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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50)화 (50/159)

50화

결국, 중재에 나선 난 마지못해 대화 주제를 바꿔 보기로 했다.

“저, 공작님. 그보다 어머니께서 마석 광산 개발 건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는데요.”

“그렇지, 참. 그 건에 대해서 말인데…… 아무리 그래도 백작님께 일언반구 없이 개발을 진행하시는 건…….”

“문제 있습니까?”

일리온은 사뭇 공격적인 말투로 되물었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부인의 미소에 금이 갔다.

“그야, 그 땅은 이제 백작가의 것이니 당연히 백작님과 얘기를…….”

이야. 뻔뻔스레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 같아선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말에 일리온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되물었다.

“라벤느가 공작가의 사람이라고 얘기한 건 백작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땅의 소유자와 얘기해 정식으로 개발을 하는데 왜 백작의 의견이 필요한지 모르겠군요.”

“어머, 공작님. 아무리 그래도 라벤느는 아직까지 리슈펠트가의 사람입니다. 결혼을 하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 라벤느를 셀레스타인가 사람으로 보내는 대신, 먼저 돈을 요구한 건 백작인 걸로 기억하는데, 아닙니까?”

“말이 좀 심하시군요, 공작님. 설마 제가 딸아이를 돈에 팔아넘겼다는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날카로운 목소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공작이라는 걸 망각한 듯 보였다.

“진정하세요. 어머님도, 공작님도. 이 이야기는 나중에 아버님과 다시 하시는 게 어떨까요?”

다시 한번 테오의 발길질에 난 두 사람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리온을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해서야 겨우 그 가시방석 같은 마차를 벗어날 수 있었다.

백작 부인과 테오가 먼저 앞장서서 아카데미로 향했고, 나와 일리온은 그 뒤를 따랐다.

힐끔 바라본 일리온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 좋아 건드리면 찔릴 것처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했던 건데.

“공작님? 제가 아까 당부드린 말씀 기억하시죠?”

“…….”

애써 웃으며 물어보았지만, 일리온은 내게 눈길을 던지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기억하시죠?”

난 다시 한번 대답을 은근히 종용하며 물었다.

“……화장으로 감춘 건가?”

“네?”

“아직 조금 부은 것 같은데. 집에 돌아가면 사제가 도착해 있을 테니, 꼭 치료를 받게.”

아니, 내가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닌데?

그러나 일리온은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결국, 일리온이 왜 화가 났는지 찾는 걸 포기하고,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향했다.

교장실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책 냄새와, 향긋한 차 냄새가 어우러져 분위기 좋은 도서관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어서 오시지요.”

아카데미의 교장, 루시아는 잿빛 머리에 나이가 지긋한 여자였다. 그녀는 온화한 얼굴로 갑자기 방문한 손님을 불쾌한 기색 없이 맞아 주었다.

“라벤느 양과 가족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가 방문한 이유는 미리 편지로 언질을 해 두었기에 루시아 역시 이 만남이 그리 기쁜 만남이 아니라는 걸 알 것이었다.

다만 연륜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듯 그녀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오늘 이렇게 온 이유는 제 남동생의 입학과 관련해 상의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루시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요청하신 대로 남동생분인 테오 군의 시험 성적을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오류가 있었던 게 맞나요?”

“아니요. 저희 쪽의 채점 결과는 정확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우리에게 시험 성적표를 보여 주었다.

설마하니 성적표를 대놓고 보여 줄 거라 생각 못 했던 백작 부인과 테오의 얼굴은 굳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 가서 성적표라고 내밀기에는 부끄러운 성적이었으니까.

합격선에 간당간당 매달린 것도 아니었고, 이걸 학연, 지연, 혈연 같은 것으로 밀어붙이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려 했다면 여길 안 왔지.

“어머나, 교장 선생님. 시험 성적 따위로 제 남동생을 평가하려 하시다니요.”

“이 시험은 그 어느 시험보다도 공정하게 치러지고 있습니다.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시는 건…….”

“교장 선생님? 제가 보낸 전보 내용은 기억하시나요?”

“그거라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시겠지요. 동생의 입학을 허가해 주세요.”

“저…….”

교장은 나와 일리온을 번갈아 보다 난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아카데미는 철저하게 실력주의로 학생을 선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공작님의 요청이라 할지라도…… 성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어머나, 그걸 바꿀 수 있는 게 바로 권력 아니겠습니까?”

옆에서 차를 마시던 어머니가 내 말을 거들었다. 말도 안 되는 성적표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듯 보였다.

“게다가 사람 한두 명 더 추가된다고 해서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죄송하지만, 그 요청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교장의 의사는 완고했다. 그녀의 일관된 태도에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성적표를 집어 들었다.

다시 봐도 참으로 처참한 성적이었다.

고작 이 정도 성적을 가지고 아카데미에 들어가려 했다니. 테오, 너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어?

리슈펠트 백작가에 머문 기간은 며칠 안 됐지만, 테오가 매일 다른 향수 냄새를 묻혀 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백작 부부가 그에게 지원해 준 돈으로 여자 만나는 데 쓰고 있었겠지.

그럼 이제, 좀 더 미친 척해 볼까?

찍, 찍.

난 눈앞에서 성적표를 갈기갈기 찢으며 뿌렸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교장뿐만 아니라 백작 부인과 테오까지도 놀라서 날 바라보았다.

“어머니, 조금 더 테오를 믿어 주시지요. 애초에 이런 종잇조각으로 우리 테오의 능력을 가늠하려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라벤느?”

“여, 영애. 이게 무슨……!”

세 사람은 놀라서 날 바라보고 있었고, 오직 일리온만이 살짝 헛기침하며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일리온이 가장 먼저 날 제지하려 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권력 따위에 기대지 않아도, 우리 테오는 충분히 합격할 만한 재능이 있어요. 게다가 테오는 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3년 동안 매일 밤낮 없이 공부에 정진했단 말입니다.”

모두 백작 부인이 내게 했던 말이었고, 난 그 말을 고스란히 교장에게 돌려주었다.

“긴장해서 성적이 잘 안 나오는 일이야 흔한 일 아니겠습니까? 안 그러니 테오? 시험이 그렇게 어려웠던 것도 아니잖아?”

“그, 그렇죠. 단지 긴장을 좀 했을 뿐이에요.”

내 유도 질문에, 테오 역시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앞이라고 차마 아니라는 소리는 못 하는 모양이다.

애초에 내가 이렇게 과장된 연극을 하는 건, 그와 백작 부인의 꿈을 산산조각 내 버리기 위해서였다.

돈을 긁어모아 가문을 위해 공부시킨 아들이 실제로는 그 돈으로 놀기만 하고 제대로 된 마법 연습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상대하는 데 제정신일 필요는 없지.

“영애,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교장은 끝까지 평정을 유지하며 날 말렸다.

그러니 이쯤 해서 못 이기는 척 화를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제안을 해 볼까 한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 동생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시라는 얘기입니다.”

“……네?”

“이런 종이로 사람을 평가하면 곤란하죠. 실력으로 평가하신다고 하셨으니 동생의 마법 실력을 보고 판단하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안 그러니, 테오?”

테오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하자,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그렇죠.”

내 의도를 알아들은 교장은 안경을 한 번 고쳐 쓰더니,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얘길 꺼냈다.

“물론 저희도 마법 특기생을 따로 지원받아 뽑긴 합니다. 마법에 재능이 특출 난 인재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요.”

“다행이네요. 그럼, 저희 테오의 실력도 한번 봐주시죠.”

“이미 입학시험과 관련된 모든 평가가 끝났습니다. 정 원하신다면 내년에 다시 한번…….”

“어머, 그럴 순 없죠. 우리 테오에게 1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데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부탁드리고 있잖아요? 셀레스타인가에서 이 아카데미에 매년 후원하는 금액이 얼마인지, 물론 잘 아시리라 믿어요.”

“……그, 그건.”

내 말에 평정을 유지하던 그녀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물들기 시작했다.

“자, 잠깐. 누님. 그렇게 강경하게…….”

상황이 이쯤 되니 테오가 날 말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실력 테스트를 하게 된다면, 어머니 앞에서 모든 걸 낱낱이 까발려야 할 테였으니까.

“어머, 테오. 걱정하지 마렴. 원래 재력과 권력이란 이렇게 쓰는 거란다. 누나에게 맡기렴.”

난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테오를 안심시켰다. 안타깝게도 내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점 초조해했지만.

다행인 점은, 일리온이 내 이런 발언에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까부터 자꾸만 헛기침을 하고 있을 뿐.

나한테 감기라도 옮았나?

“알겠습니다. 공작님께서 부탁하신 것도 있으니, 특별히 허락하도록 하죠.”

결국, 교장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저, 누, 누님?”

테오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 옷깃을 붙잡았다. 일이 이렇게 될 거란 건 전혀 예상 못 한 얼굴이었다.

“왜 그러니? 설마 자신이 없는 거야? 걱정하지 마, 테오. 넌 지금껏 3년이나 마법에 정진해 왔잖니?”

난 싱긋 웃으며, 사랑스러운 동생을 아끼는 누나를 연기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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