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그럼 세라스라는 이는 내 어머니인가?”
“그래. 넌 기억도 못 하는 것 같지만.”
스피넬은 실소를 터트렸다. 세라스는 고작 이런 인간을 아들이라고 키웠던 건가? 자신을 기억도 못 하는 자식을?
“……혹시 어머니는…….”
“죽었다. 셀바스의 영주에게 마녀로 몰려서.”
“마녀……라고?”
마녀라는 단어에 일리온의 손이 잠시 떨렸다.
“혹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아나?”
“나도 몰라. 내가 찾아갔을 땐 이미 세라스는 죽은 뒤였으니까.”
일리온은 자신의 저주에 대해 떠올렸다. 마녀를 죽여 생겼다는 저주.
혹시 자신이 그녀의 죽음에 관여한 건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어머니는 정말 마녀였나?”
“세라스는 인간이 아니야. 드래곤이지.”
어렴풋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스피넬은 자기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서 처음엔 네 정체가 뭔지 헷갈렸다. 너에게선 인간과 드래곤의 냄새가 모두 났으니까.”
“…….”
일리온은 충격을 받은 듯 스피넬을 바라보았지만, 스피넬은 일리온이 충격에서 회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라벤느의 제안에 못 이기는 척 저택에 온 거다. 네 정체가 뭔지 알아내기 위해. 그리고 엘라인의 초상화를 봤을 때, 비로소 네가 누군지 알겠더군.”
일리온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스피넬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그러다 문득 그녀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까 라벤느가 과부가 될 거라는 이야기는 뭐지?”
“그야 넌 얼마 못 살 테니 말이다.”
“저주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건가?”
“저주라고? 설마 세라스가 네게 물려준 힘을 저주라고 말하는 거냐?”
세라스를 생각해서 그녀의 멍청한 아들과 대화에 어울려 주려 했지만 스피넬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가치가 없다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주는 세라스가 아니라, 네놈들이 걸어 놓았겠지. 마녀고 저주고, 이젠 지긋지긋하구나.”
“잠깐 기다려. 아직 얘기가…….”
“그래, 참. 아직 얘기가 안 끝났지.”
스피넬은 깜박했다며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날 감시하는 놈들을 물리거라. 시체를 치우고 싶지 않다면. 오늘은 그 말을 하려고 찾아온 거다.”
그 말을 남기고 스피넬은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
“어젠 잘 주무시고 오셨어요?”
“물론이지. 내 얼굴을 보렴.”
전날 꿀잠을 자서인지, 퉁퉁 부은 얼굴로 방에 돌아올 수 있었다.
릴리가 방긋거리며 그게 다냐고 물었다.
“정말 잠만 주무시고 온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 별일 없을 거라고.”
물론 그렇게 말하고도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정말 별일 없었다. 내가 방에서 깼을 땐 일리온은 이미 방을 나선 뒤였으니까.
놀라운 건 책상 위를 가득 채우고 있던 서류가 상당히 정리되어 있다는 거 정도?
하루 이틀 잠을 안 자도 괜찮다던 말이 농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손에 그건 뭐예요?”
“아, 이거. 공작님께 받았어.”
어제 일리온이 준 물건을 릴리 앞에서 보여 주었다.
방이 밝아서인지, 어제만큼 빛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감미로운 노랫소리는 여전했다.
“어머, 노랫소리가 너무 좋네요. 마치 엘프들이 말하는 것 같아요.”
“엘프?”
“네. 잘 모르지만 이렇게 감미로운 언어라면 엘프의 언어가 아닐까요?”
그럼 이건 엘프랑 관련이 있는 물건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일리온의 과거가 궁금해지는 물건이었다.
“라벤느!”
평온한 노래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서 릴리가 머리를 만져 주는 걸 기다리는 사이 문이 벌컥 열리며 스피넬이 들어왔다.
“스피넬 님. 문을 열 때는 노크를 해 주세요.”
“거 참, 까탈스럽게 구는구나.”
“노크요.”
“그래, 알았다.”
스피넬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삐죽이다 문을 닫고 노크를 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구슬을 서랍에 넣으며 그녀를 맞았다.
“흠흠…….”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스피넬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케이크가 먹고 싶다. 케이크를 만들어 주겠고 하지 않았느냐?”
“아, 실은 그거 말인데요…….”
난 살짝 말을 흐렸다.
“실은 제가 만드는 것보다 직접 사 먹는 게 더 맛있거든요.”
무엇보다 만들 줄도 모르고.
“사람을 시켜서 사 올까요?”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릴리가 물었다.
“아니. 이왕이면 바람도 쐴 겸 나갔다 올까 하는데.”
“음, 오늘은 피하시는 게 어떠세요?”
“왜?”
릴리는 머리가 완성됐다며 거울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 마을에 있는 신전에 성녀님이 오신다는 얘기가 있어요. 구경하려는 인파로 많이 복잡할 거예요.”
“뭐? 그게 오늘이야?”
난 거울을 보던 걸 멈추고 다급하게 릴리에게 물었다.
“네. 왜요?”
“릴리, 나가자. 마차를 준비해 줘.”
“네? 제가 방금 오늘은 피해서…….”
“아니, 오늘 가야겠어.”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
미루던 일 하나를 해치우기 위해 난 기사단 창고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안녕하세요. 잠시 안쪽으로 들어가 봐도 될까요?”
“안쪽이요?”
“예. 이번에 교단에서 몰수한 물건 중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내 부탁에 기사는 아무 의심 없이 창고 문을 열어 주었다.
어지러이 자리한 물건들 사이로 한쪽에 검과 함께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베르텔의 지팡이가 보였다.
열심히 바닥에 내리친 덕분에 성물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안 그래도 성물을 들고 신전에 찾아갈 셈이었는데, 마침 아르티아도 방문한다고 하니 가져가 볼 생각이다.
어쩌면 마나 회복이 더딘 스피넬의 문제를 해결해 줄지 몰랐다.
성물을 조심히 천에 싸 들고 방으로 돌아오자 릴리가 울상을 지으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저, 아가씨…….”
“왜?”
“그게, 당분간 공작님께서 아가씨 혼자 밖에 내보내지 말라고 하셨대요.”
“또?”
내가 무슨 5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직접 가서 얘기해 볼게.”
결국, 일리온과 직접 담판을 짓는 수밖에는 없을 듯했다.
“잠은 잘 잤나?”
일리온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반듯한 얼굴이 날 맞이해 주었다.
“그럼요, 덕분에.”
“이렇게 찾아온 걸 보니, 또 내게 부탁할 게 있나 보군.”
다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시네.
“역시, 공작님께서는 제 마음을 다 알고 계시네요.”
“안 돼.”
“저,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요?”
하고 싶은 말은 시작도 안 했는데 거절이 되돌아왔다.
“밖에 외출하고 싶어서 온 거 아닌가?”
“네.”
“그러니 안 된다고 하는 거네.”
“왜요?”
“교단 일이 아직 해결이 덜 됐어. 이 와중에 혼자 밖에 나가는 건 위험하네.”
꽤나 납득이 가는 이유였지만, 자꾸 안 된다고 하니 괜한 오기가 생겼다.
“루카스 경과 함께 갈게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만 참게.”
“조용히 케이크만 먹고 올게요.”
“이미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리슈펠트 영애!”
일리온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내 이름을 불렀다.
깜짝 놀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일리온을 바라보자 일리온 역시 자신의 목소리에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곤 서둘러 사과를 건넸다.
“소리쳐 미안하네.”
“……아니에요.”
일리온은 머리가 아픈 모양인지 관자놀이를 누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루카스와 다녀오게. 대신, 케이크를 먹고 곧바로 돌아오겠다 약속하게.”
일 때문에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괜히 그를 자극하는 건 좋지 않을 듯해 난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하고 방을 나왔다.
***
“어머나. 공작님께서 허락해 주신 거예요?”
나갈 채비를 하는 날 보며 릴리가 물었다.
“응. 허락해 주셨어.”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 일리온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사람이 많은 곳은 최대한 피하시고요.”
“응. 금방 돌아올 거니까 너무 걱정 마.”
“그래, 걱정하지 말아라. 나도 같이 가질 않느냐?”
“…….”
스피넬의 말에 릴리가 입을 다물며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스피넬이 같이 가는 게 제일 걱정이라는 말을 애써 삼키는 눈치였다.
마차가 천천히 저택을 벗어났다. 스피넬은 창밖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그래. 신경을 거스르던 놈들이 떨어져 나갔거든.”
아무래도 또 혼자만 아는 이야기인 듯했다.
“그보다 라벤느…….”
“네?”
“네가 하고 싶다던 일은 뭐냐?”
저번에 초상화 앞에서 나눴던 대화의 연장선인가?
그때 스피넬에게 저택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적당히 얼버무리긴 했는데…….
“역시 그녀석과 결혼하는 거냐?”
“음…….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럼?”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실은 어제까지만 해도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하던 고민이 있었다. 이곳에 온 뒤로 쭉 날 괴롭히던 고민.
난 내 한계를 잘 알고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발버둥을 칠 생각이었다.
오로지 내 목숨 하나만을 부지하는 게 목표였으니까. 옳고 그름은 그다음 문제였다.
하지만 이곳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내가 사라져서 걱정했다며 누구보다 기뻐했던 릴리도, 날 위해 잘 모르는 놀이를 준비해 준 세바스찬도, 날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사단들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외면하기엔 너무도 많은 도움과 위로를 받아 버렸다.
그리고 어제는 생각지도 못한 일리온에게까지 위로를 받았지.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푹 잘 수 있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고민이 걷힐 만큼.
그래서……. 지금은.
“말씀드리긴 힘들지만, 다 같이 행복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난 여전히 마법도 쓸 수 없었고, 체력도 좋지 못했으며, 신성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가는 쪽을 선택하고 나니 후련한 기분이었다.
내 대답에 스피넬은 턱을 괴고 날 바라보았다.
“넌 세라스보다 더한 아이구나.”
“……네?”
“아무튼 일리온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면 됐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대체 내 결혼이 왜 그리 중요한 걸까 싶어 스피넬에게 물었다.
“그야 당연하지. 그놈은 얼마 못 살 테니까.”
채도가 높은 붉은 눈동자가 날 무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 전에 성녀님께 치료를 받았는걸요.”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그건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혹시 공작님의 저주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대충 짐작할 뿐이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단지, 그 몸은 이제 얼마 못 버틸 것이다.”
“일리온이요?”
순간 당황해 공작님도 아닌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 그럼 얼마나 더 살 수 있는데요?”
“내가 신도 아니고 어찌 알겠느냐? 다만, 지금 상태로 보면 올겨울을 넘기긴 힘들어 보이는구나.”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이라는 듯 스피넬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