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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61)화 (61/159)

61화

“빨리빨리 움직여.”

“가고 있잖아. 명령하지 마라.”

스피넬은 제게 수갑을 채운 신도를 한 번 노려보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눈빛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신도는 순간 움찔하며 스피넬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겁먹지 마. 어차피 마법도 못 쓰니까.”

뒤에 있던 다른 신도가 작게 속삭였다.

그 말에 스피넬은 발끈했지만, 그래도 꽤나 순순히 두 사람을 따라 나갔다.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아가씨께서도 나가시지요.”

“수갑은 안 풀어 주시나요?”

“정화 의식이 끝날 때까지만 참아 주세요.”

날 감옥에서 끌고 나가는 신도는 그렇게 설명했다.

밖에 나와 보니 해가 중천이었고, 교인들이 신전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이비라고 비웃었던 것치고는 신전의 규모도 꽤 컸고, 앞에 모인 교인들의 수도 생각보다 많았다.

교인들 앞쪽엔 나무로 된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스피넬은 그 단상 위에 묶여 있었다.

화형식을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화형식에 앞서 정화의 의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주의 말에 내 양쪽 팔을 잡고 있던 신도들은 날 교주 앞으로 끌었다. 내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 부인이 마녀한테 홀렸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겠군.

“너무 겁먹지 마세요. 의식은 금방 끝날 겁니다. 그 후에는 마녀가 걸어 놓은 세뇌도 풀릴 겁니다.”

베르텔은 웃으며 말했다. 사실 신성력도 없는 교주가 정말 정화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난 세뇌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신도들은 그가 눈앞에서 기적을 보여 줄 거라 의심치 않았다. 교주의 이름을 외치는 그들의 모습은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

교주는 정화의 의식을 행하겠다며 내 머리 위로 성수를 뿌렸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건 그냥 물이었다. 그냥 좀 미지근한 물.

“어둡고 사악한 기운이여, 물러가거라, 물러가거라.”

이 무슨 촌극인지.

말도 안 되는 주문을 외우는 교주와 그런 교주의 이름을 부르는 신도들을 보아하니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다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래. 사이비 교주라면, 걸을 수 없는 환자가 걷는 기적쯤 보여 줘야 하는 법이지.

난 고개를 들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럴 수가, 지금 제가 여기서 뭘 하는 거죠?”

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정신이 드십니까?”

교주는 내 격한 반응에 약간 주춤했다.

“제가 설마 사악한 마녀의 꼬임에 넘어가 정신을 잃었나요?”

그는 여전히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내가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내 인자한 표정으로 날 다독였다. 괜히 교주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그는 날 구속하던 수갑을 풀어 주고 신도들 앞에 내보였다.

“보셨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마녀에게 세뇌당한 가여운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한 신자들은 베르텔의 이름을 외치며 무릎을 꿇었다. 세뇌는 누가 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이 광기에 편승할 필요가 있었다. 난 신도들과 같은 표정을 연기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교주에게 다가갔다.

“아아, 교주님. 당신의 어린양이 오늘 이렇게 구원을 받습니다. 교주님이 없었다면 전 평생 그 어두운 동굴에서 마녀에게 고통받았겠죠. 신께서 가장 낮고 어두운 곳을 살피고자 교주님을 이 세상에 내려 주신 게 분명해요. 교주님은 제 인생의 빛이고 구원이십니다.”

그런 내 주접이 마음에 들었는지 베르텔은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아닙니다, 자매님. 자매님을 끔찍한 마녀에게서 구원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교주님, 손 한 번만 잡아 주시면 안 될까요?”

그의 앞에 다가가 동경하던 연예인을 만난 소녀팬처럼 손을 내밀자 그가 두 손을 뻗으며 내게 다가왔다.

보는 눈이 많으니 내 제안을 쉽사리 내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스스로가 교주라는 사실에 취한 인간인 듯했다.

손을 잡아 주는 대신 포옹을 해 주려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뭐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포옹을 하는 편이 좀 더 편했으니까.

그는 날 끌어안으며 등을 몇 번 토닥이더니 떨어졌다.

그리고…….

“으, 으악!”

기겁하며 방금 낚아 올린 고기마냥 팔딱였다.

“이, 이게 뭐야. 몸 안에 뭐가 기어 다니고 있……. 으악, 악!”

실은 포옹을 하는 순간 교주의 목깃 사이로 마나 쪽쪽이를 집어넣었다.

벌레는 마나가 없는 환경에 오래 노출돼서 그런지 내 손안에서 연신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걸 목깃으로 넣었으니 끔찍하겠지.

교주는 이내 쥐고 있던 지팡이까지 내팽개치고 벌레를 찾기 위해 기괴하게 팔을 휘저었고, 보좌해 주는 신도들이 다급히 그를 도왔다.

그사이 난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잽싸게 주워 들었다.

순간 마주친 교주의 눈빛에 불안감이 감돌았다.

어머, 벌써 눈치챘어? 그럼 내가 다음에 뭘 할지도 알겠네.

“아, 안 돼!”

내 행동을 감지한 교주는 손을 뻗어 날 저지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깡!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지팡이 상단에 박힌 보석에 미세한 금이 갔다.

난 그대로 몇 번 더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당장 막아! 어서!”

교주의 명령에 신도 몇이 내게 다가와 양쪽 팔을 잡아챘다.

“스피넬 님! 마나 돌아왔어요?”

난 다급히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피넬은…….

“아하하하!”

웃고 있었다.

아니 지금 이게 웃을 상황이야? 이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웃는다고?

“너, 정말 웃긴 인간이구나.”

“…….”

난 끌려가는 상황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스피넬에게 소리쳤다.

“죽게 생겼는데 웃지만 말고요!”

“하지만 웃긴 걸 어쩌란 말이냐.”

아, 정말. 내 회심의 작전이 이렇게 물거품이 되다니!

“저자도 묶어서 단상에 세워라. 마녀와 함께 화형에 처하겠다.”

반쯤 망가진 지팡이를 되찾은 교주가 분노에 차 외쳤다.

두 손발이 결박된 채로 단상 위에 올려진 난 불을 지피기 위해 횃불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스피넬 님…… 정말 마나 안 돌아왔어요?”

그리 밝지 않은 내 미래의 마지막 모습을 수도 없이 예상했지만, 화형은 없었다.

설마하니 클라우스도 아니고 일개 사이비 교주한테 마녀의 수하로 몰려서 죽는 미래라니!

이쪽은 이렇게 절망적인데, 스피넬은 여전히 뭐가 재밌는지 발을 굴려 가며 웃고 있었다. 손이 자유로웠다면 배를 잡고 굴렀을지도 모르겠다.

“불을 지펴라!”

교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신도들은 횃불을 들어 기름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순식간에 타오르며 눈앞에 가득 찼다.

“우리 둘 다 불에 타 죽게 생겼다니까요!”

“아하하. 아, 그래, 그래. 넌 불에 타면 죽는 몸이었지 참.”

그렇게 말하며 스피넬은 웃음을 멈추었다.

“참으로 멍청한 짓이야. 다른 것도 아니고, 불에 태워 죽일 생각을 한다니 말이야. 그렇지 않느냐?”

그 혼잣말을 끝으로 스피넬을 구속하던 사슬이 끊어지고, 등 뒤로 커다랗고 붉은 날개가 돋아났다.

***

인간은 약하고 하찮은 존재였다. 스피넬은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숨길 한 번에도 목숨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보잘것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세라스는 언제나 그런 자신의 의견에 반대했다.

“스피넬, 인간은 그리 약하지 않아. 그들의 삶은 유한하지만, 그래서 더 불꽃처럼 반짝이지.”

그리고는 인간이 얼마나 멋진 존재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별로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고 또 했다.

그럴 때마다 스피넬은 세라스가 그저 조금 별난 드래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 인간이랑 혼약을 맺겠다고?”

“응.”

그녀는 어느 날 제게 폭탄과도 같은 선언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미쳤구나?”

“언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스피넬은 인상을 쓰며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이건 그냥 좀 별난 게 아니었다.

드래곤과 인간이라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드래곤한테 언니는 무슨.”

“세상에. 내가 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거 못 입어 가며 널 키웠는데 그런 식으로 말할 줄이야…….”

세라스는 눈물을 훔치는 척하며 손가락을 들어 마법을 날렸다. 스피넬은 속수무책으로 그녀의 마법에 당하고 말았다.

“이거 풀지 못해? 내가 언제까지 너한테 당하고 살 거라 생각하는 거야?”

날갯죽지가 묶인 채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스피넬은 둥지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야, 내가 죽을 때까지.”

“그게 무슨 소리야?”

세라스는 스피넬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말 그대로지.”

“무슨 헛소릴…… 설마?”

드래곤은 무한한 시간을 사는 존재였다. 그래서 죽음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들이 죽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생명력을 타인에게 나눠 줄 때뿐. 그리고 그 경우는…….

“아이를 잉태한 거야?”

“응.”

세라스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세라스가 평범한 드래곤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이상했으니까.

레드 드래곤 무리에서 마나 조절을 못 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으며 괴롭힘을 당하던 스피넬을 구해 준 게 세라스였다.

자신의 한쪽 날개를 희생하면서까지.

자기중심적이고, 약육강식의 논리에 움직이는 드래곤들 사이에서 그녀는 분명 이질적인 존재였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언니라고 부르라니까?”

“언니는 무슨 얼어 죽을. 정말 인간 따위 때문에 삶을 포기한단 말이야?”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니야.”

“그럼?”

스피넬은 이를 갈며 되물었다.

“사랑하는 이들과 같은 시간을 살고, 같이 늙어 가는 경험을 공유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세라스는 행복해 보였다.

인간의 삶을 동경하다 못해 드디어 미쳐 버렸구나.

“후회할 거야.”

“인간들은 아이를 낳으면 선물을 준대. 참고로 난 엘프의 자장가를 선물로 받고 싶어. 너도 알다시피 내 노래 솜씨가 좀 별로잖아?”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며 세라스는 또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중얼거렸다.

“선물? 내가 미쳤어? 내 눈에 띄면 그 애를 죽여 버릴 거야!”

스피넬은 열이 받아 거꾸로 매달려서도 악을 썼다. 세라스가 죽는다니. 그것도 다름 아닌 인간 때문에.

그런 바보 같은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피넬, 감히 내 아이에게 손대기만 해 봐.”

“…….”

어지간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는 세라스가 눈을 빛내며 낮게 중얼거렸다.

같은 드래곤이라고 해도 살아온 삶의 길이가 다른 만큼 세라스와 스피넬 사이에는 넘기 힘든 격차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 않은가.

그럴 때마다 먼저 꼬리를 내리는 건 자신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사과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부루퉁하게 꾹 다문 입을 보며, 세라스는 한탄을 내뱉었다.

“아아, 어릴 땐 그렇게 날 언니라 부르며 잘 따랐는데, 어쩌다 이렇게 큰 걸까.”

언제 위협을 했냐는 듯 목소리에는 장난기마저 섞여 있었다.

“네가 날 이렇게 키웠잖아. 걸핏하면 공중에 매달아 버리고!”

“이 언니는 정말 슬프단다, 스피넬.”

“언니는 무슨,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내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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