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스피넬은 너무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다음 질문을 하려던 입이 굳어 버렸다. 이런 대화를 예상하고 질문한 건 아니었는데…….
“그……. 많이 그리우시겠어요.”
난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리워? 그게 뭔데?”
그립다는 단어를 모르는 걸까.
혼자 지낸 세월이 길어서인지, 스피넬은 종종 평범한 단어들의 의미를 몰라 되묻곤 했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마음이요.”
“인간들은 그걸 그립다고 표현하나 보구나.”
스피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리운 사람이 있느냐?”
스피넬은 가만히 물었다.
“있어요.”
“그 사람도 네 가족인가?”
“네.”
“그럼 보고 싶겠구나.”
어째서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지 모르겠다.
“네 보고 싶어요.”
“어디 있는데?”
“……제 가족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나랑 같구나.”
스피넬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그리곤 한참을 가만히 누워 있다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내가 네 가족이 되어 주겠다.”
“……네?”
“넌 멧돼지를 잡아먹지도 못하고, 마법을 쓰지도 못하고, 이빨이나 손톱이 날카로운 것도 아니지 않으냐? 그것도 모자라 걸핏하면 힘들다고 우는소리를 하니, 내가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거야.”
“그거랑 가족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맥락을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다시 한번 묻자 스피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가족이란 거 아니냐? 죽지 않게 돌봐 주는 사람 말이다.”
내가 아는 가족의 의미가 언제 그렇게 바뀌었지?
너무 엉뚱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왔다.
“……풉. 그게 뭐예요? 그게 가족이에요?”
“그래.”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스피넬 때문에 난 반박할 틈을 놓치고 말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날 죽이겠다던 사람이 이젠 선뜻 내 가족이 되어 주겠다니.
더 이상 날 죽일 생각이 없는 걸까?
정말 엉뚱했지만 좀 친해진 탓인지 그게 그녀의 매력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내 대답에 그녀는 웬일로 쑥스러운지 코를 긁적였다.
***
“아티팩트가 설치된 흔적이 있다고요?”
황성 마법사의 대답에 세바스찬이 놀라 물었다.
“아마도 폭발 계열 아티팩트로 보이는데, 동굴 안에 설치된 것 같아요.”
“그럼 누가 일부러 가져다 놨다는 겁니까?”
“그런 듯 보입니다. 아무래도, 일부러 아가씨를 노리고 터트린 것 같은데…….”
세바스찬은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날 광산에 방문하기로 했던 사람은 라벤느가 아니라 일리온이었다. 그렇다면 그 폭탄이 노렸던 건 일리온일 것이다.
“폴, 그날 이후 사라진 사람은 없나?”
일리온은 옆에 서 있던 공사의 총책임자인 폴을 불렀다.
“글쎄요.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혹시, 버트 아니에요? 그날 이후로 버트가 안 보이는데.”
폴 옆에 있던 남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버트?”
일리온이 되물었다.
“예. 일주일 전에 새로 들어온 인부죠. 싹싹하고 일 잘하던 놈인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안 보이긴 합니다만…….”
폴은 그렇게 말하며 말을 흐렸다.
듣고 보니 행적이 수상하긴 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데다 사라진 타이밍도 그렇고.
“그자를 잡아 와.”
일리온은 화를 억누르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광산에 설치된 간이 막사로 돌아온 일리온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공작님, 잠시 쉬는 게 어떨까요.”
막사 안으로 따라 들어온 세바스찬이 일리온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건 좋았지만, 라벤느를 찾는 일은 지지부진했다.
땅을 난도질하듯 팠지만,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설사 찾는다고 해도 살아 있다고 장담하긴 힘들었다.
다들 어렴풋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일리온의 눈치를 보며 수색 작업을 강행하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잠도 못 주무셨잖아요.”
“괜찮아. 어차피 하루 이틀 안 자도…….”
말을 잇던 일리온은 세바스찬을 돌아보았다.
자신이야 하루 이틀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았지만, 세바스찬이나 주변 사람들은 많이 지쳐 보였다.
이 이상은 고집인 걸까.
“공작님!”
이대로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하나 망설이던 일리온은 멀리서 달려오는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아가씨의 위치를 찾았어요.”
포르토를 방문하기 전 라벤느에게 추적 마법을 걸어 준 장본인이었다.
한동안 시신의 위치를 찾지 못해 고군분투하던 그가 마침내 위치를 찾은 모양이었다.
“어딘데?”
일리온은 서둘러 미카엘에게 달려갔다.
“숲 쪽 근처에서 발견했어요.”
“숲? 왜 거기에……. 일단 그쪽으로 이동시켜 줘.”
동굴 안에서 사라진 사람이 왜 거기 있는지 의아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찾는 게 먼저였으니까.
미카엘은 서둘러 텔레포트를 시전했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울창한 숲속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멧돼지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이상하네. 여기서 마지막으로 감지됐는데.”
미카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라벤느의 모습을 찾았다.
일리온은 주변을 살피다 찢어진 천 조각을 발견했다. 라벤느가 그날 입고 나갔던 옷의 조각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머문 건 사실인 듯 보였다.
왜 동굴에서도 한참 떨어진 이곳에 머물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직 라벤느가 살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살아만 있다면, 어디 있든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막사로 돌아가지. 수색 장소를 변경해야겠네.”
일리온은 라벤느의 옷자락을 품에 넣으며 미카엘에게 부탁했다.
***
이곳에서 지낸 지도 4일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스피넬과 지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음식은 그녀가 언제든지 조달해 왔고 동굴에서 자는 불편함도 그녀의 도움을 받으면 지낼 만했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일리온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테니, 스피넬과 지내는 일상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하나를 빼면.
“이것도 못 든다고?”
“……이걸 어떻게 들어요.”
내 말에 스피넬은 멧돼지 사체를 번쩍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렇게.”
“…….”
들어 올렸다 다시 바닥에 내려놓자 쿵 하며 동굴 안이 울렸다.
“이것도 못 들어서 어떻게 먹고살아?”
“못 들어도 살 수 있어요. 실제로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스피넬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알겠다. 어차피 넌 얼마 먹지도 않으니 멧돼지를 잡을 게 아니라 토끼 같은 것부터 잡아야겠구나.”
그 한 가지 문제는 그녀가 정말로 내게 이 산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칠 생각이라는 거다.
“맨손으로요?”
“그럼 뭐로 잡느냐?”
“그냥 과일이나 따 먹고 살면 안 될까요?”
토끼를, 그것도 맨손으로는 더더욱 잡을 생각이 없는 난 의욕에 불타는 스피넬을 말리며 물었다.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인간은 탄, 어쩌고를…… 아무튼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니 그거 다 안 챙겨 먹어도 살긴 하더라고요. 뭐 제가 성장기 어린애도 아니고 약간의 영양 불균형은…….”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스피넬은 내 말을 자르며 손가락을 튕겼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늘도 난 수풀에 내던져졌다.
“오늘은 토끼를 잡을 때까지 돌아갈 생각 말아라.”
“……토끼요?”
“그래. 마침 저기 있네.”
그렇게 말하며 스피넬은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생각했던 토끼랑은 많이 다르게 생긴 토끼가 풀을 우적거리고 있었다.
“저거…… 초식 동물 맞죠?”
풀을 씹고 있는 걸 봐서는 초식 동물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왜 이렇게 무섭게 생겼냐.
1시간 만에 지쳐 버린 난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왔다.
결국, 토끼를 잡기는커녕 뒷발에 연신 얻어터지고 말았다.
“이렇게 약해서야…….”
스피넬은 날 바라보며 혀를 찼지만 대꾸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어쩌다 이런 스파르타 생존 교육을 받게 된 걸까?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고기는 가게에서 사는 식품이었다고. 잡는 게 아니라!
지친 나머지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그저 가만히 누워 동굴 벽을 수놓은 불빛을 바라보았다.
동굴 천장은 내가 정말 위에서 떨어진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구멍 하나 없이 꽉 막혀 있었다.
“스피넬 님. 전 저 위에서 떨어진 게 맞죠?”
“그래.”
“그런데 왜 구멍이 없어요?”
“내가 결계로 막았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날 찾을 수 없는 걸까? 구멍이 막혀 버렸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미 날 찾는 걸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일리온이라면 내가 이미 죽었을 거라 판단하고 수색을 중단했겠지.
그런 거라면, 더 이상 일리온에게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되는 건가?
아르티아랑은 어떻게 돼 가고 있을까?
둘 다 제자리를 찾고 있을까?
릴리랑 세바스찬은 내 걱정하고 있으려나?
멍하니 동굴 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저택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 잠깐 사이에 정이 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스피넬 님, 저 불빛은 어떻게 빛나는 거예요?”
애써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벽을 수놓고 있는 불빛에 관해 물었다.
“저 벌레?”
“윽, 저게 벌레예요?”
그럼 난 지금껏 벌레랑 동침하고 있었던 건가?
그런데 벌레가 저렇게 움직임이 없나? 마치 돌멩이처럼 박혀 있는 모습에 호기심을 못 이기고 가까이 다가갔다.
무당벌레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긴 벌레는 몸 전체가 투명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벌레라기보다는 보석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예쁘게 생겼다.
“이 벌레는 이름이 뭐예요?”
“마나 쪽쪽이.”
“네?”
“세라스가 그랬어. 마나 쪽쪽이들이라고.”
무슨 이름이…….
“그런데 얘들은 어떻게 빛을 내뿜는 거예요?”
“마나를 흡수해서 빛을 뿜는 거래.”
“아아.”
이제 보니 참으로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나 때문인지, 결계를 쳐도 주변으로 몰려들어. 오히려 결계 주변에 마나가 있어서인지 더 몰려들더구나.”
“스피넬 님 몸에도 달라붙어요?”
“감히 벌레가 내 몸에 닿을 것 같으냐? 아무리 벌레일지언정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지. 날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이런 걸 두고 얘기하는 걸지도.
오늘도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이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 설파하는 스피넬이었다.
“어쩐지 마석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요.”
“마석?”
“투명한 돌멩이요. 이 정도 크기인데…….”
“아, 아마 그건 저놈들 시체일 거다?”
“……네?”
“그 녀석들은 죽으면 딱딱하게 돌처럼 굳거든.”
“…….”
설마 마석이란 게 벌레의 시체였던 거야?
어쩐지 알면 안 되는 진실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얜 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야, 주변에 마나가 충분하니까.”
“마나가 없으면요?”
“움직일 거야. 그래 보여도 꽤 재빠르거든.”
생긴 건 벌레 같지 않게 예쁘게 생겼는데…….
난 벽에 달라붙은 벌레 한 마리를 떼어 내 보았다. 움직임이 없어서 그런가, 그냥 반짝이는 보석처럼 느껴졌다.
“설마 광산에 마석들이 전부 이런 녀석들일 줄…… 몰랐…….”
미동조차 하지 않는 벌레를 신기하게 바라보는데, 갑자기 시야가 흔들리며 머리가 빙글거렸다.
“갑자기 졸음이…….”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어 보았지만, 몸은 어느새 중심을 잃고 기울고 있었다.
이상하게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내 몸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