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57)화 (57/159)

57화

황성에서 돌아온 일리온은 라벤느가 없는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저를 괴롭히는 방해꾼이 없으니 일이 빨리 끝나야 하건만, 어쩐지 시선은 아까부터 같은 페이지를 맴돌고 있었다.

“일은 잘 되시나요?”

“뭐, 그럭저럭.”

정곡을 찌르는 듯한 질문에 일리온은 일부러 페이지를 넘기며 답했다.

“아가씨께서 안 계시니 저택이 조용하네요.”

“조용해서 나쁠 거 없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곤 일에 집중을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빙글거리며 웃는 세바스찬을 보며 일리온은 고개를 삐뚜름하게 들어 올렸다.

“자네는 일이 없나?”

“쉬는 시간이거든요.”

능구렁이 같은 대답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기 위해 입을 떼려는데, 조용하던 복도를 가르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하인이 들어왔다.

“고, 공작님.”

“무슨 일입니까?”

“아가씨께서……!”

하인은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가 하는 말을 듣는 일리온의 안색은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아가씨를 찾으려고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시신이…….”

라고 말하던 하인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평화로운 오후와는 어울리지 않는 얘기였다. 끔찍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듯 일리온은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을 모아 와. 신전에도 연락하고, 마법사들한테도 연락해 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명령했다.

죽다니, 그럴 리 없었다.

제게서 도망치기 위해 상상도 못 할 기행을 벌이던 여자 아닌가. 그러니 이번에도 자신을 속이기 위한 장난일 것이 분명했다.

일리온은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며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

“넌 생각보다 쓸모 있는 인간이구나.”

밥을 다 먹은 스피넬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단지 고기를 구웠을 뿐인데, 그녀는 지나치게 내 요리를 칭찬했다. 마치 구운 고기를 처음 먹어 본 사람처럼.

“고기를 구워 먹어 본 적이 없으세요?”

“그래.”

“그럼 저 식기는 다 뭔데요?”

“얼마 전, 내 동굴에 발을 들인 놈들이 놓고 간 물건이다.”

한번 동굴에 들어오면 다시는 못 나간다는 스피넬의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괜한 불똥이 튀는 건 사양이었다.

그보다 불을 쓸 줄 알면서 고기를 구워 먹지 않았다니.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지?

“이제 밥은 다 먹은 게냐? 아까 말했던…… 탄 어쩌고 하는 건 다 섭취한 거지?”

“그렇긴 한데…….”

“그럼……. 이제 네게서 이야기를 들으면 되겠구나.”

스피넬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팔다리 한두 개를 부러뜨리겠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 저기. 아까 제게 그러셨잖아요? 생각보다 쓸모 있다고? 청소든 빨래든 다 할게요. 그러니까 제 팔다리는 멀쩡하게 놔두시면 안 될까요?”

“청소도 빨래도 필요 없어.”

“그, 그럼 요리는요? 저것보다 더 맛있는 걸 만들 줄 알아요! 제가 매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드릴게요.”

스피넬이 잠시 멈칫했다. 그건 조금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갈등하는 기색이 보이자 난 좀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혹시 먹고 싶은 음식 없으세요?”

내 질문에 골똘히 생각하던 스피넬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케이크.”

“케이크요?”

“그래. 세라스가 말해 준 적이 있다. 꼭 한번 먹어 보라고.”

“케이크가 드시고 싶으셨구나! 제가 또 케이크에 일가견이 있거든요!”

“……네가?”

스피넬은 날 한참 노려보더니, 팔짱을 풀었다.

“케이크를 만들 수 있다고?”

“그럼요!”

내 말에 마음이 흔들린 모양인지 잠시 갈등하던 스피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루 이틀 더 데리고 있는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 알겠다. 그때까진 널 살려 두기로 하지.”

좀 더 살려 두겠단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위기를 넘기긴 했는데 이제 어쩐다?

스피넬을 설득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건 좋았지만, 밀가루와 버터를 써서 뭔가 만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후작 부인에게 에그타르트 레시피라도 배워 놓는 건데…….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스피넬은 날 보자마자 케이크는 언제 만들어 줄 건지 물었다.

“음, 그건 재료가 좀 많이 필요한데…….”

난 졸린 눈을 비비며 답했다.

“말만 하거라. 구해다 줄 테니.”

그녀는 무슨 재료가 됐든 모두 구해 올 것처럼 말했다. 난 별 기대 없이 대충 생각나는 재료를 읊었다.

“밀가루랑 설탕이랑, 우유, 크림, 버터…….”

외국어라도 들은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던 스피넬은 다시 한번 물었다.

“……뭐?”

과연 그녀에게 재료를 설명해 주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러지 말고, 마을에 가서 사 오면 안 돼요?”

“싫다.”

“왜요?”

“인간이 싫으니까.”

스피넬은 내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혹시 과거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럼 밖에 나가서 재료를 구해 오는 건요?”

“밖? 산속을 말하는 거냐?”

“네!”

“거기서 재료를 구할 수 있어?”

“그, 그럼요!”

난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이 안 된다면, 동굴 밖이라도 좋았다. 목표는 여기서 나가는 거니까.

스피넬은 내게 다른 의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구슬려 밖에 나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사방은 나무로 빽빽한 숲이었다.

“스피넬 님, 마법으로 절 저 위로 올려 주시면 안 될까요? 주변에 뭐가 있는지 잘 안 보여서…….”

위에서라면 주변이 더 잘 보일 듯해 스피넬에게 재료를 핑계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별 의심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몸이 공중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빠르게 위로 날아올랐다.

수풀 사이를 벗어나자 탁 트인 전경이 보였다.

“뭐가 보이느냐?”

저 멀리서 삭막한 바위산이 하나 보였다. 모양을 보아하니, 광산 쪽 방향이었다.

“그, 글쎄요. 올라와도 잘 안 보이네…….”

“넌 바라는 건 많으면서 제대로 하는 건 없구나.”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 물론 맞는 말이긴 한데…….

뭐라고 대꾸를 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제 아래로 내려갈까요?”

“…….”

“스피넬 님?”

한 번 더 이름을 불렀으나 스피넬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끝을 따라 눈을 크게 떠 보았지만, 보이는 건 빽빽한 숲뿐이었다.

“넌 먼저 내려가서 재료를 찾아보아라. 난 잠시 가 볼 데가 생겼으니.”

그렇게 말하며 스피넬은 순간이동으로 사라졌고 내 두 다리는 안전하게 바닥을 디뎠다.

대체 뭘 발견했길래 나만 두고 갑자기 사라진 걸까?

상황이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놓치기는 아까운 절호의 기회였다.

스피넬에 대한 궁금증을 잠시 접어 두고, 난 방금 보았던 바위산의 방향을 떠올리며 그쪽을 향해 달렸다.

“하아, 하아.”

내가 읽었던 로맨스 소설에선 이런 건 없었던 거 같은데…….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하하 호호거리며 정원을 거닐고, 심심하다 싶으면 마을에 나가서 쇼핑이나 좀 하고 오는 그런 삶 아니었나?

얼마 달리지도 못했는데 심장이 터질 것처럼 숨이 가빠 왔다.

“이러다, 진짜 죽겠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바위에 등을 기대고 잠시 앉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빈 그릇 하나만 있으면 이대로 거리로 나가도 될 것 같은 꼴이었다.

이게 어디 귀족 영애의 모습인지.

잠시 신세 한탄을 하며 숨을 몰아쉬는데,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스피넬이 쫓아온 건 아닌가 싶어 잔뜩 긴장한 채로 고개를 돌리니, 다행히 스피넬은 아니었다.

대신 집채만 한 멧돼지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어제 그 멧돼지의 친구는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이 세계의 멧돼지는 초식 동물일까, 육식 동물일까.

부디 초식 동물이길 바라며, 난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쳤다. 멧돼지는 코에서 김을 내뿜으며 투레질을 했다.

“…….”

육식인가 보다.

어제는 미처 몰랐는데, 확실히 멧돼지는 죽어 있을 때가 더 예뻤다.

“저기, 네 친구 내가 잡아먹은 거 아니거든? 어제도 난 한 입밖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바닥을 딛고 있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말을 듣지 않는 몸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와서 이런 후회를 할 줄은 몰랐는데…….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라면 차라리 원작대로 악녀 짓이나 하다 죽을걸!

난 눈을 질끈 감으며 조금이라도 덜 아프길 바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