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뭘 그리 놀라?”
소스라치게 놀라는 날 보며 일리온은 픽 웃더니, 창가로 가서 커튼을 쳤다. 그리곤 주변을 밝히던 불을 하나씩 껐다.
그렇게 하나씩 사라지는 불빛에 방 안은 금세 어두 컴컴해졌다. 그리고 내 머릿속도 불을 꺼 버린 듯 어두컴컴해졌다.
“……저, 저기 공작님. 우리 아직 결혼도 안 했잖아요? 제가 요즘 예법 수업도 엄청 열심히 듣고 있거든요.”
“다행히 수업은 열심히 듣고 있나 보군.”
“그, 그럼요. 그, 그러니까…… 이런 건 결혼한 다음에…….”
“잠깐 고개 들어 봐.”
그의 말에 횡설수설하며 바닥만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순간 눈앞으로 푸른색 빛무리가 하늘거리며 지나갔다.
그 불빛을 따라 시야를 조금 넓히자 방 안에 우주를 들여놓은 것 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모습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난 겨우 입을 뗐다.
“이게, 뭐예요?”
내 말에 일리온은 손에 쥐고 있던 탁구공 크기의 구슬을 내게 건넸다.
아름다운 음각이 새겨진 동그란 쇠구슬에선 별빛 같은 빛무리와 함께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제국의 언어가 아니라 가사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자장가를 부르는 것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색이었다.
아티팩트인가? 마법으로 이런 걸 구현할 수 있다고?
건네받은 구슬을 살피며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일리온은 침대 옆에 놓인 램프의 불을 켰다.
방의 분위기를 깨지 않을 정도의 작고 약한 불빛이었다.
은은한 향기가 방 안에 퍼졌다.
“좋은 냄새…….”
“라프의 꽃잎이 들어간 향초야. 숙면에 도움을 주지.”
“숙면이요?”
“그래. 요즘 그대가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아서.”
“…….”
내가 밤잠을 설치는 건 릴리도 모르는데……. 숨기고 있던 비밀을 들킨 기분이었다.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별일 없을 테니 자고 가.”
“제, 제가 무슨 걱정을 했다고.”
괜히 혼자 소란을 떤 것 같아 창피함에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별을 수놓은 것 같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자장가와 향긋한 향초 냄새까지 더해지니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공작님, 제가 잠을 못 자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매일 보는 얼굴이니까.”
일리온은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며 대답했다.
일리온 쪽으로 얼굴을 틀었지만, 어두 캄캄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을 못 자서 평소보다 얼굴이 더 부어 보였다는 소리인가? 그거라면 더 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공작님.”
“왜?”
“이 구슬은 어디서 난 거예요?”
눈꺼풀이 아른거리며 감겨 왔지만, 좀 더 버텨 볼 셈으로 일리온에게 말을 걸었다.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물건이야.”
“누가 줬는데요?”
“기억은 나지 않아. 이 저택에 올 때부터 갖고 있었던 거니까.”
일리온은 오늘따라 귀찮은 기색 없이 내 말에 대답해 주었다. 낮은 목소리가 잔잔한 노랫소리에 섞여 들어갔다.
“어릴 때 얘기 좀 해 주세요.”
“별로 재밌는 건 없을 텐데.”
“재미없으면 듣다가 졸겠죠.”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얘기하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문을 들어서 알겠지만, 난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셀레스타인가에 들어왔어. 저택에 온 게 5살 무렵이긴 하지만……. 그 무렵의 기억은 거의 없지.”
“저, 그럼 어머님이나 아버님은…….”
“부모님에 대해서도 몰라.”
우물쭈물하며 말을 고르고 있는데, 일리온은 내가 뭘 물어보고 싶은지 알고 있다는 듯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는요?”
“할아버지는 엄하신 분이셨고, 할머니는 날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지. 끝내 날 자신의 손자로 인정하지 않으셨으니까.”
“…….”
어쩐지 내딛는 곳마다 지뢰인 것 같은데……. 그냥 입 다물고 잘 걸 그랬다.
“뭐, 내가 후계자로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아보신 거겠지. 실제로도 다들 내가 즉위한 뒤 가세가 예전만 못하다고들 하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일리온의 목소리는 마치 다른 사람 일이라는 듯 담담했다.
일리온은 스무 살 가문을 이어받아 호시탐탐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하이에나들 사이에서 7년이나 이 가문의 수장으로 버텨 왔다.
그동안 얼마나 큰 노력을 했을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런 그에게 당신은 그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쉽게 깎아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들 뭘 모르네. 공작님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꽤나 자신하는군.”
“당연하죠. 공작님 같은 일 중독자가 또 어디 있겠어요? 참고로 공작님 밑에서 일해 본 경험자가 말씀드리는 거니, 믿으셔도 됩니다.”
“칭찬……. 인가?”
“물론 칭찬이에요.”
내 말에 일리온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그런 말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공작님이 잘해도 욕할 거고, 못해도 욕할 거예요. 날 싫어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의 평가는 그러한 법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뒤에서 그런 욕을 듣고 계신다면, 그건 공작님께선 꽤나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는 증거이니 자신을 가지세요.”
내 말에 일리온은 웃음을 터트렸다.
“가끔 그대랑 얘기하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군.”
“제가 가장 큰 고민거리라서요?”
또 무슨 말로 날 비꼬려나 싶어 퉁명스레 물었다. 그러자 일리온은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 지금은 그대가 내 가장 큰 고민거리니까.”
어련하시겠어. 부디 그 고민거리, 더 들고 있지 말고 밖으로 던져 버리시길.
“그런데 공작님, 이렇게 캄캄한데 그게 보여요?”
조명도 없는데 잘도 서류를 읽고 있어 물었다.
“안경에 마법을 걸어 뒀거든.”
“아아.”
쓰고 있는 안경도 아티팩트였구나.
“잘 보이나 보네요.”
“그래. 아주 잘 보여.”
“그렇다고 너무 늦게까지 보고 있진 마세요. 눈 나빠질지도 몰라요.”
그 말을 끝으로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라벤느가 잠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바스찬인가 싶어 밖에 나가 보자 의외의 손님이 눈앞에 서 있었다.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
“내게 할 말이라니, 별일이군. 여길 나갈 계획이라면…….”
“내 뒷조사는 다 끝났더냐?”
일리온의 말을 자르며 스피넬이 물었다.
일리온은 잠시 라벤느의 상태를 살피다 문을 닫았다.
“여기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군. 집무실로 가지.”
집무실에 도착한 스피넬은 일리온이 의자를 권하기도 전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 일리온의 신경을 거슬렀다.
물론 스피넬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요 며칠, 날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더구나. 모습을 잘 감추긴 했지만. 네가 심어 둔 사람이지?”
“보기보다 눈치가 빠르군.”
“단지 너를 믿지 않는 것뿐이다. 처음부터 날 달가워하지 않던 네가 순순히 손님을 대접할 거라 생각 안 했으니까.”
스피넬은 처음부터 일리온을 경계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의 내리기 힘든 일리온의 정체에 대해서.
“뭐, 알아낸 건 있느냐?”
그렇게 말하며 스피넬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사실 일리온은 할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이미 그녀의 신상부터 인간관계까지 모두 조사가 끝나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일리온이 알아낸 건,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뿐이었다.
“네가 셀바스 지역을 불태운 마녀라는 사실뿐이다.”
“고생한 것치곤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군.”
신랄한 비판이었지만, 그 말이 사실이었다.
“좋다. 네 고생을 가엽게 여겨 질문을 허락할 테니, 뒤에서 그러지 말고 직접 물어보거라.”
“꽤나 고자세로군.”
처음 일리온을 마주했을 때부터 스피넬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처음엔 단순히 그녀가 사회 규범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그건 아니었다.
평민과 귀족에 대한 구분이 분명했으니까. 그런데도 스피넬은 일리온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하대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그 외 나머지 인간들을 구분했다. 마치, 자신은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듯.
“너는 정체가 뭐지?”
“질문의 범위가 너무 큰 것 아닌가?”
“그럼 범위를 줄여 보지. 너는 인간이 아닌가?”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스피넬이 되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스피넬은 너무도 간단히 일리온의 질문을 부정했다.
“드래곤이다.”
“…….”
일리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뭐야. 모르고 있었나?”
“드래곤……이라고?”
“그래.”
일리온은 기껏해야 대륙 곳곳에 사는 이 종족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드래곤일 줄은…….
“드래곤이 왜 인간의 모습을 하는 거지?”
“그야 내가 드래곤의 모습을 하면 집이 무너질 테니까.”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스피넬이 답했다.
그보다는 마나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드래곤으로 변신할 수 없다는 표현이 옳았지만 스피넬은 그 사실을 숨겼다.
스피넬의 대답에 일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와의 대화를 나눌 때면 자신마저도 어린아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라벤느도 네가 드래곤인 걸 알고 있나?”
“……아마?”
눈동자를 굴려 생각을 하던 스피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을 거다.”
자신은 없었지만, 날개도 보여 줬고, 드래곤일 때의 모습도 보여 줬으니 모르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어디까지나 스피넬의 짐작이었지만.
“혹시 라벤느가 네게 같이 도망치자는 부탁이라도 하던가?”
어쩐지 사이가 좋아 보이던 두 사람을 떠올리며 일리온이 물었다.
“아니. 라벤느는……, 여길 떠날 마음이 없어 보이는구나.”
“그럼?”
“글쎄.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나도 모르지. 나한텐 그냥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만 했으니까.”
“그럼 넌 왜 여기에 머무는 거지?”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러니 세라스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랄 뿐이다.”
“세라스?”
“그래. 아내를 과부로 만드는 건 엘라인 하나로 충분하지 않으냐?”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아버지의 이름에 일리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가 어떻게 아버지 이름을…….”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고 생각이 나더구나. 엘라인, 그 빌어먹을 인간의 얼굴이. 그리고 네가 그 엘라인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