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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62)화 (62/159)

62화

계절이 바뀌고, 몇 번의 겨울이 찾아왔다. 눈이 녹은 자리엔 싹이 트고 새들이 찾아왔지만, 몇백 번을 보아도 똑같은 봄은 어떠한 감흥도 자아내지 못했다.

어제는 오늘과 같았고, 내일 역시 오늘과 같을 것이다.

세라스마저 없는 둥지는 조용했다.

동굴 안에 들어온 나비를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며 구경하던 스피넬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결국,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세라스가 산다는 집은 마을 외곽의 작은 오두막이었다.

낡고 작은 오두막 문을 두드리자 낯익은 여자가 반갑게 문을 열었다.

“스피넬!”

“놀러 왔어.”

퉁명스럽게 중얼거리자 세라스는 스피넬을 껴안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잘 왔어. 어서 들어와.”

오두막 안쪽의 모습 역시 바깥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낡은 식탁과 부엌, 그리고 한쪽에 침대와 요람이 놓여 있다.

조금 특이한 게 있다면 집 안 곳곳에 놓인 잡초 더미였다.

“저 풀떼기는 다 뭐야?”

“아, 저건 약초야.”

“약초?”

“응.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있어. 요즘 주변에 병이 돌더라고. 마침 내가 잘 아는 약초로 치료가 가능하길래 뜯어다 말리는 중이야.”

스피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까지 인간을 도와서 뭐 하게?”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세라스는 스피넬에게 의자를 권했다. 인간들의 가구가 익숙하지 않은 스피넬은 어색하게 테이블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세라스는 인간의 삶에 이미 적응이 끝난 모양인지 자연스럽게 부엌에서 컵과 차를 꺼내 물에 우렸다.

스피넬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작은 오두막은 이내 향긋한 차 냄새로 가득 찼다.

“엘라인은?”

“응?”

“엘라인은 어디 갔어?”

소박한 집 안의 모습을 둘러보던 스피넬은 한 입 거리도 안 될 것 같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 그게…….”

세라스는 머뭇거리며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작년에 죽었어.”

“……뭐?”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네가 있는 곳이 멀다 보니 텔레포트 하는 것도 힘들지 뭐야.”

세라스는 그렇게 말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리곤 찻잔을 건넸다.

“죽었다고? 왜?”

“우리가 이곳에 터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염병이 돌았거든. 치료를 해 보려고 했는데 원래도 몸이 약하다 보니…….”

“망할 자식! 이럴 줄 알았으면 너한테 미움을 받더라도 혼인하기 전에 내 손으로 죽여 버리는 건데!”

화가 난 스피넬은 테이블을 탕 쳤다. 찻잔이 움직이며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그런 말 하지 마! 그리고 애가 듣잖아. 예쁜 말 좀 써.”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라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아이참. 기껏 재웠는데 너 때문에 또 깨 버렸잖아.”

세라스는 스피넬을 나무라며 요람으로 다가가 우는 아이를 달랬다.

스피넬은 그런 세라스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라스는 말보다 마법이 먼저 나갔었다. 그녀의 잔소리는 늘 공중에 매달려 들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스피넬은 이를 아득 갈았다.

여기서 스피넬의 둥지까지는 마법을 다루는 게 서툰 자신조차도 어렵지 않게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 거리가 힘들다는 얘기는 그녀의 마력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아끼던 인간은 결국 죽어 버렸고, 그녀는 마력을 잃었다.

게다가 허름한 집은 인간이 아닌 자신이 보기에도 별 볼 일 없어 보였다.

그렇게 동경하던 인간의 인생이 고작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이게 네가 말하는 행복이야?”

아기를 달래던 세라스는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걸 묻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니까.”

“……스피넬, 잠깐 이리 와 볼래?”

세라스는 화를 내는 스피넬의 손을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그녀에게 끌려간 스피넬은 요람 앞에 섰다.

“내 아이야. 귀엽지?”

안에는 어린아이가 언제 울었냐는 듯 방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손을 잡아 줘 봐.”

“……부, 부서질 것 같은데.”

“괜찮아.”

세라스의 권유에 스피넬은 천천히 아이의 손을 잡았다. 손은 작고 부드러우면서도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아 무섭기도 했다.

스피넬은 잠시 얼어붙어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제가 만난 어떤 인간보다도 작고 약해 보였다.

“스피넬, 난 요즘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나, 슬픔을 이겨 내는 방법, 혹은 흘러가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같은 거.”

“……그게 뭔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뭐며, 슬픔은 뭐고, 시간의 소중함은 또 뭐란 말인가.

“인간들이 평범하게 배우는 감정들이야.”

“…….”

“분명 모든 순간이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난 지금이 더 좋아. 엘라인은 없지만 지금 나에겐 이 아이가 있으니까.”

세라스는 그렇게 말하며 바보같이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괜히 열을 내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대체 뭐가 그리 좋은지 모를 일이었다. 하긴, 제가 언제는 그녀를 이해한 적이 있던가.

결국, 끝내 세라스를 이해할 날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걸 알기에.

스피넬은 그녀를 설득하길 포기하고, 대신 주머니에서 동그란 구슬을 꺼내 건넸다.

“자, 엘프의 자장가.”

“어머, 정말 가져다준 거야? 난 네가 그 약속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세라스는 뛸 듯이 기뻐하며 물건을 받았다.

“……약속은 무슨. 강요였으면서.”

스피넬은 툴툴거리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벌써 가려구? 좀 더 있다 가지?”

“생각보다 너무 초라해서 볼 것도 없는걸. 그리고 난 당분간 안식기에 들어갈 거야.”

“벌써 그럴 때가 된 거야?”

“그래, 이번에 들어가면 20년 정도 잠만 잘 거야.”

스피넬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다음에 보는 건 20년 뒤겠네.”

“20년이야 어차피 금방 가잖아. 뭘 새삼스럽게.”

몇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녀를 알고 지냈고, 그사이에 거쳐 온 안식기만 해도 한두 번은 아니었다.

레기아스처럼 몇백 년씩 안식기를 거치는 드래곤들에 비하면 스피넬의 안식기는 그리 길지도 않았고.

“그건 그렇지…….”

세라스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스피넬.”

“왜?”

“한동안 못 보는 것도 아쉬운데 가기 전에 언니라고 한 번만 불러 줄래?”

“웬일로 그 타령 안 하나 했네.”

“왜? 옛날 생각도 나고 좋잖아.”

세라스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싫어. 너한테나 좋은 옛날이겠지. 난 너한테 당한 기억밖에 없거든?”

“그런가?”

뭐가 즐거운지 키득키득 웃는 세라스를 뒤로하고 스피넬은 집을 나왔다.

그로부터 20년 후. 스피넬은 마침내 긴 안식기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찾아간 세라스의 집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말도 없이 거처를 옮겼나?”

어쩌면 자신이 안식기에 들어간 동안 말할 타이밍을 놓친 것일 수도 있었다.

스피넬은 근처 밭을 일구던 농부에게 세라스의 행방에 관해 물었다.

“아, 그 마녀? 죽은 지 오래됐지? 한 15년쯤 됐나?”

“……죽어?”

“그래. 영주님이랑 저기, 수도에서 병사들이 와서 잡아갔지.”

“왜?”

“말했잖아. 마녀라고.”

“세라스는 마녀가 아니다.”

스피넬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거, 머리도 허옇고, 맨날 집에 틀어박혀 이상한 풀 같은 걸 키우던 여자 찾는 거 아냐?”

하얀 머리와 약초 이야기를 들어 보니 스피넬이 기억하는 세라스가 맞았다.

“그렇다만.”

“그럼 맞네. 안 그래도 그 여자가 키우던 풀 때문에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서 난리였다고.”

“풀이 아니라 약초였다고 들었는데?”

“약초는 무슨, 독초지 독초.”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내가 그때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내 손으로 그 마녀를 잡지 못한 게 한이라니까.”

아무리 세라스의 성격이 별나도, 병을 퍼트리는 재주는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아끼던 엘라인마저도 전염병으로 잃었던 그녀였다.

“세라스는 이 마을에 와서 아끼던 남편을 전염병으로 잃었어. 세라스가 병을 퍼트렸을 리 없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 남편이란 사람도 전염병이 아니라 마녀한테 잡아먹힌 거 아니야?”

스피넬은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간단하게 제압당한 남자는 발버둥을 쳤지만, 스피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엔 역부족이었다.

“한 번만 더 세라스를 마녀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 버리겠다.”

“자, 잘못했어. 그러니 이 손 좀 놔…….”

남자는 스피넬의 손아귀에 잡혀 숨을 헐떡였다.

이대로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상황을 지켜보던 노파가 다급히 스피넬 쪽으로 달려왔다.

“아이고, 잠깐, 잠깐만요. 제가 다 말해 줄 테니, 부디 이 아이를 놔주세요.”

“내가 왜?”

“부탁드립니다, 나으리. 제가 다 말씀드릴 테니 아이는 제발 살려 주세요.”

스피넬은 노파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다 손아귀에 힘을 풀어 남자를 놓아주었다.

남자는 기절한 모양인지 땅바닥에 축 늘어졌고, 노파는 황급히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숨을 쉬는 걸 확인하고 그녀는 스피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노파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15년 전, 마을은 기나긴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마을 사람들이 영주님께 살려 달라 찾아갔지요.”

스피넬은 지루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대체 세라스는 언제 나오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심기를 눈치챈 노파는 서둘러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영주님은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지금까지 기근과 전염병을 모두 마녀의 짓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녀를 잡아 오면 포상을 하겠다고 하셨죠. 하지만 이런 마을에 어디 마녀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외모가 조금 특이했던 그녀를 마녀로 몰아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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