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으아악! 그만 따라와!”
소리를 빽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몽을 꾸었다. 커다란 붉은 구슬이 날 향해 굴러오는 악몽을. 얼마 전에도 비슷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얼마나 끔찍한 꿈이었으면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보다…….
“여긴 어디지?”
분명 동굴 안이었을 텐데 눈을 뜬 곳은 동굴이 아니었다.
낯익은 철창을 보아하니…… 설마 감옥인가?
얼마나 누워 있던 건지,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어질거릴 지경이었다.
“스피넬은 어디 있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맞은편 감옥에 붉은색 인영이 보였다.
“스피넬 님! 괜찮아요?”
“저런, 일어나신 모양이군요.”
그러나 내 외침에 대답한 건 스피넬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전 베르텔교의 교주, 노만 베르텔이라고 합니다.”
“베……르텔?”
그의 이름을 곱씹다 문득 원작을 떠올렸다. 익숙한 그 이름은 교단의 부흥을 위해 성녀를 납치했던 사이비 교주 이름이었다.
그 사건의 원흉인 교주가 어째서 나와 스피넬을 가둔 걸까?
“어째서 여기 오게 됐는지 많이 궁금한 얼굴이군요.”
상상 속의 베르텔보다 훨씬 인자해 보이는 노인이 날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저는 교단의 교주이지만, 과거엔 셀바스의 영주였습니다.”
“……!”
셀바스라면……. 얼마 전 릴리가 내게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마녀가 일으킨 불 때문에 사람들이 살 수 없어 영주마저 영지를 버리고 떠났다던 마을…….
“설마, 스피넬이…….”
“네, 그녀가 그때 마을에 나타났던 마녀입니다.”
그럴 리 없었다. 스피넬은 셀바스가 어딘지도 몰랐는걸.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스피넬은 마녀가 아니라……, 그냥 마법을 좀 잘 다루는 사람일 뿐이에요.”
“저런, 벌써 마녀에게 홀리신 모양이군요.”
“홀린 게 아니라…….”
“형제님, 성수도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교주님.”
그는 인자한 얼굴과는 다르게 내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다.
옆에 서 있던 ‘형제님’이라 불린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밖으로 사라졌다.
“마녀라고 어떻게 확신하세요?”
“그야, 직접 봤으니까요. 붉은 눈에 붉은 머리, 한쪽 눈에 난 상처까지. 7년이 지난 일이지만 절대 잊을 수 없죠.”
그는 오래전 일을 추억하는 듯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사람이 더는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어떻게 잊겠습니까?”
교주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거로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금껏 봐 온 스피넬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하지만, 그녀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은 아니라 믿고 싶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스피넬을 바라보다 교주에게 물었다.
“마녀에겐 그에 맞는 벌을 내려야겠지요.”
“벌이라면?”
“죽일 겁니다. 불에 태워.”
화형을 시킬 거란 말인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화 의식이 끝나면 영애는 무사히 돌려보내 드릴 테니까요.”
“……저를 내보내 주겠다고요?”
“네. 리슈펠트 영애 맞으시죠? 공작님께서 애타게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셀레스 타인가에 빚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군요.”
교주는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였다.
“그럼 잠시 후 화형식 때 다시 뵙겠습니다. 정화 의식도 그때 같이 하죠.”
그 말을 뒤로하고 교주는 감옥을 나갔다.
또다시 원작이 틀어졌다.
따지고 보면 이번에도 내가 원인이었다.
광산이 개발되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스피넬이 살고 있다는 걸 몰랐을 테고, 그럼 교주는 원작대로 성녀를 노렸겠지.
또 나 때문에…….
아니, 쓸데없는 생각 말자. 차라리 잘됐지. 이걸로 성녀는 무사할 테니까.
문제는 스피넬이었다.
“스피넬 님, 일어나 봐요.”
난 목소리를 죽여 건너편 감옥의 스피넬을 불렀다.
그러나 얼마나 꿀잠을 자는 건지 코까지 골아 가며 자는 스피넬에겐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 모양이다.
작은 돌멩이라도 던져서 깨우려던 차에 손가락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쓰러지기 전에 손에 쥐고 있던 마나 쪽쪽이였다.
마침 잘됐다 싶어, 난 마나 쪽쪽이를 스피넬을 향해 던졌다. 툭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
돌멩이는 살짝 빗나가 스피넬 옆을 데굴거리며 굴러갔다.
옛날에도 야구 할 때는 투수보다는 타자에 재능이 있었는데, 그 실력은 여전했다.
혹시 다른 돌멩이는 없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마땅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으아악!”
스피넬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뭐, 뭐야 이거. 으아!”
스피넬은 괴성을 지르며 온몸을 쓸어내리더니 몸 안에서 무언가를 떼어 냈다.
“이게 왜…….”
아직 잠이 덜 깬 몽롱한 얼굴로 아까 내가 던졌던 벌레를 바라봤다.
“잘…… 잤어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자 스피넬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가 어디냐?”
“……감옥이요.”
“감옥? 그게 뭔데?”
“사람을 가두는 곳이요.”
스피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우리에 갇혔다 이 말이냐?”
“정확하시네요.”
“빌어먹을 놈들!”
스피넬은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에 열이 받는 모양이었다.
“날 가둔 놈 얼굴이나 봐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철창에 손을 가져다 댔다. 순간 불꽃이 파지직 하고 터지며 손가락이 까맣게 탔다.
“스피넬 님, 괜찮아요?”
“별것 아니다. 이 정도야.”
놀라서 다가가자 스피넬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정말 괜찮아요? 피부가 탔어요.”
“그래. 이 정도는 금방 회복하니까.”
스피넬은 손가락으로 철창을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이따금 작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실은 아까 우릴 가둔 사람이 왔다 갔는데, 옛날에 스피넬 님이 파괴한 마을의 영주……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스피넬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셀바스라고…… 꺼지지 않는 불 때문에 다들 마을을 버리고 떠났다고…….”
“아…….”
그제야 스피넬은 뭔가 기억이 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기억하고 있지.”
“……정말, 그 마을 사람들을 다 죽였어요?”
“벌레 한두 마리 죽인 걸 어찌 다 기억하느냐? 뭐 내 손에 죽은 놈들도 있고, 살아서 도망간 놈들도 있겠지.”
“…….”
스피넬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엉뚱하고 조금은 허술한 모습만 봐 왔기 때문일까,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도 타인에게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내게 복수를 하겠다고 가둔 모양이구나. 주제도 모르고 감히…….”
스피넬은 다시 한번 철창에 손을 뻗었다. 부술 기세로 힘을 줬지만, 철창은 부서지지 않았고 스피넬의 손은 팔꿈치까지 까맣게 타고 말았다.
“스, 스피넬 님. 그만해요. 힘으론 안 될 것 같아요. 차라리 마법으로…….”
“안 나와.”
“네?”
“아까부터 마법을 쓸 수가 없어.”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스피넬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스피넬의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마나 쪽쪽이를 내게 보여 주었다.
“봐라. 이놈이 지금 움직이잖느냐?”
확실히 아까보다 움직임이 훨씬 활발해져 있었다.
“주변에 마나가 없다는 뜻이야.”
“……네?”
“이놈들은 배가 부르면 안 움직여. 하지만 주변에 마나가 없으면 먹이를 찾기 위해 움직이지.”
그러고 보니 기절하기 전에도 그런 설명을 해 줬었지…….
“그 말은 지금 나한테 마나가 없다는 뜻이다.”
“……!”
“그 인간 놈이 내게 무슨 짓을 한 모양이군.”
스피넬은 몇 번 더 철창을 두드리다 포기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어떡하죠?”
“글쎄…….”
맘이 급한 나와는 다르게 스피넬은 너무 태평했다. 난 조금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렇게 태평해요? 교주가 스피넬 님을 화형에 처할 거라 했다고요!”
“그래? 그럼 너도 화형당하는 거냐?”
“그게……. 아뇨. 저는 살려 주겠다고…….”
“그럼 뭐가 문젠데?”
스피넬이 반문했다. 뭐가 문제냐니, 그야…….
“죽을지도 모르는데 뭐가 문제냐니요.”
“죽을지도 몰라? 재밌는 소릴 하는구나. 내가 저딴 버러지한테 죽을 것 같으냐?”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 것조차 그녀다웠다. 하지만…….
“나갈 방법이 없잖아요.”
“…….”
그 말에 스피넬은 입을 삐쭉해 보이더니 다물어 버렸다.
뚜렷한 방법이 없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턱을 괴고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스피넬의 손아귀에서 꿈틀거리는 벌레가 눈에 띄었다.
처음 볼 땐 투명한 보석같이 생겨 별 거부감이 없었는데 꿈틀거리며 움직이니 소름이 돋긴 했다.
“그 벌레, 어차피 죽으면 마석이 되잖아요. 벌레한테서 마나를 뽑아서 마법을 쓸 수는 없을까요?”
내 말에 스피넬은 시도해 보았지만 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력을 흡수하는 능력 자체가 막힌 느낌이야. 마나를 다 써도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회복도 되지 않거든.”
마나를 회복조차 할 수 없다라. 원작에서 비슷한 구절을 읽은 것 같은데…….
교주는 겉으로 점잖은 척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저 말이 많고 겁 많은 노인일 뿐이었다.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신성력을 가진 것도 아닌 그가 교주로 있는 건 순전히 그의 뛰어난 언변 때문이었으니까.
그런 교주가 스피넬의 마법을 봉인할 만한 능력은 갖고 있지 않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교주가 유독 애지중지하던 물건이 하나 있긴 했다. 성녀에게 성물이라며 자랑하기까지 했으니까.
분명 마나를 봉인할 수 있는 성물이라고 했었지?
어쩌면 여길 벗어날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다.
“스피넬 님.”
“왜?”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이 있는데…….”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이 듣지 않게 좀 더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내 작전을 들은 그녀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