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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64)화 (64/159)

64화

한참을 날 끌어안고 있던 일리온은 겨우 팔을 풀고 날 살폈다.

“괜찮나? 다친 데는…….”

내 얼굴을 집요하게 뜯어보던 일리온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졌다.

“아까 그자가 이렇게 한 건가?”

“아니, 아니에요. 그 사람은 제 친구예요.”

괜한 의심의 불똥이 스피넬에게 튈까 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가 이렇게 한 거지?”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때마침 바닥을 구르는 베르텔과 함께 스피넬이 나타났다.

“아까 그놈을 잡아 왔다.”

“…….”

“이제 어떡할 거냐? 난 불에 태워 죽이고 싶다만.”

스피넬은 태연하게 날 바라보며 물었다. 이미 결론은 정해진 모양인데 왜 내 의견을 묻는 걸까. 답정너인가…….

스피넬을 보더니 일리온이 정말 친구 맞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다.

“저, 스피넬 님. 보통은 잘못한 인간은 감옥에 보내는데요.”

“아까 우리가 갇혀 있던 거기?”

“비슷한 곳이죠.”

“뭐 하러? 그냥 목을 따 버리면 되는데?”

내 대답에 스피넬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되물었다.

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보통은’ 그렇게 한다고.

스피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심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교주가 일리온을 발견하고 황급히 기어서 다가왔다.

“고, 공작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저 마녀가 마을 사람들을 죄다 죽일 생각입니다.”

일리온은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교주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일리온의 반응이 시큰둥 하자 교주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저, 저는 셀바스의 영주 베르텔입니다. 부디 선대 공작님과의 인연을 생각하셔서 한 번만 더 저를 도와주시면…….”

“역시 그냥 불에 태워 죽여야겠다.”

스피넬은 교주를 죽이기 위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잠깐 기다려.”

일리온이 스피넬을 막으며 섰다.

“상관없는 인간은 비켜라. 내가 볼일 있는 건 네 뒤에 놈 하나뿐이니까.”

“이자에게 죄가 있다면 재판으로 다스릴 일이다.”

“우릴 죽이려 한 놈에게 자비를 베풀란 말이냐?”

“……죽이려 했다고?”

스피넬의 대답에 일리온이 되물었다.

“뭐, 나야 별일 없었지만 저 아이는 불에 태워질 뻔했지.”

교주를 바라보는 일리온의 눈이 점점 싸늘해져 갔다.

“그렇군.”

그렇게 대답한 일리온은 한 발짝 옆으로 비키며 말했다.

“원한다면 데려가. 못 본 걸로 하지.”

“자, 잠깐만, 공작님. 절 이대로 버리실 겁니까?”

베르텔은 일리온에게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서, 선대 공작님과의 인연이 있지, 이러실 수는……!”

“아니면 내 손으로 죽여 줄 수도 있다만.”

일리온은 검을 빼 들고 베르텔을 겨눴다. 겁에 질린 베르텔은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스피넬이야 그렇다 치고, 일리온까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저, 공작님. 그러지 마시고 그냥 감옥에 가두는 건 어떨까요?”

이대로 뒀다간 기어이 피를 볼 것 같아 난 서둘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말렸다. 여기서 정상인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심히 유감이었다.

“넌 정말 성격이 무르구나. 뭐, 네가 정 그러고 싶다면 알겠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굴던 스피넬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설득하려면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흔쾌히 제 부탁을 들어주시네요.”

“그야, 저놈한테 죽을 뻔한 건 내가 아니라 너였으니까. 결정권은 네게 있는 거 아니겠냐?”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죽지 않을 거라 자신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스피넬다웠지만.

일리온 역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함께 온 병사를 시켜 교단을 잡아들이라 명령했다.

“이제 돌아가자꾸나.”

“어딜?”

사건이 대충 해결되는 걸 보고 스피넬은 내게 집에 돌아가자 제안했고, 그 말에 반문한 건 일리온이었다.

“내 집으로 갈 생각이다.”

“라벤느는 두고 가.”

그의 대꾸에 스피넬은 몸을 완전히 일리온 쪽으로 돌렸다.

“그럴 수 없지. 그 아이는 내 가족인걸.”

“가족?”

일리온은 팔짱을 끼고 날 바라보았다.

“내가 모르는 가족이 있었군?”

“그게 설명하자면 좀 긴데…….”

왜 자꾸 난처한 상황의 한가운데 끼게 되는 걸까.

“의자매를 맺었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언니 동생 하기로 했어요.”

“언니 동생? 그럼 내가 언니인 거냐?”

서둘러 일리온에게 둘러대는데 내 말을 듣던 스피넬은 살짝 볼이 상기된 채로 끼어들었다.

“……그, 그렇죠. 스피넬 님이 언니죠.”

“그래? 그거 괜찮구나!”

갑자기 왜 기분이 좋아진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쁜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이럴 게 아니라 스피넬 님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는 건 어떨까요?”

“……뭐?”

“응?”

두 사람이 무슨 소리냐는 듯 날 바라보았다.

“스피넬 님이 사는 곳은 곧 개발될 거라 위험하잖아요. 언제까지 거기서 지낼 수도 없고…….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는 걸 도와드릴게요. 그때까지만 공작저에서 지내는 건 어때요?”

일리온과 스피넬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지 몹시 궁금하긴 했지만 산속에서 맛없는 음식을 먹으며 사는 생활은 그만하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문명이라는 건 인류의 지혜가 쌓아 올린 대단한 것이더라고. 그러니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

그러나 일리온은 자신의 허락도 없이 진행되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괜찮죠, 공작님?”

“괜찮을 리가…….”

“아가씨께서 초대하신 첫 손님이신가요? 이거 저택에 돌아가면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군요.”

안 된다고 거절하려던 일리온 대신 익숙한 목소리가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세바스찬! 릴리!”

언제 도착한 것인지 두 사람이 뒤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아가씨!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응. 괜찮아.”

“괜찮긴요.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다치셨고요. 정말, 곧 결혼하실 분이 이게 뭐예요.”

내 손을 붙잡은 릴리는 결국 날 보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전 정말 아가씨께서 그대로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다고요. 이렇게 살아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걱정 많이 했어?”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모두 날 찾는 걸 포기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사라진 5일 동안 계속 날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보다 옆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펑펑 울던 릴리는 눈물을 닦아 내며 물었다.

“아, 동굴에서 떨어졌을 때 만났어. 위험할 때마다 날 도와준 분이야.”

“어머. 그럼 아가씨를 구해 주신 생명의 은인이시네요!”

“그런 셈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바스찬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생명의 은인을 그냥 돌려보낸다니! 셀레스타인가에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안 그렇습니까, 주인님?”

세바스찬의 물음에 결국 일리온은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네. 마음대로 하게.”

***

“헉, 헉…….”

이불을 박차고 눈을 떴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고,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겁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불이 꺼진 저택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끔찍한 꿈이었다.

일리온과 릴리, 세바스찬…….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꿈에 나왔다.

온몸이 피에 물들어 하나같이 끔찍한 몰골을 한 채로.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날 원망하고 있었다.

어떻게 자신들을 저버릴 수 있는지, 어떻게 다 알면서도 혼자만 살 생각을 했는지…….

그들 사이에서 난 겁에 질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아직 악몽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왜 이런 꿈을 꾸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내가 한 결심이 과연 옳은 것인지. 내 목숨만이라도 살려 보겠다 발버둥 치는 게 맞는 것인지.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에게 질문했다.

당연히 알고 있다. 내가 옳지 못하다는걸.

하지만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시간도 부족했고, 가진 능력도 없었다. 미래를 바꾸겠다며 호기롭게 나서기엔 당장 코앞에 닥친 일조차 해결하지 못했으니까.

하다못해 일리온의 저주를 풀 능력이라도 주어졌다면, 그랬더라면…….

하지만 난 성녀가 아니라 라벤느였다.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이 이야기에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단순히 라벤느의 전철을 밟아 악녀로서 충실하면 됐던 건지…….

생각이 꼬리를 물며 그저 빙빙 돌기만 할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창밖을 내려다보자 건너편 집무실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일리온은 아직 일을 하는 걸까? 밤이 늦었는데?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일리온의 집무실 쪽으로 향했다.

노크하고 들어가자 내가 찾아온 것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일리온이 날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안 자고 있었나?”

“꿈에 공작님이 나오길래 보고 싶어서 찾아왔지 뭐예요?”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자연스럽게 늘 내가 앉던 자리로 향했다.

“일이 많으세요?”

“쌓인 일이 좀 있어서…….”

“저 때문에 일이 밀린 거예요?”

“일정 조절을 못 한 건 내 탓이지, 그대 때문은 아니야.”

날 찾는 동안 쌓인 일처럼 보였지만 일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모양인데, 차라도 한 잔 줄까?”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일리온이 되물었다. 축객령을 내리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땐 차 한잔은커녕, 이 자리에 앉는 것조차 끔찍이 싫어했는데…….

지금은 그 정도로 싫지는 않은 걸까, 아니면 내 뻔뻔함에 익숙해진 걸까. 어느 쪽이든 바뀐 일리온의 모습은 새삼스러웠다.

“실은 궁금한 게 있는데, 어떻게 절 찾으셨던 거예요?”

“미카엘의 도움을 받았어.”

“미카엘이요?”

“그래. 그대에게 걸어 놓은 추적 마법으로 계속 쫓았지만, 쉽게 위치 파악이 안 돼 시간이 걸렸네.”

위치 파악을 못 한 건 스피넬의 결계 안에 있어서였나?

“구하러 가는 게 늦어서 미안하네. 좀 더 빨리 갔어야 하는데…….”

일리온이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나야말로 일리온이 날 찾는 걸 포기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공작님은 제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생각했어.”

맞은편에 앉은 일리온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내 질문에 답했다. 그럼 왜 날 계속 찾았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건 아니더군.”

“왜요?”

내 물음에 일리온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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