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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65)화 (65/159)

65화

왠지 모르게 얼굴에 열이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난 홧홧거리는 얼굴을 식히며 웃었다.

“어머. 제가 그렇게 보고 싶으셨다니. 설마 밤마다 제가 보고 싶다고 어린아이처럼 울진 않으셨겠죠?”

“…….”

“설마 우셨어요? 그건 좀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좀 더 놀릴 생각으로 그의 신경을 긁었다. 그러자 예상과는 다르게 일리온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즐거우세요?”

“그냥, 그대가 정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이 너무 많아 정신을 놨나. 별 게 다 즐거울 일이었다.

“질문은 이제 끝났나?”

“뭐, 딱히 질문이랄 게 있나요. 말씀드렸다시피 전 공작님이 보고 싶어서 왔는걸요.”

“말은 기쁘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 걱정되는군.”

“안 그래도 마침 나가 볼 생각이었답니다. 차 잘 마셨어요.”

난 찻잔을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온 건 아니었다. 그냥, 일리온의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끔찍했던 악몽을 지우고 싶어서.

“저…… 이번 일로 걱정을 끼쳐서 죄송했어요. 그리고, 구해 주러 와 주셔서 고마워요.”

말을 하지 않고 지나가도 일리온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신경도 쓰지 않겠지.

이건 그저 내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 위한 이기적인 사과였고, 감사였다.

날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수색을 계속했다던 그의 순수한 선행마저도 못 본 척 무시한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나야말로, 살아 있어 줘서 고맙네.”

살아 있어서 고맙다니……. 예의상 하는 말인 걸 알지만 어쩐지 마음이 안 좋았다.

내가 자신의 운명을 망치고 있다는 걸 알아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감사만큼은 내가 받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 말을 끝으로 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오늘은 가정 교사가 오기로 한 날이었다. 그 난리를 겪었으면 하루 이틀 수업을 빼 줄 만도 한데, 왜 이렇게 다들 성실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 다들 자기 일이 아니라 이거지. 수업을 듣는 건 나 하나뿐이니까!

“스피넬 님? 거기서 뭐 하세요?”

수업을 듣기 위해 서재로 향하는데 복도 한쪽에 스피넬이 무언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림을 좀 보고 있었어.”

“그림이요?”

그녀는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엔 일리온의 아버지, 엘라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오가며 몇 번 보긴 했지만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엘라인은 금발 머리에 따뜻한 녹색 눈을 가진 남자였다. 무척이나 온화한 이미지의 사람이었는데, 확실히 일리온과는 많이 다른 외모였다.

“공작님의 아버님이세요.”

“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벌써 20년도 전에 돌아가셨다고 듣긴 했는데…….”

“그래?”

스피넬은 미간을 접어 가며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뭐 내가 아는 인간이 아닐 수도 있지. 내 눈에 인간들이란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이니 말이다.”

“하하…….”

늘 생각하는 거지만, 스피넬은 자신 역시 인간이란 사실을 종종 무시했다.

“그보다 마나는 많이 회복되셨어요?”

“아, 그거 말인데……. 생각보다 회복이 더디구나.”

“정말요?”

“그래. 하루면 회복이 끝나야 하는데.”

스피넬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불꽃이 작게 한 번 튀더니 펑 소리가 나며 연기가 번졌다.

“마법을 제대로 쓸 수가 없어.”

“음…….”

설마 아직 성물의 힘이 유효한 건가?

그러고 보니, 교단에서 뺏은 물건이 기사단 창고에 있는 것 같던데……. 나중에 한번 살펴봐야겠다.

“그리고 거처 말인데요. 혹시 따로 생각해 둔 거처가 있나요?”

“글쎄. 사람이 적고, 깊은 산속이면 좋을 것 같은데.”

“마을에 내려와서 사는 건 어때요?”

“싫다. 내가 왜?”

스피넬은 내 제안을 칼같이 거절했다.

교단에 납치당했던 사건 이후, 세라스가 셀바스 마을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그 일로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래서일까?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마저도 적의를 드러내곤 했다.

“그럼, 사람이 많지 않은 곳으로 거처를 알아봐 드릴게요.”

“너는?”

“저요?”

“그래. 넌 날 안 따라올 거냐?”

스피넬이 날 빤히 보며 물었다.

“저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해야 할 일? 결혼 말이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그 수컷은 네 짝으로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만.”

수컷이라는 말을 지적할까 하다, 참기로 했다.

“뭐, 공작님이 저한테 과분하긴 하죠.”

난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아가씨!”

스피넬은 뭔가 내게 더 설명하려 했으나, 릴리의 목소리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선생님께서 기다리신다고요!”

내가 안 오니 릴리가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듣기로 하고, 난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

***

저택에 돌아온 지 삼 일째 되는 날 아침, 오늘도 버릇처럼 일어나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산속에서 지냈던 일이 거짓말처럼 내 일상은 어느새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식당에 도착하자 오늘은 스피넬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늦잠을 자 같이 아침을 못 먹은 게 분했던 모양이었다.

“이건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스피넬은 눈앞에 놓인 포크를 집어 들고 물었다.

“포크로 음식을 찍어서 드시면 돼요. 숟가락은 국을 떠먹을 때 쓰면 되고요.”

내가 하는 모양새를 보더니 스피넬은 곧잘 따라 했다. 뭐, 흘리는 게 절반이었지만.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걸 이렇게 힘들게 먹다니…….”

“손님께서는 언제까지 여기 머무를 거지?”

스피넬의 불평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일리온이 물었다.

“글쎄요. 세바스찬에게 괜찮은 곳을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그거라면 내가 몇 군데 알아봐 놓았으니 결정만 하면 되겠군.”

“빠르시네요.”

일도 많은 분이 언제 또 그건 알아봤데.

아무래도 스피넬이 저택에 지내는 게 마음에 안 든 눈치였다.

“그래? 그럼 라벤느랑 같이 둘러보러 가면 되겠군.”

“라벤느는 저택에 남아 할 일이 있어. 자네는 따로 사람을 붙여 주도록 하지.”

스피넬의 혼잣말을 칼같이 자르며 일리온이 끼어들었다.

“싫다만?”

일리온은 포크를 내려놓고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그대를 손님이라 생각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해 주겠지만, 주제넘은 행동까지 눈감아 줄 생각은 없네.”

“넌 참 말을 어렵게 하는구나. 내가 지금 주제넘게 행동한다는 게냐?”

“그래도 말을 아예 못 알아먹는 건 아니었나 보군.”

스피넬의 대꾸에 일리온이 특유의 비아냥을 시전했다. 다 큰 어른들이 왜 어린애들처럼 싸우는지…….

난 애써 두 사람을 무시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때마침 세바스찬이 식당으로 들어오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 그래도 보여 드릴 게 있는데 식사 끝나시고 잠깐 괜찮으신가요?”

“저한테요?”

“네.”

보여 줄 거라……. 웨딩드레스랑 구두라면 지난번에 대충 맞췄으니 그건 아닐 테고…….

“뭔데요?”

내게 보여 줄 게 뭘까 싶어 되묻자 세바스찬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보시면 아실 거예요.”

“기대해도 되는 거예요?”

내 질문에 세바스찬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라벤느!”

“라벤느.”

그러나 그 평화도 잠시. 한참을 말다툼하던 두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날 불렀다.

“네 수컷은 대체 왜 이 모양이지?”

“이자를 왜 저택에 초대한 건가?”

이러쿵저러쿵해도 꽤나 합이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아침을 먹고 난 뒤 난 세바스찬을 따라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 앞엔 고급스러운 장식이 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거예요?”

“예, 열어 보시죠.”

상자를 열자, 그 안엔 눈에 익숙한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지난번에 아가씨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비슷하게 만들어 보았는데 어떻습니까?”

“처음 보는 물건인데…… 어디에 쓰이는 물건이에요?

같이 따라온 릴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물었다.

“놀이에 쓰이는 물건이야.”

“놀이요?”

“응.”

설마하니 이 세계에서 이 물건을 보게 될 줄 몰랐다.

“이게 저번에 말한 야구인가?”

“맞아.”

릴리에게 대답하듯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다 뒤를 돌아보았다. 일리온이 고개를 숙이고 물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건이 생각보다 별로인가요?”

내 표정이 기대했던 것보다 좋지 않아 보이는지 세바스찬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뇨.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굉장히 잘 만든 물건이에요.”

몇 주 전 세바스찬이 웬일로 야구에 관해 묻기에 놀이를 설명하기 위해 적당히 그림 몇 장을 그려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의 설명만으로 만들었다기엔 상당히 잘 만들어진 물건들이었다.

다만 지금은 이걸 가지고 놀 마음의 여유가 없을 뿐이었다. 현실 세계의 물건을 보게 돼서 기쁜,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럼 나가서 한번 해 보실래요?

“아뇨, 괜찮아요. 하게 되면 옷도 더러워지고, 곧 수업도 받아야 하니까……. 다만, 물건은 기쁘게 받을게요.”

“어떻게 하는 놀이지?”

세바스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얘기를 끝내려는데 일리온이 끼어들며 물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라 그런지 관심을 두는 모양이었다.

“음, 9명씩 두 팀으로 나눠서 하는 놀이인데……, 말로 설명하긴 좀 복잡하네요.”

어차피 설명해 봤자 할 것도 아니기에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지 마시고, 나가서 한번 해 보죠?”

“……네?”

세바스찬이 꾸러미를 들며 제안했다.

“그렇지만…….”

“공작님께서도 궁금해하시고, 저도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놀이가 뭔지 궁금하거든요.”

“나도 궁금하다.”

언제 나왔는지 스피넬까지 고개를 들이밀고 한마디 거들었다.

“음……, 그럼 잠깐 해 볼까요?”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갑작스레 결정된 일에 난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멀리서 루카스가 우릴 발견하고 달려왔다.

“다들 어쩐 일이십니까?”

일리온은 그렇다 치고, 세바스찬에 손님인 스피넬까지 동행하니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놀이를 해 보려 하네. 사람이 좀 필요한데 괜찮을까?”

세바스찬의 제안에 루카스가 알겠다며 한쪽에서 훈련을 받던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어쩐지 일이 커지는 것 같은데…….

루카스의 손짓에 스무 명 정도 되는 기사단이 우리 쪽으로 모여들었다.

난 그들에게 간단하게 규칙을 설명해 주고, 각각의 도구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몇 가지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럼 룰은 설명해 드렸으니 팀을 나눠서 놀이해 볼게요.”

팀은 간단하게 제비뽑기로 나누었다. 나와 루카스가 한 팀이 되었고, 일리온과 스피넬이 한 팀이 되었다. 그리고 세바스찬은 심판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막 연습 게임을 시작하려는데.

“다시 뽑아.”

“…….”

스피넬이 종이를 구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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