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말이 좋아 학술제지, 결국은 제국의 힘을 주변국에 과시하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엔 관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에, 행사는 커다란 원형 경기장에서 진행되었다.
경기장의 규모에 감탄하며 둘러보는데, 한쪽에서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저게 그 비를 내리는 기계인가요?”
자동차 한 대 정도 크기의 기계를 보며 무심코 묻자, 미카엘이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아직 아무 데도 공개하지 않은 물건인데요?”
“들, 들었거든요, 공작님한테.”
“그렇게 비밀을 지키라 말했건만, 결국 공작님 귀에 들어간 모양이군요.”
다행히 미카엘은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혹시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봐도 되나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미카엘을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난 안 된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갈 사람인걸.
역시 마법사들은 똑똑해서 좋다니까. 그의 뛰어난 학습 능력에 감탄하며 미카엘의 뒤를 졸졸 쫓았다.
“아, 미카엘. 자네 여기 있었군.”
막 경기장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데, 위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와 미카엘은 동시에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위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난 미카엘의 뒤에 슬쩍 숨으며 그가 고개를 숙일 때 대충 맞춰 고개를 숙였다.
“부탁할 게 있는데, 잠깐 괜찮나?”
“그게…… 지금 일행이 있어서요.”
미카엘은 곤란한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일리온의 시선이 미카엘을 지나 뒤에 있던 내게 꽂혔다.
미카엘의 도움으로 외모를 바꾸었지만, 혹시나 들킬까 봐 심장이 뛰었다.
이번에 들키면 외출 금지가 아니라 진짜 새장을 집 안에 마련해 줄 게 분명했다.
“그렇군. 옆에 계신 분은…….”
“이분은 그러니까…….”
미카엘은 도움을 요청하듯 날 바라보았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냐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거짓말에 서툴러 보이기에 난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연인인 카나리아라고 합니다. 늘 말로만 듣던 공작님을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아, 그랬군.”
일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돌아갔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찾아와 달라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고.
그렇게 돌아가는 일리온을 보며 미카엘이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아가씨……. 방금 그 거짓말은.”
“미카엘. 앞으론 저를 카나리아로 불러 주세요.”
“……네?”
“그럼 내려가 볼까요?”
걱정이 앞서는 미카엘과 다르게, 난 일리온과 만남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공작님께서 알게 되시면 전 목이 날아갈 겁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공작님께선 미카엘의 연인 같은 거 궁금해하지 않을 거니까.”
그 부분은 내 말을 믿어도 좋았다. 일리온은 필요하지 않은 이상 타인에게 무관심하니까. 성녀의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말이다.
아래로 내려온 난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기계를 둘러보았다.
“이게 정말 비를 내리게 해 주는 거예요?”
“네. 아직은 시연 제품이라 비를 뿌릴 수 있는 범위가 좁긴 하지만요.”
아무리 좁은 지역이라 할지라도 대단한 마법이었다. 감탄하자면 끝도 없이 입만 열고 있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며 미카엘에게 물었다.
“저기, 이쪽에 나사가 좀 덜 조여진 것 같지 않아요?”
한쪽에 나사가 살짝 풀려 있는 걸 가리키자 미카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잘 좀 하라고 했더니 이런 실수를. 하마터면 또 제가 혼날 뻔했네요.”
그렇게 말하며 미카엘은 사람을 시켜 나사를 조이게 했다.
고작 나사 하나였지만, 이걸로 아르티아가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기적인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저택 사람들이 평화롭기 위해서는 일리온이 평화로워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결국 아르티아가 필요했다.
그러니 일리온과 아르티아가 이어지는 일만큼이나, 아르티아의 안위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걸 일리온이 알아줬으면 좋으련만.
“아, 미카엘! 여기 있었군.”
다시 한번 나사가 제대로 조여졌는지 확인하는데 이번엔 드미트리가 허겁지겁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한참 찾았네. 이쪽이 아까 말했던 친구인가?”
“아, 이쪽은.”
“이름이 뭐지? 아니지, 통성명할 시간이 어딨어. 자네, 일단 빨리 좀 따라오게.”
“……네?”
난 멀뚱히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아, 가만히 있지 말고, 어서 따라와.”
그는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얼떨결에 그를 따라가며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미, 미카엘 경?”
“아니, 저기 드미트리 님. 그분은…….”
그러나 미카엘의 소심한 외침은 그대로 뭉개지고, 난 어느새 하녀들 틈바구니에 서 있었다.
“로라, 사람을 데리고 왔네!”
갑작스러운 순간이동에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깐깐해 보이는 여자가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 드미트리 님. 정말 데리고 오셨네요.”
“그대의 부탁인데, 내 한달음에 데리고 와야 하지 않겠는가.”
드미트리는 볼을 붉히며 로라를 바라보았다.
“괜히 저희 때문에 고생하셔서 어떡하죠?”
“고마우면 다음에 차라도…….”
“차라면 황성에 돌아가서 얼마든지 내드릴게요. 드미트리 님은 홍차를 좋아하셨죠?”
드미트리의 말을 재빨리 자르며 로라가 덧붙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이만 나가 봐 주시겠어요? 하녀들을 교육해야 해서 정신이 없네요.”
“…….”
로라의 부탁에 드미트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맛을 다시고는 날 내버려 둔 채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 저기 드미트리 님…….”
돌아가는 그를 서둘러 잡아 보려 했지만, 로라의 질문이 좀 더 빨랐다.
“이름이 뭐지?”
“네?”
“자네 이름 말이야.”
조금 전까지 드미트리에게 보여 주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그녀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카, 카나리아인데요.”
“그래, 카나리아. 얘기는 미리 들었을 테니 어서 옷부터 갈아입게.”
그녀는 내게 하녀 복을 건넸다.
“……아, 저기…….”
얼떨결에 옷을 받은 나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된 채로 로라를 바라보았다.
“자자, 빨리 움직여. 오늘 할 일이 많으니까.”
그러나 로라는 이미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하녀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벨라, 줄리는 서쪽의 VIP석으로 가. 그리고 올리, 네가 맡은 구역엔 햇빛을 싫어하는 영애가 계시니까 양산을 챙겨 가도록 해.”
한참을 정신없이 하녀들에게 지시하던 로라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자넨 뭐 하나? 어서 옷 안 갈아입고.”
“아니, 그게…….”
“대타로 왔다고 농땡이 부릴 생각 말고 어서 갈아입고 나와. 자네는 동쪽 구역을 맡을 테니까.”
날카롭게 울리는 그녀의 말에 난 한마디 대꾸도 못 해 보고 얼떨결에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이거, 지금 날 일꾼으로 오해하는 것 같은데, 맞나?
오해라면 풀어야지. 그럼 그럼. 난 다시금 로라에게 내가 일꾼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린, 너 자꾸 꾸물댈래? 어서 나가지 못해?”
그리고 호랑이처럼 화가 난 그녀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살다 보면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내가 로라를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일리온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그래. 굳이 힘들게 호랑이를 설득해서 여길 나갈 필요는 없지.
그녀의 눈을 피해 도망갈 방법 하나쯤 없겠냐며, 일단은 그녀의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하녀복으로 갈아입은 난 천천히 원형 경기장의 동쪽 구역으로 향했다.
“하, 진짜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카나리아!”
“네, 넵!”
날카롭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움찔하며 대답했다.
“잡담하지 말게. 걸음걸이는 똑바로 하고. 황실에서 일해 본 경력자라던데,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못 배웠나?”
나직이 혼잣말을 내뱉었을 뿐인데 그새 내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야 못 배웠죠. 황실에서 일해 본 적이 없는데.
한시라도 빨리 로라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그녀의 감시는 견고했다.
덕분에 난 여전히 하녀 신세였고.
“저, 로라 님. 사실 전 오늘 일하러 온 게 아니라.”
“아니라?”
그녀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내 말을 되물었다.
“사실 드미트리 님의 오해로…….”
“일하기 싫다는 소리를 쓸데없이 늘리는군. 자네는 돌아가서 설교를 들을 줄 알게.”
혹여 그녀를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하찮은 시도는 보기 좋게 묵살되었다.
이제 정녕 믿을 건 미카엘뿐이란 말인가? 얘는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부탁이니까 빨리 와서 날 구해 줘!
내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미카엘은 나타나지 않았다.
바람과는 다르게 행사는 시작되었고, 이름도 못 외우는 귀족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녀들은 그들을 자리로 안내하고 시중을 들기 위해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난 그 사이에서 귀족들의 이름과 자리를 외우지 못해 애꿎은 종이 쪼가리만 부여잡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로라는 날 뒤쪽으로 빼 버렸다. 가서 심부름이나 하라는 의미로.
역시 사람은 일을 못하고 봐야 한다. 너무 잘하면 피곤해.
이건 절대 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야. 일부러 못하는 척하는 거야, 일부러!
“카나리아, 여기.”
같이 일하는 동료가 다과가 담긴 쟁반을 건넸다.
“이번엔 어디로 가는 건데?”
이 일도 한 시간가량 했다고 벌써 익숙해지고 있었다. 태생부터 서민이었으니 일하는 게 익숙하다지만, 어쩌자고 아직 이러고 있는지.
그래 이것만 하고 도망치자.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폐하께서 계신 상석에서 요청한 거야.”
“…….”
아니, 마지막 심부름이라고 했지, 이 심부름을 인생의 마지막으로 장식하고 싶다는 얘긴 아니었는데? 왜 하필 클라우스가 있는 쪽이야?
“미안한데, 다른 데 심부름을 하면 안 될까?”
“다들 바쁜 거 안 보여? 농땡이 부릴 시간 없어. 빨리 다녀와.”
내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호하게 쟁반을 쥐여 주었다.
이거 그냥 던지고 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