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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73)화 (73/159)

73화

일리온은 방금 올라온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광산에 폭탄을 설치했던 버트라는 자의 신상이었다.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 연고가 없는 떠돌이로 이런저런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던 평범한 자였을 뿐.

자신을 습격할 계획을 세울 만한 인물도, 그럴 이유도 없는 자였다.

“아가씨께서 많이 실망하시는 것 같던데…….”

세바스찬은 저녁 먹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일리온에게 말을 꺼냈다.

일리온은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눈가를 문질렀다. 조금 지친 듯한 얼굴이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버트의 행적이 여전히 모호한 상황이었다.

그가 노리는 게 라벤느가 아닌 자신이라면 더더욱 동행해선 안 됐다. 안 그래도 그녀는 사건 사고에 잘 휘말리는 타입 같으니까.

하지만 실망하며 울상을 짓던 얼굴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공작가에 억지로 팔려 온 것도 모자라 한 줌도 안 되던 자유마저 빼앗겼으니.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정말로 새장에 갇힌 새나 다름없었다.

그냥 넘어갈까 하던 일리온은 세바스찬을 보며 말했다.

“당분간 바라는 건 뭐든 들어주도록 하게. 밖에 나가고 싶다는 것만 제외하고.”

그걸로 기분이 좀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

그렇게 당하고도 일리온은 아직 날 몰랐다.

포기라니! 내가 포기를 아는 인간이었다면 진작에 포기하고 죽을 날만 세고 있었겠지.

학술제 아침,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누구보다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릴리를 기다렸다.

“어머, 아가씨. 일찍 일어나셨네요.”

마침 날 깨우기 위해 들어오던 릴리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야, 릴리.”

“늦잠을 주무실 줄 알았는데.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날 깨우는 수고가 줄었기 때문인지 릴리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공작님은 출발하셨어?”

“네. 가 볼 데가 있으시다며 조금 일찍 출발하셨대요.”

“그래? 잘됐네. 그럼 준비하는 것 좀 도와줄래?”

“무슨 준비요?”

릴리는 내 부탁에 벌써부터 불안한 모양이었다. 준비라는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그야 물론 학술제에 갈 준비지.”

“아가씨,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 아직 외출 금지이신 거 아시죠?”

“물론 알고 있지.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일리온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텔레포트를 하지 말라고는 안 했는걸?”

“네?”

내 완벽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 릴리가 얼이 빠져 되물었다.

“어쨌든 공작님 눈에 띄면 안 되니까, 최대한 수수하게 부탁할게. 아, 이왕이면 마법도 걸어 달라고 해야겠다.”

“아가씨, 오늘은 제발 그냥 집에 계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말하는 릴리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뚝뚝 묻어났다. 하지만 나 역시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술제에 가야만 했으니까.

걱정 어린 그녀의 충고를 무시하며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서랍 깊은 곳에 넣어 두었던 목걸이를 꺼냈다.

한참을 서랍 안에 처박혀 있던 목걸이는 자신이 쓰일 때를 기다렸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마법사들은 선견지명이 뛰어나다니까. 이래서 마법사 하나 봐.”

릴리는 이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자리에 앉은 내 머리를 빗었다.

“아가씨, 제가 잘리거든 부디 전 아가씨를 말리려 했다고 공작님께 꼭 말씀해 주세요.”

“걱정 마. 괜찮다니까.”

“퇴직금도 넉넉히 챙겨 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어요.”

릴리도 참, 걱정이 많다니까.

“어서 오세요. 미카엘 경.”

내 호출에 부리나케 달려온 미카엘은 방 안에 있는 날 보고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여긴…….”

“제 방이죠.”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끝을 맺어 주었다.

“혹시 어떤 급한 일로 절 부르셨나요.”

미카엘은 내 손에 쥐어진 아티팩트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지난번 황성에 갔을 때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 달라며 그에게 건네받은 물건이었다.

“네. 급한 일이죠. 아주.”

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학술제에 가야 하거든요.”

“그것 때문에 절 부르셨다고요?”

위급할 때 호출하라고 준 아티팩트로 불러내 한다는 말이 고작 그런 거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지금 어디 있겠어요?”

“공작님과 함께 가시면 되잖아요.”

“마침 일정이 안 맞아서요.”

“다른 마차가 있으실 텐데요.”

이 커다란 공작저에 설마 마차가 한 대뿐이란 소릴 하는 건 아니겠지? 라는 표정이었다.

설사 한 대뿐이더라 할지라도 황궁에서 일하는 마법사를 이렇게 오라 가라 해도 되냐는 억울함도 조금 보였다.

“그게 말이죠. 공작님께는 비밀로 해야 하거든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일리온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미카엘은 더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어머, 어딜 가세요, 미카엘 경.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죠.”

“공작님께서 아시면 난리가 날 거라고요. 나중에 뒤집어쓰기 싫습니다.”

참으로 단호한 거절이었다. 일리온에게 시달리느라 그도 고생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나도 나대로 절박했으니까.

완고한 그를 달래기 위해 난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

“미카엘 경, 잘 생각해 보세요.”

“뭐, 뭘요?”

미카엘은 내 미소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는 게 나을까요, 모르고 계시는 게 나을까요? 어차피 찾는 건 미카엘 경이 될 테니 선택하세요.”

“그게 무슨…….”

미카엘은 무슨 말도 안 되는 협박이냐는 듯 울상을 지었다. 어머, 왜 그리 표정이 안 좋을까?

하해와 같은 아량을 베풀어 이렇게 선택권을 주고 있잖아. 빨리 골라.

울상을 짓는 미카엘이 남 같지 않은 모양인지, 릴리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수고 많으십니다. 미카엘 님.”

***

일리온은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자신이 감옥에 집어넣은 사교도의 교주, 베르텔이었다.

며칠 새 움푹 파인 눈가를 보아하니 감옥에서 꽤나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게.”

“……하지만.”

일리온은 병사를 바라보았다. 눈치를 살피던 병사는 고개를 숙이고 문밖으로 나갔다. 한 칸짜리 작은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묻고 싶은 게 있네.”

침묵을 깨고 일리온이 입을 열었다.

“마녀를 잡았을 때의 일을 듣고 싶네.”

“마녀 말씀입니까?”

당시 셀바스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화재로 죽었기 때문에 남은 정보는 미미했다. 그나마 단서라고는 눈앞의 노인뿐일 정도로.

“그걸 말씀드리면, 절 여기서 풀어 주실 겁니까?”

아직 삶의 희망이 남았다고 여기는지 다 죽어 가던 눈에 생기가 깃들었다.

“그건 자네의 대답 여하에 달렸네.”

일리온은 맘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교주는 그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정확히 27년 전의 일입니다. 그 마녀가 마을을 찾아온 게.”

베르텔은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자가 영지에 터를 잡은 후부터 마을에 이상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둘 쓰러져 가고, 마을은 기근까지 겹쳐 더욱 살기 힘들었죠.”

이야기는 일리온이 알고 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교주는 자신이 당시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어필하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밤낮없이 노력한 끝에 마침내 그녀가 키우고 있는 풀이 전염병의 원인이라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자를…….”

“네. 영지민을 위해 마녀를 처단하기로 한 겁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병사들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되더군요. 그래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누구에게?”

“선대 셀레스타인 공작님께요.”

의외의 인물이 베르텔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실은 공작님께서 선뜻 도와주겠다고 하실 줄 몰랐습니다. 기사단을 빌려주는 것도 모자라 직접 영지까지 찾아오셨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베르텔은 선대 공작과의 친분을 은연중에 과시했다.

“직접 찾아갔다고?”

“네. 아마 공작님께서도 알고 계셨겠죠. 영지민을 향한 제 노력을.”

코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였지만, 일리온은 교주가 혼자 떠들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이후는 별 내용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마녀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자신과 선대 공작 사이가 얼마나 각별한지.

그러니 그때의 인연을 이렇게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겠냐는 말들이었다.

일리온은 그의 말을 적당히 자르며 물었다.

“마녀는 어떻게 죽었지?”

“그거야 물론, 제 검으로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죠.”

“그대가?”

일리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베르텔을 바라보았다. 혼자서 상대가 안 된다며 셀레스타인가에 도움을 요청해 놓고, 자신의 검으로 찔러 죽였다니.

“무, 물론이죠.”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 감옥에서 지내는 게 적성에 맞는 모양이야.”

자신의 말에 베르텔은 눈치를 살피더니 곧바로 잘못을 시인했다.

“그, 그게, 사실 공작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직접 본 건가?”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저도 말로만 들었습니다. 당시 공작님께서는 주변에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기사단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결국,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건가.

일리온은 더 이상 그에게 들을 만한 대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마녀에게 아이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있나?”

“아이요? 글쎄요. 그런 얘기는……. 설사 있다고 해도 살아 있겠습니까? 마녀의 자식인데. 그때 다 죽었겠지요.”

베르텔은 살살 웃으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공작님, 제가 아는 건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렇군. 더 들을 이야기는 없는 것 같군.”

일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저기, 공작님. 얘기하면 여기서 나가게 해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공작님, 잠깐만요. 공작님, 공작님!”

베르텔의 간절한 목소리를 묵살하며, 일리온은 면회실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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