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타이밍 진짜…….
평소엔 내가 무엇을 하든 별 관심 없으면서 이럴 때만 모습을 드러내 사람을 곤란하게 했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어쩌다 보니 반성문이 아닌 일기장이 되어 버린 종이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외출 금지는 너무한 거 아닌가? 내가 청소년도 아니고 외출 금지라니?
사과를 하려다가도 울컥하는 마음에 난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표현이 지나친 건 알겠지만 전 정말로 외출 금지까지 당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
“저택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니, 공작님께서는 절 새장에 가두고 싶으신 건가요?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렇군.”
일리온은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제 그만 풀어 주려는 건가?
기대 어린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네?”
“그러고 보니 그대가 그랬지. 아기 새라고 불러 달라고. 이 기회에 그대가 원하는 대로 돼 보는 건 어떤가, 아기 새?”
잠깐의 희망은 날갯짓도 해 보지 못한 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결론이 왜 그렇게 돼? 게다가 아기 새라니! 지금껏 그렇게 기겁을 했으면서 이제 와서?
팔뚝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닌데요.”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네. 그대는 아기 새가 되길 원하니 이번 기회에 꽤 튼튼한 새장을 마련해 주지.”
내가 불러 달랬지 언제 새장에 가둬 달랬냐고.
“하하. 무슨 그런 농담을…….”
“농담으로 들리나?”
어색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을 흘리는데 일리온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새는 밖에 풀어놓고 키우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합니다.”
“밖에 풀어놓으면 도망가 버리지 않나.”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그건, 그 새가 주인을 좋아하니까?”
난 애써 웃으며 답했다.
“정말 말 하나는 잘하는군.”
일리온의 표정은 아까보다 조금 더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안 돼.”
기대와는 다르게 단호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
기약 없는 외출 금지는 계속되고 있었다.
내 부질없는 노력도 현재 진행 중이었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도 아니고, 노력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성과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리온을 찾아가기 위해 복도를 걷는데, 마침 세바스찬이 꾸러미를 한 아름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게 다 뭐예요?”
“아, 주인님께 온 선물들입니다.”
세바스찬은 꾸러미를 슬쩍 보여 주며 말했다.
“무슨 날이에요? 원래는 이렇게 많이 오지 않잖아요.”
선물이야 평소에도 종종 들어오긴 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양이었다.
“곧 주인님께서 공작 작위를 받으신 지 7주년 되는 날이거든요.”
“그런 것도 기념해요?”
말만 갖다 붙이면 365일이 다 기념일이겠지만, 정말 별걸 다 챙긴다 싶어 물었다. 그렇게도 연줄 대고 싶은 사람이 많은가?
“주인님께서는 따로 생일을 기념하시지 않기 때문에, 대신 작위 수여 일을 기념해 주는 모양입니다. 매년 돌려보내도 끊이질 않네요. 이젠 연례행사가 되어 버렸죠.”
“왜 생일을 안 챙기는데요?”
내 질문에 세바스찬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주인님의 생일을 아무도 몰라서요.”
일리온이 저택에 들어온 시기를 감안하면 말이 안 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설마 선대 공작도 모르고 있었나?
손자한테 너무한걸.
“그럼…… 생일 파티를 한 번도 안 한 거예요?”
“……그렇죠.”
파티라…….
난 쌓여 있는 선물 꾸러미를 잠시 바라보다 손뼉을 쳤다.
“그럼, 말 나온 김에 파티를 하죠.”
“네?”
“작위 수여 기념일이라고 했죠? 초대장부터 써 볼까요?”
해맑게 웃으며 제안하자, 세바스찬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께서 그리 달가워하시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일리온이라면 확실히 싫어할 테였다. 생일도 아니고, 작위 수여를 기념하는 기념 파티라니.
누가 봐도 유난이란 말이 나올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 의미가 있는 일 아니겠어?
외출 금지를 당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사람을 안으로 부르면 될 일이었다.
“기쁜 일은 나눌수록 커지는 법이죠. 아 참, 공작님을 깜짝 놀라게 해 드리고 싶으니, 비밀로 부탁드려요.”
다행히 세바스찬은 날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 여기는 듯했다.
덕분에 일리온을 찾아갈 이유가 사라진 난 서둘러 발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흠, 흠, 흠-.”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콧노래를 부르는 날 보며 릴리가 좋은 일 있냐 물었다.
외출 금지 때문에 며칠간 죽을상을 하고 있었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파티를 열 거거든.”
“파티?”
스피넬이 과자를 오독이며 물었다.
그녀는 요즘 심심하면 내 방에 놀러 와 과자를 먹으며 놀고 있었다.
“네. 손님 목록을 작성 중인데 쉽지 않네요.”
스피넬의 말에 대답하며 종이에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파티가 무엇이냐?”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하는 거예요. 노래를 연주하고, 술과 음식을 먹는 거죠.”
“재밌어 보이는구나.”
내 설명이 맘에 든 모양인지 스피넬이 관심을 보였다. 그런 스피넬과 다르게 릴리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가씨, 이제 결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좀 더 그쪽에 신경을 쓰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 그래서 문제야.”
“네. 그러니까…….”
“안 그래도 할 것도 많은데, 결혼식 때문에 시간이 없다니까.”
내 대답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릴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결혼식보다 중요한 게 뭔데요?”
“파…….”
“파?”
아무 생각 없이 파혼이라 말하려다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파, 파티지, 파티. 파티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파티라뇨. 드레스 맞추셔야 하고, 결혼식에 장식할 꽃과 음식도 보셔야 하고, 리허설도 해 보셔야 하는데요.”
“리허설까지 있어? 그건 좀…….”
아니, 무슨 결혼식이 공연도 아니고 쓸데없이 리허설까지 하는 거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보는데 릴리야말로 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뭐, 드레스는 보면 되고, 꽃이랑 음식은 세바스찬이 잘 골라 주겠지. 리허설이야 뭐…….”
그때까지 내가 이 저택에 남아 있을 리 없는걸.
릴리의 걱정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난 다시 초대 명단 작성에 열을 올렸다.
“이렇게 남 일처럼 말씀하시다니. 누가 보면 세바스찬 님께서 결혼하시는 줄 알겠어요.”
“음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아가씨…….”
적당히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는 날 잠깐 부르더니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아 참, 릴리, 학술제 때 입고 갈 옷은 준비됐어?”
곧 개최될 마법학회의 학술제가 떠올라 릴리에게 물었다.
“웨딩드레스보다 그게 더 걱정되세요?”
“그야, 그게 더 급한걸?”
마법이라는 요소만으로도 꽤나 흥미로운 행사이긴 했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학술제는 아르티아와 일리온 사이에서 꽤나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도구를 시연하는 자리에서 기기의 결함으로 하늘로 날아가야 할 마법이 아르티아를 향하게 된다.
다행히 일리온이 아르티아를 구해 주었고, 두 사람이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는 사건이었다.
그 자리에서 라벤느의 등장이 필요하냐면, 물론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미적지근한 일리온의 반응이었다. 일전에 지나가듯이 성녀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그게 중요한 거냐며 되물을 정돈데, 말 다 했지.
당연히 중요하지! 그게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하냐고!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의 이름인데!
“하지만, 공작님께서 당분간 아가씨는 외출 금지라고…….”
내 기대를 깨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릴리가 조심스레 외출 금지 얘기를 꺼냈다.
“설마. 학술제까지 가지 말라고 하시겠어?”
아무리 외출 금지라도 말이야.
***
“학술제에 입고 갈 옷?”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은근슬쩍 그에게 학술제 이야기로 운을 띄웠다.
“네. 공식적인 행사이니 옷을 맞추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그거라면 고민할 거 없네.”
혹시 미리 맞춰 뒀나? 세바스찬은 그런 얘기 없던데? 궁금한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는 가볍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대는 안 갈 거니까.”
하긴, 그러면 고민할 필요가 없긴 하지.
하마터면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난 다급히 그에게 되물었다.
“왜요?”
“말하지 않았나. 외출 금지라고.”
“하지만…….”
“하지만?”
일리온이 내 말을 반복하며 물었다. 반박하고 싶으면 해 보라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러면 네가 아르티아를 제대로 지키는지 감시할 수 없잖아!’라고 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마음을 진정하고 차분히 이유를 설명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이가 안 좋다고?”
“걱정할 거 없네. 그대는 당분간 아플 예정이니까.”
“…….”
그렇게 아프다고 할 때는 안 믿어 주더니!
이거 나한테 싸움 거는 거 같은데, 맞나? 저번에 그 반성문이 맘에 안 들었던 거 맞지?
“하지만 일 년에 한 번뿐인 행사인 걸요, 그러니…….”
“라벤느.”
내 반박에 일리온은 굳은 얼굴로 내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내가 무슨 이유를 들먹이든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더 이상 그를 설득하는 건 소용이 없을 듯했다. 난 체념한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번 일은 포기할게요.”
일단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