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특이해?”
스피넬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새하얀 은발 머리에 붉은 눈동자는 평범하지 않았으니까요.”
“고작 그걸로 세라스를 마녀라고 의심한다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땐 모두 힘들고 지쳐 있었습니다. 그 분노를 풀어야 할 곳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모든 원흉을 마녀의 탓으로 돌려 버린 거죠.”
스피넬은 주먹을 꽉 쥐었다. 넘실거리는 분노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끓어올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라스가 쉽게 죽었을 리 없다.”
아무리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녀는 드래곤이었다. 인간들 따위에 질 리 없었다.
“네. 그분은 강하셨죠. 마을 사람들 정도는 쉽게 제압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노파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 나갔다.
“마을 사람들로 어쩌지 못하자, 영주님께서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셨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에서 기사단이 찾아왔죠. 꽤 유명한 기사단이라고 하더군요.”
그다음 내용은 예상 가능한 이야기였다. 기사단은 강했고, 세라스는 결국 인간들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세라스가 고작 인간의 손에 죽다니. 하지만 노파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너는 세라스를 마녀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스피넬의 물음에 노파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15년 전 병에 시달리며 다 죽어 가던 저 아이를 살려 준 게 그녀였어요.”
그렇게 말을 꺼낸 노파의 얼굴은 후회로 물들어 있었다.
“전 그녀를 마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죠. 모두 그녀가 마녀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아니,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었으니까요.”
참으로 뻔뻔한 핑계였다.
역시 세라스의 판단은 틀렸다. 인간은 나약하고, 비겁하고, 은혜를 모르는 놈들뿐이었다.
“그렇군. 감히 도와준 은혜도 모르는 놈들이었군. 너도, 저기 저놈도.”
차갑게 가라앉는 세라스의 눈을 바라보며 노파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손이 몸에 닿은 것도 아닌데 숨이 가빠 왔다. 스피넬에게서 나오는 기운에 눌린 노파는 어렴풋이 눈앞의 여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 죄송합니다. 부디 목숨만은…….”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피넬은 그 부탁을 들어줄 만큼 자비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세라스와 달랐으니까.
스피넬은 세라스를 마녀로 몰아간 마을을 불태웠다. 그녀의 분노를 닮은 불꽃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스피넬은 세라스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날개를 다쳐서 어떡해?’
레드 드레곤의 무리를 벗어났던 그 날, 세라스는 한쪽 날개를 잃었다. 드래곤으로서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찢어진 날개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묻자 인간으로 변신한 세라스는 씩 웃었다.
‘괜찮아. 난 원래 이 모습을 더 좋아하거든. 그리고 이 모습일 땐 날개가 필요 없어.’
세라스는 그렇게 다친 상처를 가렸다. 그리고 스피넬의 다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자신의 상처가 더 아플 텐데도…….
‘앞으론 여기서 지내도록 해.’
‘여기서?’
‘그래.’
‘그래도 돼? 난 쓸모가 없는데?’
무리 안에서 도태된 이는 철저하게 버려졌다. 마나의 운용이 서툴렀던 스피넬은 도태된 드래곤 중 하나였고, 그녀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러나 세라스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이지. 앞으론 내가 네 가족이 되어 줄게. 마법을 다루는 방법도, 사냥하는 방법도 모두 알려 줄 테니까.’
‘가족? 그게 뭔데?’
레드 드래곤은 열화의 나무가 맺는 열매에서 태어난다. 당연히 드래곤 사이에는 가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음……. 글쎄.’
세라스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자신 없게 답을 내놓았다.
‘죽지 않게 돌봐 주는 사람?’
‘뭐야……. 그게.’
‘그, 그렇지만. 넌 사냥도 잘 못 하고 마법도 잘 못 쓰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가족이 되어 가르쳐 줄게! 그렇지! 앞으론 날 언니라고 불러.’
세라스는 뭐가 즐거운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언니는 또 뭔데?’
스피넬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제 질문에 세라스는 활짝 웃으며 답해 주었다.
‘동생을 지켜 주는 사람!’
마지막으로 언니라 불러 달라던 세라스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언니라고 불러 줄걸…….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드래곤은 영겁의 세월을 사는 존재였다. 그래서 스피넬은 막연히 세라스가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생명을 잉태하고 힘을 잃어 가도, 이렇게 쉽게 이별이 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이별이 이토록 슬플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스피넬은 한동안 산속에 틀어박혔다. 안식기도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력한 기분이었다.
***
또다시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날도 둥지에서 날아가는 나비를 보며 스피넬은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순간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놀란 나비가 날갯짓을 하며 달아났다.
최근 들어 주변이 소란스러웠고, 이 소음도 그 소란의 하나였다. 결계를 쳤는데도 이 정도라니.
짜증이 치밀어 몸을 일으키려던 스피넬의 머리 위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 물체는 제 이마를 데구르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벌레인가 싶어 살펴보니 인간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결계를 뚫고 들어온 거지?
스피넬은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살폈다.
그녀에게서 어쩐지 세라스의 냄새가 났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얼굴을 가져다 대자 그 인간은 겁도 없이 자신의 피부를 만져 보다 자신의 눈을 사정없이 찔렀다.
정말 무례한 인간이었다.
그대로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최악이었던 첫 만남이었다.
“아하하하하.”
교주의 옷깃에 벌레를 집어넣고 그 틈에 성물을 빼앗아 바닥에 내리치는 라벤느의 모습에 스피넬은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만에 이렇게 웃어 본 것인지 모르겠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어 대던 스피넬은 포박당해 울상을 짓는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녀를 죽이지 못했던 걸까 하던 고민이 비로소 풀렸다.
라벤느와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마치 세라스와 함께 있을 때처럼. 그러니 죽일 수 없었지.
스피넬은 미약하게나마 돌아온 마나로 날개를 펼쳤다.
몸을 포박하던 밧줄이 풀리며 자유를 되찾은 스피넬은 라벤느를 안아 들고 높게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소리를 치며 달아났다.
“아,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어!”
아래는 멍청한 인간들이 그려 내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수없이 봐 온 광경은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없었다.
“스피넬 님, 마나가 돌아온 거예요?”
라벤느가 물었다.
“그래. 네 덕분에.”
“다행이다.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요.”
“걱정했느냐?”
“당연하죠.”
가만히 인간들의 편을 들면 될 일을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구하길 택하다니.
“너도 어지간히 이상한 인간이구나.”
“……갑자기요?”
라벤느가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난데없이 날아온 돌멩이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짜증 난 표정이었다.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
아직 마나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마법을 쓰는 건 무리였다. 뭐, 손으로 하나씩 목을 따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고.
“넌 이 멍청한 인간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 인간들에게 복수를 해 주고 싶은 건 라벤느도 마찬가지일 테였다.
스피넬은 선심을 쓰듯 라벤느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
아래를 내려다보자 허공에 떠오른 두 다리가 아찔했다.
“일단 저 좀 먼저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고소 공포증이 있는데…….”
“라벤느!”
눈을 질끈 감고 스피넬에게 내려 달라고 부탁하려는데,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일리온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가 몰고 온 말은 스피넬의 아래에서 멈추었다.
오랜만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기간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반갑게 느껴졌다.
“저자는 또 누구냐? 교주랑 한패인가?”
“그게 아니라……. 제 약혼자예요.”
“그게 뭔데?”
“결혼을 하기로 한 사람.”
스피넬은 내 말에 일리온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흐음……. 어쩐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스피넬. 저 좀 내려 주시면 안 돼요?”
“그래, 알겠다. 난 그 교주란 놈을 잡아 오도록 하지.”
내 부탁에 스피넬은 날 아래로 내려 주더니 곧바로 교주를 찾아 날아가 버렸다.
일리온이 내 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며 오만 생각이 교차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혹시 베르텔이 부른 건가? 그거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셀레스타인가에 빚을 만들어 두겠다고 했던 사람이니까.
벌써부터 그의 잔소리가 걱정스러웠다.
아니, 잠깐만.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난 그냥 사고에 휘말렸을 뿐인걸?
“라벤느…….”
“오, 오랜만이네요, 공작님. 이게……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좀 긴데…….”
그러나 매번 사고를 치고 혼나는 패턴이 익숙해서인지 내 이름을 낮게 부르는 그것만으로도 반사적으로 변명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일리온은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왔다.
“잠깐만요. 미리 말하지만 전 이번에 진짜로 잘못한 게 없…….”
다급하게 결백을 주장하려던 내 목소리는 그의 품에 삼켜지고 말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날 끌어안은 팔과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