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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69)화 (69/159)

69화

“앗! 그때 그 아줌마!”

“…….”

어디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아줌마란 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정말로 지는 것이기에 가볍게 무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줌마, 어디 가요? 내 목소리 들었잖아요?”

“…….”

와락 구겨진 미간을 억지로 펴며 뒤를 돌아보았다.

“호호호. 안녕. 앨리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에요.”

앨리스가 씩 웃었다.

그녀의 옆으로 처음 보는 소년이 서 있었다. 눈부신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은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외모였다. 그가 입고 있는 낡은 옷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그런 그가 앨리스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앨리스 님, 이분은…….”

“왜?”

곤란한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앨리스와 다르게 금발 머리의 사내는 날 알아보는 눈치였다. 난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어머, 앨리스. 이쪽이 안톤이야?”

“어, 어떻게 알았어요? 이번에도 삶의 지혜예요?”

앨리스가 화들짝 놀랐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난 팔짱을 끼며 오랜만에 그녀 앞에서 허세를 부려 보았다.

“그보다, 안톤이랑 데이트 중인 거야?”

앨리스를 놀리려 귀에 작게 속삭이자 그녀의 통통한 양 볼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잠깐 심부름 나온 거뿐이에요.”

앨리스는 괜히 툴툴거리며 부정했다.

“아줌마는 성녀님 구경하러 온 거예요?”

“뭐, 카페도 가고 바람도 쐴 겸 겸사겸사 온 거지. 참, 이쪽은…….”

스피넬을 소개해 주려 고개를 돌리는데 있어야 할 자리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루, 루카스 경. 스피넬 님 어디 갔어요?”

“그게…….”

뒤에 서 있던 루카스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스피넬은 꼬치구이를 파는 가게 앞에서 가게 주인이랑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어쩐지 조용하다 했더니!

이제 막 마을에 도착했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저, 앨리스.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 친구 소개는 다음에 해 줄게.”

“저기……!”

황급히 가게로 향하려는데 날 앨리스가 붙잡았다.

“서점에도 가끔 놀러 와요. 그러니까…… 그, 제가 또 책 추천해 줄게요.”

앨리스는 안톤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날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게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는 눈치였다.

“나랑 놀고 싶은 거구나?”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물론이야. 누가 초대해 준 건데, 당연히 가야지.”

내 대답에 앨리스는 기쁜 듯 입술을 꿈틀거렸다. 감정 표현에 그리 솔직하지 못하지만 겉으로 티가 나는 점이 귀엽달까.

앨리스와 약속을 한 뒤, 난 재빨리 스피넬을 향해 달렸다.

“아니, 먹었으면 돈을 내라니까?”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고기를 이런 꼬챙이에 끼워 놓고 대가를 받는단 말이냐?”

“……말이 안 통하는 아가씨네.”

“나야말로 말이 안 통하는구나. 이건 그냥 맛보기용이지 않으냐? 팔려면 적어도 돼지 한 마리 크기는 되는 물건으로…….”

“자, 잠깐!”

난 스피넬을 막아서며 주인에게 물었다.

“얼마에요?”

“10실버요.”

주인은 얼굴에 짜증을 가득 담아 내게 대꾸했다. 10실버라니. 그 잠깐 사이 매대에 올려진 꼬치를 거의 다 먹어 치운 모양이었다. 많이도 먹었네…….

“여기, 드릴게요.”

난 서둘러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인에게 건넸고, 스피넬은 씩씩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쑤시개로도 못 쓸 그 작은 고기를 돈을 받고 판단 말이냐?”

“10실버면, 한 끼 식사보다 많은 양일 텐데…….”

“하여간 장사치들은 돈독이 올랐구나.”

“…….”

과연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이른 아침의 카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 점원이 다가왔다.

적당히 먹을 걸 주문하며 점원에게 오늘 성녀님이 몇 시쯤 신전을 방문하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손님들께서 그러는데 오후 1시쯤 오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지금이 오전 11시였으니, 아직 시간은 좀 남았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신전에 가도 될 듯했다.

“케이크는 포장해 드릴까요?”

“아뇨. 먹고 갈 거예요.”

“네?”

홀 케이크 하나와 조각 케이크 두 개, 음료 세 잔을 시킨 손님이 먹고 갈 거라고 하니 점원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홀 케이크도 드시고 가실 건가요?”

“네.”

다시 한번 묻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잠시 후. 커다란 케이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처음 보는 음식이 신기한지 스피넬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루카스 경 것도 시켰어요. 앉아서 같이 먹어요.”

“전 괜찮습니다.”

“일부러 시켰는데 안 먹으면 아깝잖아요. 이런 카페에서 딱히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고.”

계속되는 권유에 결국 어쩔 수 없이 루카스도 자리에 앉았다.

난 스피넬에게 포크를 쥐여 주었다.

작디작은 포크는 커다란 케이크 옆에 있으니 건설 현장에 호미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스피넬 역시 그게 불만인 듯 포크를 요리조리 살피더니 시큰둥하게 내려놓았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아무렴, 호미가 말이 되니. 못해도 삽은 되어야지…….

직원을 불러 테이블 스푼을 요청했다.

스푼을 쥐고서야 스피넬은 조금 만족스러운 듯 케이크를 떠먹었다.

“이거, 맛있구나! 역시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답다!”

한 입 떠먹어 본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스푼을 쥐고 있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입 안에 가득 물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역시 설탕과 밀가루의 조합은 옳았다.

케이크를 먹고, 차로 입가심을 하자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저는 오늘 잠시 볼일이 있어서……. 스피넬 님은 먼저 저택에 돌아가실래요?”

“볼일이 무엇이냐?”

“신전에 잠시 다녀올까 하고요.”

“할 일도 없는데 같이 가자꾸나.”

그건 조금 위험할 것 같은데. 여러 가지 의미로…….

“음, 별로 재미없을 텐데요?”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스피넬은 마지막 한 입을 삼키며 말했다.

“괜찮다.”

“정말로 재미없을 텐데…….”

“모르는 모양이다만 라벤느, 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꽤 재밌는 인간이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거라.”

“…….”

그 말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

“성녀님, 도착했습니다.”

아르티아는 천천히 마차에서 내리며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느꼈다.

자신은 오늘 사교도에게 납치를 당할 예정이었다.

아르티아는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베르텔에게 납치당한 자신을 구해 주러 온 황제의 모습을.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자신을 보며 클라우스는 태연히 물었다.

살려 주길 바라느냐고.

아르티아는 공포에 질려 살려 달라 애원했고, 클라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교인들을 차례로 죽여 나갔다.

학살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현장이었다.

‘부디, 그대의 선택에 만족하길 바라네.’

그는 교인들의 피를 뒤집어쓴 자신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마치 이 참혹한 현장이 모두 아르티아의 선택 때문이라는 듯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러나, 또 한 번 과거가 바뀌었다.

연이어 제 예상을 벗어나는 일들은 아르티아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녀는 불안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만큼은 부디 과거와 같길 바랐다. 꼭 베르텔을 만나야만 했으니까.

딱히 사교도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은 또 한 번 클라우스의 손에 의해 죽을 테니까.

그녀가 원하는 건 베르텔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였다. 마력을 봉인하는 힘은 클라우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클라우스가 마법만 사용하지 못했어도 일리온의 반역은 성공했을 테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교인들의 피 웅덩이에서 구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 번이라고 못 할까.

“혹시 제국에도 사교도가 있나요?”

아르티아는 자신을 맞아 주는 사제들과 함께 신전으로 향하며 물었다.

대놓고 베르텔에 관해 묻기엔 괜한 의심을 살 것 같아, 일부러 빙 둘러 질문을 건넸다.

“사교도 말입니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제국에도 꽤 많이 있죠. 폐하께서도 사교도를 정리하는 데 관심이 없으시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 최근 꽤 큰 교단 하나가 잡혔다고 들었습니다.”

“큰 교단이라고 하면……?”

아르티아는 다급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베르텔인가? 스스로 신의 현신이라고 자처한 자가 있었죠.”

“그자가…… 잡혀갔다고요……?”

어째서? 베르텔이라면 아직 자신을 납치하기도 전일 텐데?

“성녀님도 아십니까?”

“아, 아뇨. 그냥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사제의 질문에 아르티아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뭐, 따르는 신도들이 많았으니 한 번쯤 들어 보셨을 만도 하죠.”

“혹시 왜 잡혀갔는지 아시나요?”

“소문에는 귀족을 납치해서라고 하던데……. 저도 자세한 건 잘…….”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 일을 좀 더 자세히 들려줄 사람이 필요한데…….

“어머! 성녀님, 안녕하세요!”

또다시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던 아르티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리슈펠트…… 양.”

예기치 못한 인물의 등장은 당황스러웠다.

“여긴 어찌한 일로…….”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영애께서도 잘 지내셨나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답니다. 참, 얼마 전에 공작님을 도와주신 일은 정말 감사드려요. 공작님께서 표현이 서툴러 그렇지 성녀님께 무척이나 감사하고 계세요.”

그녀는 여전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말이 많고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과거의 침울했던 라벤느와 아예 다른 사람이라 느껴질 만큼.

“아닙니다. 그저 신의 뜻을 따랐을 뿐인걸요. 그보다 신전엔 어찌한 일로…….”

“실은 성녀님을 뵙고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마침 신전에 오신다기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 안에서 천으로 돌돌 말린 물건을 꺼냈다.

천을 풀어 헤치자, 그 안에는 익숙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아니,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원래는 이렇게 생긴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 물건이 제 친구의 마나를 빼앗아 가 버린 것 같은데, 어떻게 고칠 수 없을까요?”

“…….”

아르티아는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걸 느끼며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부, 부서졌네요.”

“하하, 네. 바닥에 좀 세게 내리쳤더니.”

“……성물을 바닥에 내리치셨다고요?”

“하하. 제가 힘이 너무 셌나 봐요.”

아르티아는 클라우스에 대항할 마지막 수단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며 이 순간이 부디 꿈이길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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