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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53)화 (53/159)

53화

“그게 아니어도 괜찮네. 다른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까.”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분명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난 비눗방울을 슬며시 등 뒤로 감추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공작님. 정말 뭐든 다 들어 주실 거예요?”

“그래.”

뭘 오해하는지는 대충 짐작은 갔지만, 굳이 일리온의 오해를 풀지 않기로 했다.

대신 목소리를 살짝 내리깔며 감정을 잡았다. 흠흠.

“실은 요즘 매일매일 너무 힘들답니다. 마을에도 자유롭게 나가고 싶고, 매일 루카스 님한테 감시당하는 것도 싫고, 위치 추적 마법도 이제 그만 풀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랬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으니 일리온이 날 가만히 내려다봤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까 싶어 난 불만이었던 걸 하나씩 털어놓았다.

“말만 공작 부인이라고 하시지, 공작님은 그냥 절 부려 먹기만 하시고…….”

“부려 먹어?”

“매일같이 일을 시키셨잖아요.”

“……그건 그대가 받기로 약속한 벌이었어.”

일리온은 나지막하게 반박했다.

“제 가녀린 팔을 좀 보세요. 얼마나 일을 많이 했으면 요즘 팔이 시큰거린다고요.”

“…….”

난 연신 앓는 소리를 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무엇보다, 매일같이 듣는 예법 수업도 이제 그만 듣고 싶어요…….”

한참을 가만히 듣던 일리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지.”

“네?”

“……여기는 왜 올라와 있던 건가?”

“그, 그야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집에선 절 내놓은 자식 취급하고, 마음이 못 견딜 만큼 답답해서 올라왔어요.”

간신히 눈물을 글썽이며, 폭풍 연기 실력을 보여 주는데, 갈수록 날 내려다보는 일리온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갔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럴 게 아니라 결혼을 앞당기기로 하지.”

“네?”

잠깐만, 왜 결론이 그렇게 돼?

앞뒤 다 자르고 결론만 덩그러니 내놓는 일리온이었다.

“아니,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황급히 그를 말리자 냉정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그대의 가문에서 그대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는 것 같으니, 차라리 결혼을 서두르는 게 좋겠군. 말 나온 김에 다음 달에 진행하지. 공작 부인의 자리를 공고히 한다면 아무도 그대를 건들지 못할 거네.”

“겨, 결혼을 당기는 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앞으로 두 달 반이나 남은 일정을 한 달로 당기는 건 여러모로 무리가 있을 듯하온데…….”

“그건 걱정할 거 없어. 그대의 결혼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고 있는 일리온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는데, 두 달 뒤에 역모죄로 죽을 분이란 건 알고 있거든요?

“공작님께서 제 사소한 부탁 몇 개만 들어주셔도 전 충분히 만족스러운데요?”

왜 자꾸 내 명줄을 줄이려는 거야. 제발 네 명줄이나 걱정하라고!

“물론이야. 그대의 부탁도 들어줘야지.”

그는 손을 내 등 뒤로 뻗어 비눗물 병을 뺏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 손을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그전에, 잘 생각하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일리온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대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네. 지금까지 눈감아 주고 있단 걸 모르진 않을 거야.”

잔잔하게 가라앉은 붉은색 눈동자가 날 바라보았다.

“무, 무슨 소리세요? 전 지금까지 모두 진심을 말했을 뿐인데요.”

“그래? 날 사랑한다는 것도 모두?”

“무, 물론이죠.”

“그렇게 우길 생각이라면, 좋아. 그것만큼은 앞으로도 쭉 눈감아 주도록 하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 연기는 완벽했다고 생각하는데? 왜 안 믿는 거야!

“다만, 날 속여서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일리온은 끌어당긴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황성에서 내 목을 쥐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눈빛이었다. 목소리 또한,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행동은 정중했고, 부드러웠다.

그런데 어째서, 심장이 이렇게 미친 듯이 뛰는 거지? 그때만큼이나 불길한 고동 소리가 쉴 새 없이 귓가를 울렸다.

“그, 그럼요. 제가 어찌 공작님을 속이겠어요?”

일리온은 날 바라보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그래서, 바라는 게 뭐지?”

난 잠시 그의 목덜미를 주시하며 숨을 골랐다. 웅웅 거리던 심장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

“황성에 가신다고요?”

“그래.”

아침 식사를 하며, 일리온은 오늘 일정에 대해 세바스찬에게 얘기했다.

“그럼 광산에 들르시기로 했던 건 취소할까요?”

갑자기 정해진 일정에 세바스찬이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출발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출발이요?”

일리온의 시간에 맞춰 아침마다 얼굴을 비추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늦잠을 잔 탓에 좀 더 힘들었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이야기를 듣던 난 세바스찬에게 되물었다.

“상단 쪽에서도 사람이 오기로 했거든요. 공작님께서 다른 일정이 생기셨으면 약속을 취소해야 해서요.”

“…….”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일리온은 날 바라보았다. 그리곤 태연히 중얼거렸다.

“그럼 황성에 가는 걸 하루 미룰까.”

“네?”

마을에 마음껏 나갈 수 있는 자유와 예절 수업을 관둘 기회를 포기하고 그에게 얻어 낸 약속이었다.

황성에 들러 성녀를 만나고 오라는 부탁. 그 하나를 위해 양보한 수많은 바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는 안 되지!

졸음이 싹 달아났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상단 쪽 약속을 취소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일리온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일정을 까먹었을 리는 없고……. 알면서 이러는 것 같은데.

결국,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덥석 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대신 가도 될까요?”

“아가씨께서요?”

설마하니 내가 간다고 할 줄 몰랐는지 세바스찬이 놀라 되물었다.

“그래도 되겠죠? 공작님?”

“그대가 광산에 흥미를 가질 줄은 몰랐군.”

“그런 서운한 소리를. 공작님의 일을 돕는 건데,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죠.”

마지못해서 하는 대답에 일리온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땅 대신 돈을 내놓으라던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재밌을 만도 했다.

또다시 그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었지만, 아쉬운 건 내 쪽이었다.

일리온의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안 좋아지는 게 눈으로 보이니까. 이미 목덜미까지 올라온 반점은 이제 셔츠로는 가리기 힘들어 보였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성녀와 만나야 했다. 내게는 그걸 도울 책임이 있었고.

나 때문에 이 이상 이야기가 틀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러니 그걸 위해서라면 광산을 향한 일회용 관심 따윈 얼마든지 남발할 수 있었다.

더불어, 멀미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

“…….”

아니, 멀미는 좀…….

어쩐지 입맛이 싹 사라진 난 포크를 내려놓았다.

견딜 수 있는 것과 오기 부려 후환을 남겨 놓는 건 다른 거니까.

“오늘은 그만 먹는 건가?”

포크를 내려놓는 날 보며 일리온이 물었다.

“입맛이 좀 없어서요. 하하.”

누구 덕분에 입맛이 떨어져서 말이지.

***

배는 가벼웠지만, 머리는 무거운 상태로 방에 돌아와 나설 채비를 했다. 막상 거길 또 갈 생각을 하니, 후회가 밀려왔다.

“아가씨, 꼭 가셔야 해요?”

계획에도 없던 일정에 릴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내가 거길 또 가야겠냐고.

“어쩔 수 없잖아. 그렇다고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으니.”

“그게 아니라…….”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던 릴리는 말끝을 흐렸다.

“왜?”

릴리의 표정이 좋지 않아 이유를 캐묻자 릴리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실은 며칠 전 마을에 갔다가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요…….”

“무슨 소문?”

“그게……. 광산 주변에 마녀가 산다는 소문이요.”

“마녀?”

몬스터도 아니고 마녀가 산다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마녀라니. 거긴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설마……. 마녀가 왜 하필 그런 험한 산에 살겠어.”

릴리는 예전부터 떠도는 이야기를 좋아했고 내게 종종 들려주긴 했지만, 대부분 그저 소문에 불과한 이야기들뿐이었다.

이번에도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듣고 온 모양이었다.

“정말이에요. 거기서 일하는 인부들이 봤대요. 빨간색 머리를 한 마녀가, 사람을 잡아먹는걸요.”

“빨간 머리?”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였다.

“네. 아가씨도 아시죠? 7년 전에 셀바스 지역에 마녀가 나타나 쑥대밭이 된 사건이요.”

“어어. 그, 그렇지. 알고 있지.”

이 세계에 대한 거라면 7년 전은커녕 1년 전의 일도 모르지만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광산 근처에서 봤다던 여자가, 그때 그 붉은 머리의 마녀 아니냐고 다들 난리에요.”

“붉은 머리 마녀?”

7년 전이면 일리온이 스무 살 무렵일 것이다. 아마 이제 막 공작 작위를 수여했을 때니 그 마녀는 일리온의 저주랑은 관련이 없을 테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릴리에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물었다.

“그게 7년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셀바스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어머, 마녀가 나타나서 셀바스를 불태웠다는 얘기 못 들어 보셨어요? 불도 그냥 불이 아니라, 마법으로 피운 거라 무슨 수를 동원해도 꺼지지 않았대요. 그래서 영주마저 버리고 도망쳤다는 얘기는 엄청 유명한데.”

“아아, 그랬지 참. 그럼, 나도 알아. 잠깐 깜박한 것뿐이야.”

나는 짐짓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붉은 머리 마녀라는 거잖아?”

“맞아요. 한동안 잠잠하다가 갑자기 광산에 나타났다니 걱정이 돼서요. 혹시라도 마녀가 광석을 노리는 거면 어쩌죠?”

“글쎄. 광석을 노려서 뭘 하겠어.”

옷을 다 갈아입고, 마지막으로 단추를 채우던 난 대수롭지 않게 릴리의 말에 대꾸했다.

생각해 보면 일리온은 마녀를 죽여 저주를 받았으니, 그 마녀가 아직 살아 있을 리는 없었다. 붉은 머리의 마녀는 아마 상관없는 사람이겠지.

게다가 인부들이 광산에서 봤다는 사람이 정말 마녀라는 보장도 없었다. 마녀가 뭐가 부족해서 고작 마석을 노리고 광산에 나타나겠어.

“마석 캐는 게 어디 보통 일이야?”

“그래도 모르잖아요.”

그러나 겁이 많은 릴리는 마지막까지 걱정을 놓지 못하고 내게 당부했다.

“걱정하지 마. 루카스도 따라갈 거니까.”

난 울상인 릴리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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