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난 한동안 말없이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라벤느가 일리온과의 사이가 썩 좋지 못했음에도 쉽게 파혼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파혼당한 그녀에게는 돌아갈 곳도 살아갈 이유도 없었다. 오직 공작 부인이라는 껍데기만이 자신을 지켜 줄 방패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발버둥을 친 것이다.
처절하게, 그리고 지독하게.
하지만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고 해서 그녀의 잘못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그저 조금 안타까울 뿐…….
“피곤한가?”
“아니에요. 괜찮아요.”
일리온이 앞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생각에 잠겨 있던 난,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피곤하다면 잠깐 눈을 붙이도록 해. 집까지는 한참 걸릴 테니까.”
“어머나, 그럼 무릎베개해 주실 건가요?”
숨 쉬듯 내뱉는 내 무리한 요구에 오늘도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던 그의 입에선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래.”
“…….”
난 멍하니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어……. 저, 무리해서 그러실 필요는…….”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야, 물론 좋긴 한데…….”
설마 얼마 전의 그 이상 행동의 연장선인가? 연회 이후로 잠잠해졌다 싶었는데.
내가 먼저 제안해서 싫다고 내뺄 수가 없어 눈치만 살피다, 엉거주춤 일어나 일리온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기계 같은 뻣뻣한 움직임으로 그의 허벅지에 고개를 눕혔다. 내가 요구해 놓고도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공작님. 원래는 이런 거 싫어하셨잖아요?”
“싫어하는 걸 알고 있긴 했군?”
“그……. 그게…….”
난 어색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 그런데 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내 기분을 생각했다고? 일리온이?
누워 있어서 일리온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중되는 불안감도 존재했다.
“저 공작님…….”
“왜?”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성녀한테서 정말 축복을 받았는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갑자기 내게 잘해 주는 이유는 무엇인지……. 하지만, 어느 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이럴 때면 되레 웃으면서 추파를 던졌지만, 오늘은 그럴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되돌아올 그의 대답이 내가 상상한 게 아니면 어쩌나 싶어서.
“빠, 빨리 집에 도착했으면 좋겠네요.”
난 빠르게 말을 얼버무렸다.
“그나저나 마차를 빌릴 거면 그냥 교장 선생님께 텔레포트를 부탁드릴 걸 그랬어요.”
“그런 부탁은 그녀에게 무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일리온은 잠시 목을 가다듬듯 헛기침을 했다.
그런가? 미카엘은 그렇게 부려 먹으면서.
하긴, 그렇게 대단한 사람한테 고작 텔레포트를 요청하는 건 무례할 수도…….
난 그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요즘 라벤느가…….”
일리온은 뜬금없이 운을 떼더니, 말끝을 흐렸다.
“아가씨께서요?”
한참을 기다려도 뒷말이 들려오지 않자, 세바스찬은 대답을 재촉하듯 물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일리온은 겨우 말을 맺었다.
“이상해.”
“…….”
이상하다라……. 라벤느라면 그게 평범한 거 아닌가. 오히려 이상하기로 따지면 지금 일리온이 더 이상했다.
“뭐가 그리 이상하십니까?”
세바스찬은 일단 말이라도 들어 보자 싶어 되물었다.
“만날 때마다 매번 똑같은 질문을 하네.”
“무슨 질문을요?”
“따로 할 말이 없느냐고.”
“그건 좀 이상하네요.”
세바스찬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일같이 황성에 갈 일이 없냐고 물어.”
글쎄. 특별히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데.
“없다고 하면 의기소침해져서 돌아가고.”
“……그러고 보니, 리슈펠트 백작 부인께서 돌아가시고 아가씨께서 조금 우울해 보이긴 했죠.”
“역시…….”
생각해 보면 그일 말고는 라벤느의 상태가 딱히 안 좋을 이유도 없었다.
그대로 두 사람을 돌려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부담이 크신 모양이죠. 집안에서는 차기 공작 부인이라며 압박해 오는 데 비해, 정작 공작님은 아가씨께 관심도 없으시고. 우울하실 만도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일리온은 눈썹을 치켜들며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내 탓이라 하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요? 전 그저 아가씨의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
이 집에 제 편은 없단 말인가.
그러나 세바스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일리온은 그간 라벤느가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영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멋대로인 이유도 가족들의 지나친 애정 때문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실상은 아니었다.
떠올려 보면, 리슈펠트 백작은 결혼 얘기가 오가자마자 돈을 요구했었다. 정말 사랑하는 자식이라면 그렇게 돈 받고 팔듯이 딸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라벤느가 매번 자신을 좋아한다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저택을 떠나고 싶어 하던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닐까.
“……기분을 풀어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네?”
“뭘 다시 물어? 들었잖아.”
“아뇨. 못 들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니 귀가 안 좋아진 것 같단 말이죠.”
세바스찬은 능청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일리온은 턱을 괴고 그를 노려보았다.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라벤느라도 찾아왔나 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른 이였다.
“무슨 일입니까? 릴리?”
숨을 헐떡이는 릴리를 보며 세바스찬이 물었다.
“그게……. 라벤느 아가씨께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가 운을 뗐다.
“사라지셨어요.”
“저택은 다 찾아봤나?”
“네. 아가씨께서 가실 만한 곳은 모두 찾아봤어요.”
“그럼 경비병들을 불러서 정원을 수색하게…….”
오늘 하루 종일 저택을 오고 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일리온은 저택 높은 곳에서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라벤느?”
“앗, 아가씨! 세상에, 저 높은 곳에서 대체 뭘 하시는……!”
일리온과 마찬가지로 라벤느를 발견한 릴리가 소리쳤다.
저택의 가장 높은 다락방 창밖으로 몸을 걸터앉은 라벤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설마……! 나쁜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릴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쩜 좋아. 마님이 다녀간 뒤로 계속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신다 했는데. 설마, 저대로 떨어지시려는 건…….”
릴리가 울먹이며 세바스찬에게 물었다.
“설마요, 아무리 아가씨께서 상심이 크시다 하셔도, 뛰어내리실 리는…….”
아니, 생각해 보면 전적이 없지는 않았다. 절벽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했던 사람이니까.
리슈펠트 백작가의 내부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억지로 떠밀려 공작가에 오신 줄은 몰랐어요. 가족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 줄도 몰랐고. 전 아가씨께서 마냥 걱정이 없는 분인 줄 알았는데…….”
“괜찮아요. 릴리. 지금이라도 어서 아가씨를…….”
그러나, 세바스찬의 말보다도 일리온의 행동이 더 빨랐다. 일리온은 다급하게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내가 이 나이를 먹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을 받아야겠냐고.
이전 생에서도 16년을 공부만 했는데……. 빙의해서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 게 말이 되냔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세요, 절 이 세계에 빙의시킨 신님?
상도덕에 어긋난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의가 아니라고. 우리가 만약 계약서를 썼잖아요? 당신은 불공정 계약으로 고소당한다고요!
“하…….”
가정 교사를 피해 저택 구석으로 도망을 오긴 했지만, 정작 내가 도망을 쳐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비눗방울이나 불면서 시간 때울 때가 아니긴 한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입은 연신 비눗방울을 불고 있었다. 동그란 비눗방울이 공중에서 흔들리다, 벽에 닿으며 톡 하고 터졌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었다. 힐링 동영상도 ASMR도 없으니 어쩌겠어? 내 손으로 직접 제조하는 수밖에.
그렇게 한동안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비눗방울을 바라보았다.
매일같이 일리온을 붙잡고 황성엔 안 가냐, 할 말은 없냐, 넌지시 물어보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뭔가 큰 사고를 치려 해도 감시가 너무 굳건하고.
그에 비해 일리온의 반응은 갈수록 시큰둥해지고 있으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생각보다 성녀와의 첫 만남이 별로였나?
그럴 리가 없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르티아인데? 나 같으면 눈만 마주쳐도 신혼집은 어디에 얻을까 하는 상상을 하겠다.
아니면 나 몰래 밀회라도 하러 나가나? 그런 것치곤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도 늘 집무실이던데…….
“성녀 만나라고 자리까지 깔아 줬는데, 대체 뭐가 문제야?”
설마, 연애 경험이 없는 게 문제인 건가?
“……역시 그게 문제구나!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라벤느 아가씨! 아가씨!”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멀리서 날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도 찾았네. 될 수 있으면, 가정 교사가 집에 돌아갈 때쯤 날 찾아내길 바랐는데.
들켜 버린 거 어쩔 수 없이 손을 흔들었다.
“세바스찬! 릴리!”
“어서 내려오세요! 위험해요!”
세바스찬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손짓했다.
경사가 완만한 지붕 가운데에 뚫린 창이라 그리 위험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금방 내려갈게요!”
내려가면 공작 부인의 자세에 대해 한 소리 듣겠군.
또다시 시달려야 할 내 모습이 그려져 한숨을 내쉬는데, 등 뒤로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거기엔 일리온이 숨을 몰아쉬면서 서 있었다.
“공작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세바스찬, 릴리, 이젠 일리온까지. 아니, 땡땡이좀 쳤기로서니 직접 잡으러 올 일이야?
아아, 릴리. 어쩌자고 일리온한테 이른 거야. 차라리 가정 교사한테 잔소리를 듣고 말지…….
“그, 제가, 여기 온 건 말이죠…….”
잔소리를 하나라도 줄여 보려 그럴듯한 핑계를 찾아 말을 고르는 사이, 일리온은 지척까지 다가왔다.
얼마나 빠르게 올라온 것인지, 가쁜 숨을 내뱉는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달려올 일인가? 대체 얼마나 혼내려고.
내게 가까이 다가온 일리온은 내 허리를 안아 창틀에서 끌어 내렸다.
“앞으로 그대의 가족이 다시는 접근할 수 없도록 하겠네. 아니면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대에게 무릎을 꿇고 빌게 하겠어. 원한다면 벌을 줄 수도 있어. 그러니…….”
“네……?”
일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뛰어내리려는 생각은 하지 마.”
“공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