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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54)화 (54/159)

54화

멀미와 사투를 벌여 가며 광산에 도착해 보니 시공의 총책임자가 버선발로 마중을 나와 날 반겨 주었다.

산 위쪽엔, 광산 안쪽으로 터널을 뚫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작님께서는 어쩌시고, 아가씨께서…….”

“공작님께선 오늘 다른 급한 일정이 생겨 제가 왔답니다.”

그는 공작이 아닌 내가 온 것에 좀 놀란 눈치였지만,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날 반겼다.

“그러셨군요. 산길이 험하셨을 텐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꽤나 큰 공사네요.”

“대공사이긴 하죠. 잠깐 입구 쪽도 둘러보시겠습니까? 아직 공사 초기 단계라 깊이 들어가실 수는 없지만…….”

그는 내게 진행 상황을 보여 주겠다며, 나와 상단 쪽 사람을 안내하며 말했다.

“터널을 뚫고 수레가 움직일 수 있는 레일을 설치할 예정입니다. 지금은 아직 길만 다지고 있죠. 잠시 점심시간이라 다들 쉬고 있는데, 괜찮으시면 잠깐 안에 들어가셔서 보고 나오셔도 돼요.”

그의 제안에 나와 상단 사람은 좀 더 안쪽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공사가 많이 진척됐군요?”

“그러게요.”

난 적당히 상단 쪽 사람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광산이 개발된다고 해서 다들 기대 중이랍니다.”

그는 터널 안쪽으로 걸어가며 얘기했다.

“상단 쪽에서요?”

“물론 저희도 기대가 크지만, 저희뿐만 아니라 많은 제국민이 기대를 하고 있답니다.”

광산을 개발할 뿐인데, 상단도 아닌 제국민들이 기대할 만한 일인가?

“왜요……?”

“최근 들어 세금은 계속 오르고, 젊은 사람들은 걸핏하면 전쟁에 동원되고 있죠. 올 한해 농사도 썩 신통치 않고, 아주 죽을 맛인데…….”

잠시 한탄을 하던 그는 날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래도 광산이 개발되면 일자리가 생길 테고 그러다 보면 사람들도 조금 숨통이 트이지 않겠습니까?”

이오니아 제국은 전쟁으로 많은 약탈을 해 오고 있었지만, 그것이 곧 제국민들 삶의 질이 올라간다는 뜻은 아니었다.

클라우스가 전쟁에 빠져 나라를 돌보지 않는 사이 각지의 영주들이 멋대로 날뛰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포르토 지역도 영주가 귀족과 결탁해서, 영주민들을 쥐어짜고 있었다.

세금이 오르고 제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지만, 클라우스는 그들을 굽어살필 정도로 어진 황제는 아니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요즘 제국 내에서 아가씨의 인기도 상당하답니다. 지난번 카지노 건 때도 그렇고 이번 포르토에서 활약도 이미 수도에 소문이 다 퍼졌어요.”

활약이라 할 만한 게 있었나? 포르토에 가서 감기에 걸린 것밖엔 기억에 남는 일이 없는걸?

억지로 비행기를 태워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다들 뭔가 바뀌길 기대하고 있어요. 아가씨와 공작님께 말이에요.”

난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에 했다.

내게 뭘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 기대에 부응할 자신이 없다는 건 알 것 같았다.

난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터널은 언제쯤 완공이 될까요?”

“앞으로 3, 4년 정도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나 빨리요?”

“요즘은 옛날이랑 다르게 공사에 마법을 같이 이용하고 있죠. 물론 돈이 좀 많이 든다는 게 흠이지만, 그만큼 시간을 단축할 수 있거든요.”

3, 4년 뒤라……. 당장 일리온이 반역을 일으키는 게 두 달 뒤였다.

그렇게 되면, 이 광산은 황제에게 몰수당하고 말 테고 사람들의 기대는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좀 더 안쪽도 둘러봐도 되나요? 이왕 온 거, 겉만 쓱 둘러보면 아쉽잖아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버리기 위해 발을 내디디며 제안했다.

“너무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마세요. 위험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아가씨!”

상단 사람이 날 부르며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을 잡을 새도 없이 바닥이 꺼지고 말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래로 추락하며, 이대로 이번 생도 끝이 날 줄 알았다.

“으윽…….”

그러나 딱딱한 바닥을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내 몸은 물컹한 무언가에 한 차례 부딪힌 뒤 바닥에 떨어졌다.

입에선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야야, 꼬리뼈 나간 거 아니야?”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다행히 꼬리뼈가 부러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물컹한 무언가가 쿠션이 되어 준 덕분인 듯했다.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 앞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몸을 일으켜, 어두컴컴한 안쪽을 더듬거리며 움직였다.

까슬까슬하고, 따뜻하고 손으로 밀면 살짝 물컹한 느낌이 드는 이상한 물체가 앞에 놓여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두 손으로 더듬거리자 앞에 놓인 물체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자, 내 키를 가뿐히 넘길 것처럼 커다란 유리구슬이 빛을 내며 드러났다.

그리고, 그 유리구슬 안쪽의 새까만 조각이 기괴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설마, 지옥문 같은 건 아니겠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구슬에 좀 더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이 닿은 순간, 구슬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고 이어서 귀를 찢을 듯한 포효 소리가 들렸다.

***

아르티아는 자신을 찾아온 사내를 바라보았다. 일리온 셀레스타인.

익숙한 이름, 익숙한 얼굴. 하지만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익숙하지 않았다.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딱딱한 목소리는 그리 말문을 열었다.

“무슨 부탁을…….”

“그게……. 성녀님께서 축복을 내려 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리온의 표정은 썩 내키지 않는 부탁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

아르티아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약혼녀인 라벤느가 자신을 찾아와서 일리온에게 축복을 걸어 달라며 부탁했던 일을.

그날 일리온은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고, 라벤느가 돌아오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돌아가 버렸다.

일리온에게서 그런 취급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한은 말이다.

아르티아 세비온. 그녀는 한 차례 죽음을 경험하고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일리온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첫 만남부터 일리온의 태도는 제 기억과는 많이 달랐다.

“선객이 있는 줄 몰랐군요.”

일리온은 제 기억과 똑같은 말을 던지며 테라스에 발을 들였다. 아르티아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전 신경 쓰지 말고 계세요. 어차피 여러분들에게 전 신경 쓸 만한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그렇게 말하면 일리온은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라며 제 이유 없는 날 선 대꾸를 받아 주었다.

그러나 그날 일리온은…….

“어차피 오래 있을 건 아니니, 그럼 잠시 실례하죠.”

라며 대답했다. 자신은 전혀 안중에 없는 대답이었다.

아르티아는 순간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인 건 기억과 같았지만, 예의를 차렸던 첫 만남과는 다르게 오늘 일리온은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테라스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줄곧 연회장 안쪽을 향해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르티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원래는 그가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이었다. 상황이 바뀐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일단 그와 대화를 이어 갈 필요가 있었다.

“그걸 제가 말씀드려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얼음장처럼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일리온의 시선은 낯설었다. 아르티아는 뭔가 잘못됐다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그저.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닌가 해서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일리온은 그렇게 일축해 버렸다. 얼굴은 분명 그가 맞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그가 반응을 보인 건 잠시 후였다. 한참을 말없이 연회장 안쪽을 노려보던 일리온은 뭔가 발견한 듯 연회장 안으로 향했다.

아르티아는 일리온의 시선을 좇았다.

궁금했다. 그가 그토록 신경 쓰고 있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 걸린 여자를 바라보며 아르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팔을 그러쥐었다.

‘라벤느…….’

일리온의 약혼녀이자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클라우스와 춤을 추고 있는 거지?’

아르티아는 일리온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티아는 기억 속의 라벤느를 떠올렸다. 어딘가 우울하고, 항상 불안해 보이던 여자를.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연회가 있고 한 달 뒤였다. 황성에 갇혀 살던 그녀에게, 라벤느가 독대를 신청해 왔다.

그리고 라벤느는 대화 내내 아르티아를 향한 정제되지 않는 분노와 증오를 쏟아 냈다.

자신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한낱 포로 주제에 감히 누굴 넘보느냐 소리치며 제게 물을 쏟았던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 밝은 얼굴로 황제와 춤을 춘다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춤이 끝나자마자, 일리온은 곧장 연회장 밖으로 튀어 나갔다. 라벤느를 따라서.

아르티아는 그를 잡을 새도 없이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아르티아에게 당황과 후회만 남긴 연회가 끝나고 얼마 뒤.

이번엔 라벤느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서 자신을 찾아왔다. 그렇게 웃는 라벤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제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대화를 나눌 의지가 없음을 연신 피력했지만, 라벤느는 끈질기게 대화를 이어 가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본론을 내비쳤다.

“사실, 요즘 제 약혼자가 몸이 좀 안 좋지 뭐예요. 약도 영 신통치 않은 모양이라. 이런 부탁을 드려 죄송하지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성녀님께서 축복을 걸어 주실 수 있을까요?”

그 또한 그냥 무시하려던 아르티아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사제에게 축복을 걸어 달라는 건 그리 특별한 부탁은 아니었다. 회귀 전에도 제국의 귀족들이 왕왕 부탁을 해 왔으니.

황성에 갇혀 포로보다 못한 대우를 받을지라도, 일단은 제국의 손님이라는 위치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부탁하는 사람이 라벤느고, 그녀가 걱정한다는 사람이 일리온이라는 건 무시하기 힘들었다.

혹시라도.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회귀한 것이 자신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작은 의심이 싹텄다.

아르티아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못 이기는 척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건, 일리온의 거절이었다.

라벤느에 의해 억지로 자리에 앉은 일리온은 처음 만난 날처럼 자신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내비치지 않았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줄 뿐, 그의 관심은 여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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