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이란다. 나도 어머니도 널 믿고 있으니까. 안 그래요. 어머니?”
“그래, 테오. 이 엄마는 널 믿는단다. 그러니, 이번엔 긴장하지 말고 잘해 보아라.”
라벤느에게는 한없이 차갑고, 엄격한 백작 부인은 테오에게만큼은 너그럽고 관대했다.
그 한결같고 헌신적인 믿음이 깨진다면 어떨까? 그것도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하지만, 여긴 방 안이잖아요. 마법을 잘못 사용했다가는…….”
테오는 마지막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주변에 결계를 쳤습니다. 그러니 테오 군께서는 안심하시고,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제게 보여 주세요. 그것으로 평가를 하겠습니다.”
무대는 준비되었고, 교장과 테오를 제외한 우리 세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테스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테오의 얼굴은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주문을 영창했다.
“파, 파이어 볼!”
그리고 그의 영창에 맞추어, 손끝에선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파이어 볼’이라는 마법에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온 힘으로 참아 냈다.
뭐, 탁구공도 공이니, 저것도 볼이라고 우기고자 한다면 우길 수 있을 테였다.
하지만 더 처참한 건 발사되어 날아가는 속도였다.
굼벵이가 기어가도 저것보단 빠를 것 같다는 감상을 남기는 사이, 파이어 볼은 공기 중에서 그대로 소멸하고 말았다.
“마나의 크기, 발사체의 속도, 유지력까지 무엇하나 평균 이하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정도로는 아무리 공작님께서 부탁하셔도 합격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교장은 간단하게 테오의 마법을 평가했다. 물론 그녀의 친절한 설명이 없어도 누구나 이 처참한 실력으론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굳이 설명을 해 주는 이유엔 자신을 괴롭히는 짜증도 조금 섞여 있는 듯했다.
“교장 선생님, 왜 우리 테오 기를 죽이고 그러세요? 파이어 볼은 맞잖아요! 탁구공도 공인데, 저것도 엄밀히 따지면 볼은 맞죠!”
“됐으니까 이제…… 그만해.”
“잠깐 기다려 보렴. 아무래도 교장 선생님께서 납득을 못 하신 것 같으니 말이야.”
“라벤느……. 그만하거라. 돌아가자.”
백작 부인 역시 충격이 컸던 모양인지 내 행동을 제지하며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테오가 황급히 따랐다.
“어머니, 잠시만요. 같이 가요!”
나 역시 혹여 두 사람을 놓칠세라 서둘러 뒤를 쫓았다.
***
라벤느가 사라진 뒤, 일리온은 몸을 들썩이다가 결국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에게 맡기라던 게 이런 뜻이었나?’
한참을 웃는 공작을 바라보며 아카데미의 교장 루시아는 의아스럽게 물었다.
“저, 공작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르긴 했는데, 이렇게 하는 게 맞았나요?”
루시아가 받은 전보의 내용은 간단했다. 잠시 후 그곳에 방문할 테니, 약혼녀가 무슨 소리를 하건 무시하고 아카데미의 규칙대로 일을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루시아는 전보의 내용에 충실하게 행동해 주었다.
“그래. 아무래도, 라벤느가 원하던 게 이런 그림이었던 모양이군.”
아직도 웃음기가 덜 빠진 목소리로 일리온이 대답했다.
“원하는 그림이요?”
뜻 모를 소리를 하며 일리온은 창가로 향했다.
“미안하게 됐어. 갑자기 찾아와 난동을 부려서.”
“아뇨, 이 정도는 난동 축에도 못 낍니다.”
귀족들이 찾아와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일이라, 루시아 역시 단련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찻잔을 치우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를 알고 지낸 지도 벌써 7년이 다 되어 가지만,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웃는 건 처음 보았다.
처음 아카데미에 후원하겠다며 자신을 찾아온 일리온은 차갑고, 어두워 어딘가 삶의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텅 비어 보였다.
가장 최근에 만났을 때도 여전했다. 그는 언제나 감정이 없는 인형 같은 사람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본 그에겐 예전과는 다르게 생기라는 게 느껴졌다.
“표정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공작님.”
“그런가?”
“사실 전 세간에서 떠드는 얘기를 믿지 않았습니다만…….”
루시아는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리온의 스캔들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 중 하나였다.
단순한 이유였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일리온을 만나 보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창밖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가엔 온기가 가득했다.
“저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노안이 왔나 봅니다. 공작님께서도 사랑이라는 걸 할 줄 아시는 분이셨네요.”
그렇게 말하며 루시아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우릴 완전히 구경거리로 만들 속셈이구나!”
아카데미 건물을 벗어나자, 백작 부인은 날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전 그럴 생각이…….”
“지금껏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기어이…….”
그녀는 손버릇이 참 나쁜 여자였다. 화가 나면 손부터 나가는 걸 보면.
그 손을 피하며 뒤로 물러서자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어머니, 그 손버릇 고치셔야겠습니다.”
“뭐?”
“마음에 안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서 되겠습니까?”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니?”
머리끝까지 발개진 그녀가 소리쳤다.
“그렇게 화내지 마시지요. 전 어머니가 걱정돼서 충고드리는 것뿐입니다.”
“라벤느!”
악에 받친 목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잘못한 건 테오였고, 난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모든 분노의 화살은 날 가리켰다.
“두 달 뒤면 공작 부인이 될 텐데, 그때도 절 그리 때리실 겁니까? 뭐, 보잘것없는 몰락한 가문이라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식의 폭력은 용납될 수 없는 사이란 걸 알고 계셔야죠.”
“뭐?”
“제가 어머니를 감옥에 집어넣는 패륜을 저지를 순 없잖아요?”
“누님! 말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테오마저도 반발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깨졌을지언정, 여전히 라벤느와의 사이보다는 두터웠다.
대단한 유대였다.
“테오, 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좀 더 열심히 공부에 정진하는 게 어떻겠니?”
“그 말이 왜 여기서……!”
“네가 매일 밤 공부하라고 준 돈으로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걸 어머니께서 알게 되면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니. 그러니 앞으로는…… 어머나, 실수로 말해 버렸네.”
난 입가를 가리며 가식적으로 웃어 보였다.
“테오, 너 감히……!”
“어, 어머니. 아니에요. 설마 누님의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죠?”
“집에 가서 다시 얘기하자. 그리고 라벤느, 아버지께 말씀드려 널 백작가로 돌아오도록 할 테니 그리 알거라.”
그녀는 최후의 통첩이라도 내리는 듯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기가 꺾여 숙이고 들어올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어머나, 그럼 공작님께 돈을 돌려드려야 할 텐데요. 이미 돈을 잔뜩 쓰신 거로 아는데, 마련하실 수 있겠어요?”
“그 정도 돈이 무슨 대수겠니? 광산이 있는데.”
아까도 느꼈지만, 이미 그 광산이 자기들 것이라는 게 기정사실이 된 모양이었다.
“참, 제가 말씀 안 드렸는데 그 광산 공작님께 드렸어요. 이미 명의도 바꿨답니다.”
“……뭐?”
“그러니 절 데려가셔도 어머니께서는 얻으실 수 있는 돈은 없어요. 그러니 광산은 포기하시고 공작가 사돈이라는 지위라도 지키시는 게 어떨까요?”
“네가 감히……!”
“아, 그리고 집에 돌아가시려거든 마차를 빌려드릴 테니 타고 가세요.”
그녀는 들고 있던 가방을 구겨 버릴 듯 주먹을 꽉 쥐더니, 그대로 내게 던졌다. 성격 하고는.
이런 집안에서 자랐으니, 라벤느가 그렇게 비틀려 있지.
“저런, 어머님 형편에 비싸게 구입하신 물건이잖아요. 이렇게 던지시면 안 되죠.”
그녀가 던진 가방을 친절하게 주워 테오에게 건네며 말했다.
“테오,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돌아가도록 해. 공작님께 이 꼴을 보여 드릴 순 없잖니?”
“…….”
그나마 상황 파악이 된 테오가 백작 부인의 손을 이끌었다.
백작 부인은 삭혀지지 않는 분노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준 난 근처 벤치에 걸터앉았다.
“하아. 나도 진짜 성격 나쁘네.”
일을 해결하는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을 알고 있긴 했다. 일리온에게 맡겨 두면 알아서 할 테니까.
뺨을 맞은 건 열 받긴 했지만,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해 가며 복수할 일은 아니었다.
단지, 라벤느를 제물로 바쳐 자신들의 행복을 유지하는 그들에게 구역질이 났을 뿐이다.
“누가 누굴 욕하는 것인지…….”
딱히 나라고 더 나은 인간은 아닌데…….
***
“방금 전엔 죄송했습니다.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교장실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루시아에게 사과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이런 일은 흔하니까요.”
흔하다는 말에 어쩐지 그녀의 애환이 느껴졌다.
“참,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는데, 영애께는 미약하게나마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네요.”
“네? 설마 제게도 마법사의 재능이?”
그래. 동생에게도 재능이 있는데, 누나인 나라고 재능이 없으란 법은 없지.
잔뜩 기대하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아가씨를 위해, 축복을 걸어 준 모양이에요.”
“축복이요? 마법으로도 축복을 걸어 줄 수 있나요?”
“네. 신성력과는 다르게 치유 효과는 없지만,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잘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어요. 상당히 미미한 효과이긴 하지만요.”
미미한 효과라니. 괜히 기대했네.
“누가 걸어 준 거지?”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일리온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미카엘인가?”
어쩐지 잊을 만하면 나오는 이름이었다.
“미카엘이라면, 황성에서 일하는 미카엘을 말씀하시나요?”
“……그래.”
답지 않게 적의를 드러내는 일리온을 보며 루시아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공작님께서 뭘 걱정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카엘이 괜한 오해를 사는 것 같으니 아니라고 말씀은 드려야겠군요. 그 아이의 마력은 아닙니다. 그보다 좀 더 순수하고 깨끗한 기운이에요. 꽤 실력 있는 마법사인 듯하네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
“……딱히 없는데요.”
그 정도로 실력 있는 마법사를 내가 알 리 없지 않은가? 내가 아는 마법사라 해 봐야, 미카엘 아니면 황제인 클라우스뿐인걸.
게다가 황제가 내게 축복 따위를 걸어 주었을 리는 없으니 논외로 치고.
혹시 그건가? 빙의자 버프? 그거라면 좀 더 좋은 걸 주면 좀 좋아? 그랬으면 진작에 원작 탈출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거 아냐!
말이 좋아 미미한 효과지, 이게 부적이랑 뭐가 다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