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71)화 (71/159)

71화

일리온은 굳은 표정으로 집무실에 들어온 날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길래, 오늘은 몸을 사리려고 했는데…….

“케이크만 먹고 오겠다며?”

“물론 먹었답니다.”

“성물은 왜 가져갔나?”

“무, 무슨 말씀이신지…….”

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대가 물건을 가져가는 걸 병사가 봤다던데?”

정말, 의리 없게 고대로 일러바친 거야?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스피넬 님의 마력이 안 돌아온다길래, 혹시 신전에 가져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거짓말로 둘러댈 일은 아닌 듯해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정도로 일리온에 혼날 것 같지 않다는 오랜 기간 쌓아 온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내 생각대로 일리온은 한숨을 쉬긴 했지만, 더 이상 그 일을 캐묻지는 않았다.

“폐하와는 왜 같이 온 건가.”

“그, 그건 제 잘못 아니에요!”

“아직 그대 잘못이라고 안 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거네.”

맨날 사고만 치고 다니다 보니…… 자동으로 변명이 튀어나왔다.

난 다시 한번 세바스찬에게 해 준 이야기를 고스란히 일리온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니 내가 위험한 곳은 가지 말라 하지 않았나.”

“신전 앞이 위험하면 안 위험한 곳이 대체 어디…….”

“라벤느!”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일리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잘못한 어린애를 혼내는 선생님 같은 모습이었다.

“네. 안 갈게요.”

“하아. 말로는 안 되겠군.”

“네?”

그럼 뭘 어쩌겠다는 거지?”

“그대는 당분간 외출 금지야.”

“……네?”

“약속을 어길 땐,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걸 알아야지.”

“하지만…….”

외출 금지라니! 내가 10대 청소년도 아니고! 외출 금지라니?

“풀어 주길 바란다면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도록 해. 그럼 다시 생각해 볼 테니.”

일리온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대화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자, 잠깐만요.”

나가려는 그를 황급히 붙잡았다.

“공작님, 생각해 보니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아니, 잘못했어요.”

“뭐……?”

“다 제가 모자라 일어난 일입니다. 제 불찰이에요.”

일어나려던 일리온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뭘 잘못했는데?”

“흠흠, 그러니까…… 공작님 몰래 성물을 갖고 나간 거?”

“…….”

일리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케이크만 먹겠다고 하고 딴 길로 샌 거도…….”

서둘러 내 잘못을 추가했다. 그러나 그 대답도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단단하게 꼬아진 팔짱은 펴질 기미가 안 보였다.

“주제넘게 황제 폐하의 도움을 받은…… 거? 근데 그건 사실 제가 도와달라고 한 건 아닌데.”

마지막 건 조금 자신이 없긴 했지만 일리온 눈치를 보며 한마디 더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일리온이 원하는 정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맞히는 놀이라도 하나? 이럴 거면 종이에 목록이라도 써 오지 그래? 점수를 매겨 줄 테니.”

“정말 써 오면 용서해 주실 거예요?”

내 눈치 없는 질문에 일리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수업이 모두 끝난 후 짐을 정리하는 가정 교사인 제나를 보며 물었다.

“저, 선생님. 진심 어린 반성은 어떻게 하나요.”

“네?”

제나는 갑자기 웬 반성이냐며 되물었다.

“뭘 그리 잘못하셨는데요?”

“음…….”

잘못이라.

사실 일리온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벌써 일주일 가까이 외출 금지에 시달렸지만, 일리온은 여전히 철회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전처럼 일리온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주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그의 미움을 받고자 한 일도 아니었다.

사실 나야말로 그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걸 잘 모르겠어요.”

“그걸 먼저 알아야 반성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걸 모르니까 이러지.

“그냥 제 반성이 진심으로 보였으면 좋겠는데요.”

보여 주기에만 급급해하는 건 옳지 못하다는 걸 알지만 상관없었다.

일단은 당장 일리온을 달래야 했으니까. 그래야 철창 없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뻔뻔한 내 대답에 제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만약 말로 진심을 표현하는 게 어렵다면, 글로 전달해 보는 건 어떠세요?”

“글이요?”

반성문을 말하는 건가?

“때로는 말보다 글에서 진심이 묻어나기도 하잖아요.”

반성문이라…….

친구랑 싸우고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쓴 편지를 마지막으로 반성문을 써 본 기억이 없었다.

제나가 돌아가고 홀로 서재에 남은 난 한참을 고민하다 펜을 들어 올렸다.

***

황성에 다녀오는 날은 언제나 피곤했다. 잔뜩 날카로워진 신경은 좀처럼 누그러질 줄 몰랐다.

클라우스도 클라우스지만, 최근 들어 아르티아가 유독 제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녀를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상대하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녀가 잘못이 있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비밀이 타인에게 까발려지는 기분이 불쾌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스피넬의 말 때문에 심란한 요즘, 하루하루가 유독 길게만 느껴졌다.

“라벤느는?”

저택에 도착한 일리온은 버릇처럼 라벤느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요즘 일리온의 일상에서 가장 큰 문제였고 숙제였다.

하루가 유독 길다고 느껴지는 이유의 8할은 그녀 때문일 것이다.

“서재에 계십니다.”

“서재? 수업 끝날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할 일이 남았다고 하시던데요.”

“무슨 할 일이 남았길래…….”

매일같이 자신을 찾아와서 유독 친절하게 굴던 라벤느였다.

외출하고 돌아올 때는 누구보다 먼저 문 앞에서 강아지처럼 기다리며 제 눈치를 보곤 했다.

그녀가 뭘 원해서 그러는지 눈치는 채고 있지만, 성격이 썩 좋지 못한 그는 외출 금지를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오늘따라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공부를 하시는 것 같긴 하던데…….”

“그럴 리가.”

세바스찬의 대답에 일리온은 그럴 리 없다며 부정했다. 공부라면 죽을상을 하며 싫어하는 걸 아는데…….

라벤느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일리온이었고, 세바스찬 역시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일리온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서재 쪽으로 옮겼다.

서재는 조용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라벤느는 이미 나가고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순간, 책상에 엎드려 자는 인영 하나가 보였다.

‘……역시나.’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 공부 때문은 아니었다.

일리온은 발소리를 죽이고 가까이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는 종이와 펜이 널브러져 있었다.

종이엔 무언가를 쓴 것 같은, 읽기 힘든 글이 적혀 있었다.

일리온은 종이를 들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친애하는 공작님께.

조용히 케이크만 먹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마음대로 교단의 물건을 가져가 죄송합니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제 잘못이었습니다.

제 안일함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맺은 온점은 종이가 번질 정도로 동그랗고 커다랬다. 점을 찍고 나서 펜이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문 듯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데 그게 다 내 잘못은 아니지 않나요? 내가 신이야? 사이비 교단에서 칼 들고 덤빌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 자리에 황제가 찾아올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케이크 먹다가 갑자기 다른 데로 셀 수도 있는 거지, 그걸 다 내 잘못이라 하면서 외출 금지를 내리는 건 횡포라고!]

그나마 읽을 만했던 앞선 문장들과는 달리, 뒤 문장부터는 필체가 읽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군데군데 글자를 지운 흔적도 많았고.

그리고 마지막엔 알아보기 힘든 작은 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동그라미 양쪽으로 세모 모양의 뿔이 그려져 있고, 그 안으로 사선 두 개가 삐죽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솟아오른 모양새였다.

‘……뭘 그린 거지?’

얼핏 사람 얼굴같이 생긴 낙서를 보며 일리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친애하는 공작님께라고 시작했던 편지는 끝내 횡포라며 자신을 탓하는 문장으로 끝이 나 있었다.

‘정원도 못 나갈 정도로 외출 금지를 한 건 지나친 처사라 생각하지만…….”

햇살을 내리쬐며 차를 마시는 걸 좋아하던 라벤느에게 그 즐거움을 뺏어 버린 건 원망을 받아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횡포라고 욕을 먹는다고 해도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라벤느는 좀 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최소한 뭘 잘못한 것인지는 깨달아야 했다.

이렇게 자신에게 보여 주기 위한 반성이 아니라…….

“……배고파.”

라벤느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몽롱한 두 눈동자가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 기지개를 켰다.

“밥 먹을 시간 아직 안 됐나…….”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돌리던 얼굴이 못 볼 거라도 본 듯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연신 눈을 깜박였다.

“……어,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

노을빛을 받아, 평소보다 좀 더 색이 옅어진 눈동자가 제 손을 바라보더니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손에 들고 계신 건 뭘까요?”

“책상 위에 있던 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잽싸게 손이 뻗어 왔다. 일리온은 종이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그녀의 손을 피했다.

“나, 남의 글을 멋대로 읽다니. 예의가 없으시네요.”

“친애하는 공작님께……라고 적혀 있길래, 내게 쓴 글인 줄 알았는데.”

“…….”

“그게 아니면, 그대가 친애하는 다른 공작이라도 있는 건가?”

일리온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언제나 공작님뿐인걸요?”

공작님뿐이라는 달콤한 말과는 다르게 라벤느의 눈은 집요하게 종이에 향해 있었다.

그리곤 다시 한번 방심한 틈을 노리고 손을 뻗었다.

어림도 없었지만.

라벤느를 가볍게 피한 일리온은 보란 듯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노력은 가상하나, 악필인 건 둘째치고, 안타깝게도 엊그제 내게 했던 변명에서 전혀 나아지지 않았군.”

“전 진심을 담아 반성을…….”

“그게 다 내 잘못은 아니지 않나요? 내가 신이야? 사이비 교단에서 칼 들고 덤빌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라고 여기 적혀져 있는데?”

그걸 또 친절하게 읽어 주는 일리온이었다.

“그보다 여기 이 마지막 단어는 뭔가? 횡……표? 황포?”

“…….”

라벤느는 입을 다물었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쓴 건 반성문이 아니라 도전장이었던 모양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