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랬던 그가 어째서 다시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온 걸까.
아르티아는 그의 마음이 바뀐 이유를 생각하며, 온화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축복을 걸어 드릴게요.”
과거가 바뀌었다 해도 되돌리면 될 일이었다. 그녀에겐 확신이 있었다. 일리온은 반드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아르티아는 이전보다도 더 강한 신성력을 담아 일리온의 몸에 흘려보냈다.
새하얀 빛이 천천히 일리온의 몸을 타고 흘렀다.
“몸은 좀 어떠세요?”
미세한 변화를 느낀 일리온의 눈빛이 바뀌었다.
힘이 그의 저주에 효과가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아르티아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걸로 틀어진 관계가 조금은…….
“보상은 뭐로 해 드리면 됩니까?”
“네?”
“바라시는 게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그러나 일리온의 반응은 너무도 담백했다.
“전,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라벤느가……, 제 약혼녀가 부탁한 일인 거 압니다.”
라벤느의 이름을 말하는 일리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다정함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제 걱정에 성녀님께 부탁을 드린 모양입니다. 도움을 받았으니 원하시는 게 있다면 최대한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거리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이렇게나 먼 관계였던가?
그녀의 생각보다 과거가 많이 바뀌었다.
그 중심에는 라벤느가 있었다. 일리온도, 클라우스도 모두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과거와 달랐다.
그렇다면 그녀가 뭔가 알고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그녀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눴어야 하는 건데. 아르티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니야, 아직 늦지 않았어.’
라벤느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일리온의 저주라면 그녀보다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일리온은 자신이 필요하다. 저주는 신성력을 한두 번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억누르지 못했다. 지속해서 축복을 걸어 줘야 하니 분명 자신을 또 필요로 할 것이다.
“저기…….”
“공작이 여긴 웬일이야?”
막 입술을 떼는데, 때마침 불청객이 찾아왔다. 눈부신 금발 머리가 햇빛에 반짝였다.
“안녕하십니까, 폐하.”
아르티아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둘이 꽤 친한가 봐? 이렇게 단둘이 만나고.”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고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천사같이 순수한 얼굴이었다. 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에 어떤 꿍꿍이를 감춰 두었을지…….
“우연히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눈 것뿐입니다.”
아르티아는 괜히 클라우스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둘러댔다.
그는 과거에도 자신이 일리온과 단둘이 있는 걸 싫어했다.
“그래? 공작은 오늘 혼자 온 건가?”
“네.”
“그렇군. 오늘은 다른 일정이 있는 줄 알았는데…….”
클라우스의 눈빛이 묘하게 휘어졌다. 기분 나쁜 미소였다. 아르티아는 저도 모르게 피부에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차라리 잘됐군. 안 그래도 산림 개발권으로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잠깐 들어왔다 가지.”
클라우스의 제안에 일리온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성녀님.”
일리온은 아르티아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돌아갔다. 이야기를 마저 하지 못하고 그를 보내게 된 아르티아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더니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나타난 건지…….’
저 멀리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아르티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
“아, 머리야.”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귀를 찢을 듯한 괴성에 기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찬찬히 시야가 돌아오고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불빛들이 동굴 벽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일어났느냐?”
“으아악!”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자, 상대도 놀란 듯 움찔했다.
“누, 누구세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구나.”
붉은색 머리카락과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릴리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분명……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저, 저는 먹어도 맛없어요!”
“내가 널 왜 먹어야 하는데?”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건, 안 잡아먹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글쎄. 넌 먹어도 맛이 없을 것 같은데……?”
날 안 먹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나? 잡아먹힐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겠지?
난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신분을 밝혔다.
“저는 라벤느 리슈펠트라고 하는데요.”
이러면 응당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기 마련인데 붉은색 눈동자는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저기, 마…… 가 아니고, 언니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실수로 그녀를 마녀라고 부르려다, 황급히 호칭을 바꾸었다.
“언니?”
그녀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내 호칭에 기분이 언짢은 듯해, 난 황급히 사과를 건넸다.
“그게…… 호칭이 기분 나쁘시다면 죄송해요.”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다. 내 이름은 스피넬이다.”
그럼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던 건데…….
“혹시 여기에 사시는 거예요?”
우리가 있는 곳은 커다란 동굴 안이었다. 가재도구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동굴.
“그래.”
“그건 좀 곤란한데…….”
“뭐가?”
그야, 앞으로 이 땅은 개발이 진행될 거니까, 사람이 사는 땅이면 곤란한 게 당연했다. 혹여 공사 중에 사고라도 난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혹시 가족이나, 친구분들은요?”
“없어.”
“아아.”
역시 마녀인 거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혼자서 이런 산속에서 살 리가 없잖아.
릴리는 왜 아침부터 그런 얘길 해서! 괜히 릴리가 했던 말이 떠오르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 릴리와 합류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녀의 정체는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
“저기, 땅이 무너져서 위에서 떨어졌는데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못 나가.”
“네?”
“내 공간에 발을 들인 인간이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이유는 또 뭘까? 하하.
“……저기, 스피넬 님. 혹시 제가 기분 상하게 한 일이라도…….”
“있지. 내 눈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신의 한쪽 눈을 가리켰다. 눈가엔 긴 흉터 자국이 그어져 있었다.
흉터는 보기에도 만들어진 지 한참 지난 듯 보였다.
“그 흉터는 제가 낸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소심하게 대꾸하자 그녀는 그게 아니라며, 다시 한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눈이 충혈된 게 안 보이느냐?”
눈동자가 빨간색이라 잘 몰랐는데, 인제 보니 흰자위도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보이긴 하는데…….”
내가 아무리 사고를 치고 다닐지언정, 처음 보는 사람의 눈을 찌를 정도로 안하무인은 아니었다.
“제가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억울함에 부정하자, 스피넬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하여간 네놈들은 본인이 해 놓고 안 한 척 시치미 떼는 건 제일이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비난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사람과는 말다툼하지 않는 게 좋았다.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니까.
난 서둘러 사과를 건네며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달랬다.
“죄송해요. 혹시 치료가 필요하시면 치료해 드릴게요. 그러니 여길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말하지 않았느냐. 살아서 돌아갈 생각 말라고. 내가 널 살려 두는 건 세라스에 관해 묻기 위해서다.”
“……그게 누군데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세라스를 모른다고?”
“음……. 유명한 사람인가요?”
이 세계의 아이돌쯤 되나?
“너한테서 세라스의 냄새가 나는데?”
사람 이름이 아닌 모양이었다. 내 몸에서 난다는 냄새에 팔을 들어 코를 킁킁거려 보았지만, 땀과 흙냄새 말고 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다.
“저, 세라스가 뭔지 정말 몰라요…….”
“그래. 말을 안 하겠다는 거군.”
“그게 아니라, 정말 몰라요.”
“그래, 알겠다. 모르겠다면 억지로 내뱉게 하면 될 일이지.”
그렇게 말하며, 스피넬은 구석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다.
“자백용 마법을 적어 놓은 책이 여기 어디 있었는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마법을 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자백 마법이면 생각보다 온화한 방법이네. 얼굴만 봐서는 당장에 거꾸로 매달아서 실토할 때까지 안 보내 준다고 할 줄 알았는데.
“저, 마법을 썼는데도 제가 아무것도 모르면 나가는 길을 알려 주실 거예요?”
난 웃는 얼굴로 슬며시 그녀에게 물었다.
“글쎄, 그땐 그냥 죽일까?”
“…….”
온화한 방법은 무슨!
릴리가 마녀 얘기를 하며 왜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일단은 여길 도망쳐 밖으로 나가야겠다.
그녀가 상자 꾸러미를 뒤지는 사이, 난 천천히 발소리를 죽여 공동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녀는 내가 공동을 나올 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난 무사히 굴 밖의 좁은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나가는 길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몇 번이고 갈림길을 마주했고, 그때마다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다행히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찾아내 달려가 보니, 저 멀리서 빛이 보였다.
서둘러 그 빛을 향해 달리자, 도착한 곳은…….
“절벽……이잖아.”
밖이라 생각하고 나왔던 곳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였다.
절벽 아래에서 바람이 한차례 세차게 불어왔다. 그대로 바람에 휩쓸려 갈 것만 같은 기분에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말라 왔다.
뒤를 돌아보자, 또다시 까마득한 어둠이 자리하고 있다.
돌아간다 한들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갈림길을 몇 번이나 마주쳤지?
다 기억할 수도 없었다. 마녀가 쫓아올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릴리! 루카스!”
혹시라도 내 목소리를 듣고 찾으러 오지는 않을까 싶어, 난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게 좋을 듯했다.
막 몸을 돌려 동굴 안으로 돌아가려는데…….
“여기 있었구나.”
스피넬이 내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