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미로 같은 복잡한 길을 헤치고 나왔는데,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걸까?
“여기서 외쳐 봤자, 밖으론 소리가 전달되지 않아. 결계가 쳐졌거든.”
그녀는 건조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결계요?”
“그래. 그러니 말하지 않았느냐.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거라고.”
그녀는 날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갈 수 없다고 했던 건 흔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말해 줬을 뿐.
긴장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전 정말 세라스가 누군지 몰라요. 그러니까 그냥 돌려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가이아 여신님을 걸고 맹세할게요. 정말 몰라요.”
“뭐, 네가 한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곧 알게 되겠지.”
그렇게 말하며 스피넬은 손가락을 튕겼다.
주변은 조용했고, 절벽 끝에서 불어온 바람 소리만 맴돌았다.
“…….”
“스피넬 님?”
스피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더니, 이번엔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마법을 시전하기 위한 주문인 듯 보였다.
스피넬의 입에서 주문이 끝나자 또 한 번 정적이 맴돌았다.
상황을 보아하니 마법이 잘 안 듣는 모양이었다.
“대체 왜 안 되는 거야? 설마 세라스 이 거짓말쟁이가 또 날 속인 건가.”
“…….”
그녀는 짜증을 내며 들고 있던 마법서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된 거, 억지로라도 듣겠다.”
“……네?”
“뭐, 팔다리 하나쯤 부러뜨려 놓으면 말하겠지.”
“……네? 자, 잠시만요! 그건 너무……!”
꼬르륵…….
순간 배 속이 요란하게 울렸다.
“…….”
꼬르륵…….
그것도 두 번이나.
차라리 팔다리를 부러뜨리시죠.
심각한 와중에 울리는 꼬르륵 소리에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배가 고픈 거냐?”
“네…….”
아침을 거의 먹지 않았으니 배가 고플 만했다. 덕분에 멀미는 면했지만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냥 다 먹을 걸 그랬다. 그럼 좀 덜 억울할 텐데.
“가지가지 하는군. 잠깐 기다려 보아라. 먹을 걸 가져다줄 테니.”
“네?”
방금까지 내 팔다리를 부러뜨리겠다던 사람이 잠시 멈칫하더니 먹을 걸 가져오겠다며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돌아선 그녀는 손을 휘적였고, 동시에 주변 풍경이 바뀌더니 난 다시 동공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미카엘의 도움을 받아 순간이동을 몇 번 해 보았지만, 그때는 언제나 그가 동행했었다.
그러나 스피넬은 본인이 동행하지 않아도 대상을 이동시킬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내 얕은 지식으로도 그녀의 마법이 좀 더 난도가 높아 보였다.
이렇게나 마법에 뛰어난 인재가 어째서 산속에 틀어박혀 사는 걸까?
아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어서 탈출해야지!
다시 한번 탈출을 감행하기 위해 출구로 향하는데, 출구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스피넬이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는 집채만 한 멧돼지가 들려 있었다.
스피넬은 멧돼지를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먹거라.”
“……이걸요?”
“그래.”
“…….”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저걸 먹으라고? 죽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데다가 털이 부숭부숭 달린 생물체를?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기…… 혹시 다른 건 없나요. 동물 말고, 과일이나…… 풀뿌리도 괜찮고…….”
“배고파서 밥 달라고 하는 주제에 가리는 것도 많구나.”
짜증이 나는지, 스피넬의 눈썹이 살짝 들려 있다.
애써 가져왔는데 이런 말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걸 어떻게 먹냐고!
결국, 먹지도 못하고 꼬르륵 울어 대는 배만 부여잡고 있자, 스피넬은 신경질을 내며 다시 동굴 밖으로 나갔다.
또다시 3분도 채 되지 않아 돌아온 그녀의 손엔 과일을 한 아름 들려 있었다.
향긋한 단내에, 정신없이 과일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이 세계에서도 생소한 과일이었지만, 과즙이 풍부하고 달콤했다.
그렇게 허겁지겁 몇 개를 먹어 치우자 배가 불러 왔다.
“아, 배불러.”
“고작 그거 먹고 배가 부르다니…….”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과일을 보며 스피넬은 혀를 찼다.
“그런데, 왜 음식을 나눠주신 거예요? 아까 분명 저한테 억지로 세라스에 대한 걸 듣겠다고 했잖아요.”
“그래. 그럴 거다.”
“그런데?”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아 그녀에게 되물었다.
“네가 세라스에 대해 말하기 전에 배가 고파 죽으면 곤란하지 않으냐.”
“네?”
그게 무슨 얘기냐며 되묻자 그녀가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인간들은 배가 고프면 죽지 않느냐? 그래서 매번 배고파 죽겠다는 소릴 입에 달고 다니지. 설마 내가 그런 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느냐?”
그렇게 제 말이 맞다고 우기는 스피넬을 보고 있자니, 대답할 만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그렇죠. 맞아요. 인간은 배고프면 죽거든요. 그래서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해요.”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 그런 의미에서 죽지 않으려면 뭘 좀 더 먹어야겠는데요.”
“더? 배부르다며?”
“과일만 먹으면 안 돼요. 인간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을 골고루 섭취해야 죽지 않거든요.”
“타, 탄…… 뭐?”
스피넬은 처음 듣는 단어에 당황하며 되물었다. 난 다시 한번 그녀를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물론, 스피넬 님께서도 다 알고 계시겠지만.”
“하하, ……무, 물론이지. 나도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해 보였다.
“그, 그래서 이제 뭐가 더 필요하느냐?”
“일단 과일로 탄수화물은 섭취했으니, 고기로 지방과 단백질을 섭취해야 할 것 같아요.”
“고기라면 저기 있지 않느냐.”
“……저런 질긴 고기를 먹었다간 죽고 말걸요?”
“왜?”
혓바닥이 밖으로 빠져나온 채 죽은 모습은 먹고 싶은 의지마저 싹 가시게 했다.
애써 그 모습에서 눈을 돌리며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몸은 정말 약해서, 고기를 잘못 먹으면 배탈이나 죽고 말아요. 물론, 스피넬 님도 다 아시겠지만.”
“……그, 그래. 알고 있지.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알고 있다는 대답과는 다르게 전혀 모르는 듯한 질문이었다.
“그야, 불에 구워야죠.”
“그거라면, 내가 잘하지.”
드디어 자신이 아는 게 나왔다는 듯, 스피넬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손가락을 튕겼다. 불꽃이 빠르게 타오르다 사라졌다.
“내가 구워 주겠다.”
“잠깐만요! 여기서 구우면 동굴 안에 연기가 찰 텐데, 밖에서 굽는 건 어때요?”
산속에서 연기를 피운다면 지금쯤 사라진 날 찾고 있는 사람들이 연기를 보고 찾아올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동굴 밖으로 나간다면 도망갈 틈을 만들 수도 있고.
그러나 스피넬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거라면 걱정 말거라. 마법으로 연기 정도는 없앨 수 있으니까.”
“아…….”
성격이 허술하다 보니 자꾸 까먹게 된다. 그녀가 상당히 뛰어난 마법사란 걸…….
스피넬과의 요리는 엉망진창이었다. 무턱대고 고기를 태워 버리려는 그녀를 말리는 것부터 난관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갖고 있던 상자 안에 마침 냄비와 칼, 그리고 몇 개의 향신료가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돼지 통구이를 입으로 뜯어 먹지 않아도 될 듯했다.
불을 피우고, 손질한 고기가 구워지는 걸 바라보다 스피넬에게 물었다.
“저기, 스피넬 님. 혹시 셀바스라고 아세요?”
“셀바스? 그게 뭔데?”
관심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셀바스라는 지역 이름도 처음 듣는 모양이었고. 셀바스의 마녀는 그녀가 아닌 걸까?
“아뇨, 모르시면 됐어요.”
난 서둘러 말을 맺으며, 고기를 찔러 보았다. 얼추 다 익은 듯해 한 조각을 접시에 담아 스피넬에게 건넸다.
“나는 왜?”
“같이 먹으면 좋잖아요.”
그렇게 말하자 스피넬은 마지못해 접시를 받아 들었다.
“……이 조그마한 걸 먹으라고 주는 거냐?”
“조그마하다니요. 일부러 크게 자른 건데!”
혼자 먹기엔 배부를 정도로 충분히 크고 두툼한 고기였다. 그런데도 스피넬은 고기가 이게 뭐냐며 투덜댔다.
한참을 고기를 살피던 그녀는 손으로 집어 들어 뜯어 먹었다.
“……포크랑 나이프도 있는데…….”
“뭐?”
“……아, 아니에요.”
그래.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난 그녀가 편히 식사할 수 있도록 그녀의 식사법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멧돼지라 질길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고기는 부드럽고 육즙이 가득했다. 소금이랑 후추로만 간을 했는데도 맛있을 정도로.
“생각보다 맛있네요. 그렇죠?”
저택에서 나오던 음식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먹을 만했다. 고기 자체가 보기보다 맛이 좋은 것도 한몫했다.
“좀 더 줘 보거라.”
어느새 고기를 모두 먹어 치운 스피넬이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남은 고기를 좀 더 구워 접시에 담아 주자, 다시 한번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고기에 무슨 마법을 부린 거냐.”
“네?”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 본다. 더 주거라.”
“더요?”
“이럴게 아니지. 아예 저걸 다 먹자꾸나.”
그렇게 말하며 스피넬은 한쪽에 남은 돼지를 둘러업어 내게 가져왔다.
윽……. 여전히 쉽게 적응되지 않은 돼지머리가 보였다. 정말, 이 커다란 걸 다 먹겠다고? 대체 위가 어떻게 된 거야? 게다가 저걸 다 구우려면…….
“뭐 하느냐? 어서 마법을 부리지 않고.”
“…….”
그 와중에 날 다그치는 스피넬을 보며,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기 손질 좀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