 찬 얼굴로 회장을 나가는 카나리아를 쫓았다. 대타로 받은 하녀가 기어이 사고를 칠 줄이야.
그녀를 쫓아 급하게 와 보니, 린의 시체를 옮기고 있는 기사와 얘기 중이었다.
“그녀의 시체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저희의 수치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처리하게 해 주세요.”
“자네 혼자 이 아이를 들 수 있겠나?”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마침 하녀장님도 오고 계시니까.”
그렇게 말하며 카나리아는 뒤쫓아 오는 자신을 가리켰다.
“알겠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게.”
그렇게 말하며 기사는 시체를 카나리아에게 맡기고 발길을 돌려 상석으로 돌아갔다.
“로라 님 저 좀 도와…….”
짝.
로라는 그 뻔뻔한 얼굴에 따귀를 때렸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차갑기 그지없던 얼굴에 눈물이 고였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것처럼, 그 아이는 로라에게 소중한 동료였다. 몇 년이나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쉽게…….
“하, 하녀장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눈물을 쏟아 내는데, 죽었던 아이가 일어나더니 자신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때리지 마세요. 카나리아는 잘못이 없어요.”
“……린? 너 어떻게…….”
로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피가 흥건한데 어떻게 멀쩡하게……. 그녀는 핏자국을 따라 카나리아의 손을 바라보았다.
“너, 설마.”
“린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로라 님의 눈을 속였으니 폐하께서도 속으셨겠죠?”
빨갛게 부은 뺨으로 미소를 짓는 카나라이아의 손은 연신 떨리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이런 짓을 꾸미다니, 너도 정말…….”
로라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작은 성수 병 하나를 꺼냈다.
“이거 비쌀 텐데…….”
“네 뺨을 때린 대가라 생각하거라.”
언제 울었느냐는 듯 로라는 원래의 깐깐한 하녀장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곤 검상이 깊게 난 카나리아의 손등에 성수를 뿌렸다.
“로라 님, 린을 데리고 밖으로 빠져나가실 수 있으세요?”
“너는?”
“전 할 일이 남아서요.”
무슨 할 일이냐 물어보려다 로라는 아까 전 카나리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넌 대타로 오기로 한 하녀가 아니었구나.”
“이제야 믿어 주시네요.”
“……미안하다. 믿지 않아서. 그리고 오늘 일은 고맙다. 할 일이 끝나거든 서둘러 나가거라. 너도 눈에 띄어 좋을 건 없으니.”
아물어 가는 손등을 보며, 카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고 보니, 라벤느는 불참인가?”
클라우스는 알면서도 일리온을 향해 물었다.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일리온은 고개를 들어 클라우스 쪽을 바라보았다.
“네, 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습니다.”
“저런. 경도 걱정이 많겠어. 하나뿐인 약혼녀에게 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말이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일리온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를 가려는 걸까. 혹시 카나리아가 라벤느라는 걸 눈치챈 걸까.
뭐가 됐든 일리온의 행방이 궁금하긴 했다.
일리온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를 들고 나갔던 병사가 돌아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네. 아까 그 하녀들이 자신들이 처리하겠다고 해서요.”
“자기들이 처리하겠다고?”
“자신들의 수치는 자신들이 치우겠다고 하였습니다.”
클라우스는 턱을 괴고 방금 하녀가 쓰러졌던 바닥을 바라보았다.
핏자국은 이미 지워진 뒤였지만 아까의 일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을 찌른 것치곤 피가 좀 적었지.’
그녀의 행동엔 모두 그럴듯한 핑계와 이유가 있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뭔가 석연찮았다.
자신과 하녀를 일직선으로 놓고, 그 사이에 서서 자연스럽게 시야를 가렸던 것도, 보여 드리기 송구스럽다며 교묘하게 손과 검을 앞치마 뒤로 숨긴 것도…….
구태여 장검이 아닌 단검을 요청했던 것까지, 라벤느의 행동은 하나의 가설 아래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았다.
“그랬었군.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군.”
클라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 쪽으로 난 난간을 붙잡았다.
저 멀리서 흔하디흔한 갈색 머리의 소녀가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쫓는 검은 인영도.
속았다는 걸 알았지만 생각보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처음엔 자신을 보고 벌벌 떨더니, 이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속일 줄이야.
역시 공작의 옆에 두기엔 아까웠다.
클라우스는 사냥감을 발견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럼, 조금만 궁지로 몰아 볼까?”
궁지에 몰려 그대로 자멸할 것인지, 아니면 고양이를 물 건지. 그녀의 다음 행동이 몹시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