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스피넬이야 늘 제멋대로였으니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일리온 역시 그 말에 동의하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까지는 그렇게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싸우더니.
“뭐예요. 설마 질 것 같아서 그러세요?”
“라벤느, 내가 설마 네놈들한테 지겠느냐? 이 멍청이랑 같은 편이 되는 게 싫어서지.”
“……누가 멍청이인지.”
일리온이 한마디 거들었다.
“저, 기사단도 구경하는데 싸우지 마시고요…….”
스피넬을 집에 초대한 죄로 난 결국 중재자를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공작님이랑 팀을 바꿀게요.”
“싫다.”
일리온이 단칼에 거절한다.
“……그럼 스피넬이랑 바꿀까요?”
“어째서 네가 저놈이랑 한 팀을 하는 거냐?”
그럼 어쩌라고.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을 만족시키면서 팀을 나누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 이렇게 해요. 두 분이 한 팀으로 경기에 이기시면 원하는 거 하나씩 들어드릴게요.”
“…….”
“…….”
두 사람은 골똘히 생각하다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가 이기면 케이크를 만들어 주거라.”
스피넬은 이미 경기에서 이기기라도 한 듯 소원을 말하며 씩 웃었다. 그리고 일리온 역시 내 제안에 더 이상 불만이 없는 표정이었다.
겨우 잠잠해진 두 사람을 데리고 게임을 시작했다.
딱히 승패에 관심은 없었기에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다.
케이크쯤이야, 별거 아니었고……. 게다가 일리온이 내게 바랄 소원이라 봤자……. 얌전히 있으라는 것 정도려나.
“네네. 그럼 경기 시작할게요.”
***
경기를 시작하고 한 시간 후.
루카스가 날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러다 지겠는데요?”
“…….”
야구가 처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일리온과 스피넬은 날아다녔다.
일리온이야 탈 인간급 신체 능력을 갖췄으니 그렇다 치고, 스피넬은 대체 왜?
일리온에 버금갈 정도로 점프력이며, 지구력, 반사 신경까지……. 루카스가 기사단에 들어왔으면 좋겠다며 탐을 낼 정도로 뛰어난 신체 능력을 보여 주었다.
어쩔 수 없이 작전 타임을 외치긴 했지만, 점수는 절망적이었다. 당장 경기가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이럴 때야말로 경험자의 전략이 빛을 발하는 법!
난 루카스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네요.”
“어쩔 수 없다면……?”
“심판을 매수합시다.”
“…….”
루카스는 내 얼굴을 보며 그게 작전이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다.
“방금까지 경기는 공정해야 한다고…….”
“루카스 경, 이건 전쟁이에요. 전쟁에 페어플레이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저 두 사람을 봐요. 이미 능력치부터가 공정하지 못하잖아요!”
경기의 승패에 관심이 없다던 1시간 전에 난 온데간데없었다.
질 때 지더라도 콜드 게임으로 지는 불명예만큼은 피해야 할 것 아닌가!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 못 해!
규칙이 어렵다며 자꾸만 반칙을 일삼는 스피넬 덕분에 경기는 엎치락뒤치락 반복했다.
다행히 후반엔 루카스와 기사단 사람들이 열의를 불태워 준 덕분에 많이 따라잡았지만, 안타깝게도 최종 결과는 패배였다.
“말도 안 돼. 이렇게 지다니…….”
“여기, 물 드세요.”
“고마워, 릴리.”
난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얼마나 신나게 뛰어다녔는지 물컵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한쪽에서 웃으며 세바스찬이 다가왔다.
“세바스찬, 정말 너무해요. 우리 편 좀 들어주면 어디 덧나요?”
“아가씨께서 심판은 최대한 공정하게 봐달라고 부탁하셨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정말이지, 이 집엔 왜 이렇게 착실한 사람들뿐인지.
“놀이는 즐거우셨나요?”
난 패배의 아쉬움을 털어 내며 웃었다.
“네. 즐거웠어요.”
이렇게 즐거웠던 게 얼마 만일지 모를 정도로.
힘껏 공을 치는 것도, 땀을 흘리며 뛰어다니는 것도, 1점, 1점에 조마조마하는 것도 모두 너무 오래간만이었다.
잠도 못 잘 만큼 날 괴롭히던 고민이 순식간에 사라질 정도로.
“그러셨다면 다행입니다.”
“혹시, 저 때문에 일부러 나오자고 하신 거예요?”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 기분 전환을 시켜 드리면 어떨까 했거든요.”
세바스찬의 대답에 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표정을 감추는 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숨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부러 준비했구나. 내 기분을 풀어 주려고……. 어쩐지 그의 배려에 울컥하고 말았다.
“고마워요. 세바스찬.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요.”
“즐거우셨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참고로 오후 수업은 모두 취소하였으니, 들어가서 푹 쉬세요.”
“공작님이 허락해 주셨어요?”
“주인님께서 그리하라고 먼저 말씀하셨답니다.”
일리온이 먼저?
난 저 멀리서 땀을 닦는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일리온은 여전히 스피넬과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내 덕에 이긴 줄 알 거라!”
“……너 때문에 겨우 이긴 거겠지.”
사이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안 그래도 그날 이후로 일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혹시 세바스찬처럼 일리온도 내 기분을 생각해서 일부러 어울려 준 걸까?
……설마. 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리온인걸.
***
스피넬은 그 호탕한 성격으로 금방 기사단 사람들과 친해졌다.
그리고는 야구가 재밌는지 한 번 더 하겠다며 연무장으로 뛰쳐나갔다.
반면 더 이상 뛸 체력이 남지 않은 나와 할 일이 쌓인 일리온은 함께 저택으로 들어왔다.
릴리는 먼저 가서 물을 받아 놓겠다며 내 방으로 가 버려서 복도엔 나와 일리온뿐이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나?”
말할 기운도 남지 않아 말없이 뒤를 따르는데 일리온이 물었다.
그렇게 뛰어다녔는데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하지. 기본 체력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었고.
“오랜만에 뛰어서 그런가 봐요. 괜찮아요.”
그러나 내 말에도 일리온의 미간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요즘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던데…….”
릴리가 말해 준 건가? 릴리도 그건 잘 모를 텐데?
“어머,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전 늘 공작님 생각으로 가득해 밤잠을 설치고 있답니다.”
“그럼, 생각만 하지 말고 보러 와.”
일리온을 향해 버릇처럼 나오는 주접이었으나, 그의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네?”
“내 소원은 그걸로 하지.”
“소원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경기에서 이기면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하하. 그랬었죠. 기억력이 참 좋으시네요.”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
“네? 공작님께서 방으로 찾아오라고 했다고요?”
“……무슨 뜻일까.”
저녁을 먹고 방에 돌아온 난 침대에 앉아 골똘히 생각했다.
‘특별히 내 잘생긴 얼굴을 네게 보여 주마.’ 뭐 이런 뜻으로 한 말인가?
아니면, ‘요즘 일을 안 해서 네가 몸이 편하지? 와서 일이나 해!’ 하는 뜻일까?
일리온의 성격으로 봤을 땐 후자가 더 그럴듯하긴 한데…….
“무슨 말이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릴리는 옷장 안을 부스럭거리며 뒤지기 시작했다.
“준비? 뭘?”
“짜잔!”
그녀의 손에 들린 하늘거리는 옷을 보며 난 표정을 굳혔다.
“……그게 뭔데.”
“뭐긴요. 잠옷이죠.”
“……왜 그렇게 짧고 하늘거리는데?”
“왜긴 왜겠어요?”
“대체 그런 건 언제 사다 놓은 거야?”
내가 인상을 구기며 묻자 릴리가 빙긋 웃었다.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을 했죠.”
아이고 릴리야, 내가 널 어쩌면 좋니.
“……안 입을 거야.”
“네? 왜요?”
“생각해 봐. 공작님이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리온이란 말이야. 반역이 실패로 돌아가 숨이 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녀한테 키스 한 번 못 한 그 일리온이라고!
“다른 사람이면 오히려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릴리가 대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직도 자신이 없으세요? 혹시 저번에 말씀하시던 운명의 사람 얘기 때문이에요?”
얘는 왜 그런 것만 잘 기억하고 있는지.
“꼭 그런 게 아니라……. 너도 알잖아, 공작님이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거.”
릴리는 침대에 앉은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으며 내 손을 잡았다.
“아가씨, 왜 그런 얘길 하세요. 지난번에 아가씨께서 사라지셨을 때, 공작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신 줄 아세요? 오늘 일도 그래요. 아시잖아요. 공작님 바쁘신 거. 그런데도 아가씨께서 좋아하는 놀이라고 하니까 같이 어울려 주신 거잖아요.”
“…….”
“그러니까 아가씨…….”
릴리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에 옷을 꼭 쥐여 줬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리곤 주먹을 꼭 쥐며 파이팅 자세를 취해 보였다.
“…….”
아니 그러니까, 그럴 일은 없다고!
그날 밤, 하늘거리는 잠옷을 입히려는 릴리를 뿌리치고 일리온의 방으로 향했다.
백 보, 아니 만 보쯤 양보해서 일리온이 내게 흑심을 품었다 치자. 그렇다고 해서, 날 침실로 부르겠냔 말이다!
차라리 잡일을 시키려고 한다는 게 더 그럴듯했다.
그러니 겁먹을 거 없어!
긴장을 감추며 일리온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어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려는데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는데?”
“……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물으면 꼭 내가 기대하고 일찍 온 것 같잖아.
민망한 기분을 감추려고 일부러 조금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실은 그대가 까먹은 척 하루를 넘길 거라 생각했거든.”
“어머, 그러셨어요? 그럼 이대로 모른 척 돌아가 볼게요.”
그렇게 말하며 돌아가기 위해 문고리를 쥐자 일리온이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며 막았다.
“내 소원 들어주러 온 거잖아.”
“……밤에 제 얼굴 보시는 게 소원 아니셨나요?”
‘소원’이라면서, 자길 보러 오라고 했었다. 서로 얼굴 봤으니 이걸로 끝난 거 아닌가?
“남녀 사이에 밤에 얼굴을 보러 오라는 말의 뜻을 그렇게 해석하나? 틈만 나면 읽던 소설이 아깝군.”
“…….”
왜 그러세요. 네?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의 입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을 대답에 어버버 하는 사이 일리온은 내 손을 가볍게 끌었다. 얼떨결에 그를 따라 침대 앞까지 도착했다.
“누워 보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