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일리온에게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뭐 요즘 새롭게 아는 것들투성이라 새삼스러울 일도 없지만.
역시, 넌 책 속에서 봤을 때 제일 예쁜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일리온을 씹어 가며 용건을 꺼냈다.
“실은 제가 란셀 후작 부인의 초대장을 받았답니다! 이거 보실래요? 초대장 너무 예쁘죠?”
“그래서?”
한결같은 그의 냉대에도 나는 꿋꿋이 웃으며 화답했다. 내 가벼운 목소리가 최대한 그의 귀에 거슬릴 수 있도록.
“그래서, 다음 주 금요일에 다녀올게요.”
그가 들고 있던 펜을 삐끗했다. 그리고 드디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거길…… 다녀오겠다고?”
‘네 주제에?’라는 말이 빠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표정 살벌한 거 봐.
어째서인지 지난번부터 저 미간은 펴질 줄을 모르는 듯했다. 그러나 난 눈치 없는 척,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네! 실은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언제나 사교계를 동경하고 있었답니다. 이번 기회에 얘기가 통하는 친구도 만들면 좋지 않을까요?”
또다시 내 철없는 소리에 작게 한숨을 쉰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야 나라도 고민할 것이다.
사교계의 ‘사’자도 모르는 무지렁이를 거기가 어디라고 풀어놓겠는가? 목줄 꽉 채워서 데리고 다녀도 걱정스러울 판에 혼자 보낸다고?
아마 온종일 내가 무슨 사고를 칠지 좌불안석하고 있겠지.
그리고 다음 날 신문 1면에 실린 날 마주할 것이다.
예를 들면 모 영애의 치마에 샴페인을 쏟았다던가, 모 영식과 드잡이를 했다던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것도 좋겠군. 헤드라인은 아직 고민 중이니 기대하렴.
속으로 웃음을 삼킨 나는 재빨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세바스찬이 그러는데, 저한테 온 초대장이니까 제가 결정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 가도록 해.”
예상과 다르게 흔쾌히 허가가 떨어졌다. 왜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대신 나도 같이 가지.”
“……네?”
그래, 어쩐지 대답이 답지 않게 시원스럽다 했어. 그럼 그렇지, 우리가 쌓아 온 불신이 얼만데.
그의 예상치 못한 선언에 갑자기 부장님과 거래처 외근을 가게 된 대리마냥 벌써 속이 꽉 막힌 듯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저랑…… 같이요?”
혹시나 내가 들은 게 맞나 싶어 재차 묻자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되나?”
“그, 그럴 리가요. 와아……. 공작님과 같이 갈 수 있다니, 너무 신나요!”
젠장, 폭탄을 던지러 왔는데, 되돌려 받을 줄이야.
발등에 떨어진 불, 아니 폭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불안함을 느끼며 나는 간신히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였다.
“릴리, 난 왜 이렇게 미련한 걸까.”
“……뭐 아가씨께서 이상한 행동하시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또 왜 그러세요.”
릴리는 시큰둥하게 내 말에 대답했다.
“그럴 땐 아니라고 해 줘야지!”
내가 울상을 지으며 릴리를 바라보았으나 릴리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테이블 위로 짐을 잔뜩 올려놓았다.
“여기요. 말씀하신 소설들이랑 신문, 그리고 어제 요청하신 물건이에요.”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더니 그새 마을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난 릴리가 가져다준 물건 가운데 소설책을 한 권 집어 들고서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일리온 괴롭힐 시간도 모자란데 시간이나 때우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뭐, 그 목적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튼, 사교계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하다못해 분위기만이라도 참고하려고 구해 온 소설이었다. 로맨스 하면 사교계고 사교계 하면 로맨스 아니겠어?
겸사겸사 일리온이 기겁해 할 만한 대사도 몇 개 뽑아 둘 생각으로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소설에 푹 빠져 한참 쿠키를 오독오독 먹으며 읽다 보니 드디어 여주인공이 사교계에 처음 데뷔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리고 말 안 해도 예상 가능한 다음 장면에 여주인공은 악녀에게 당하고 있었다.
‘어머, 흔해 빠진 액세서리 좀 봐. 거지한테 적선해도 가져가지도 않겠어.’
‘가난한 집 영애니 어쩌겠어요.’
‘누가 초대한 거야? 수준 떨어지게?’
예상했던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대사 하나하나가 가슴을 후벼 팠다. 어째서인지 머지않은 미래의 내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이 구하러라도 와 주지. 나한테 있는 거라고는 말만 하면 인상을 찌푸리며 날 한심하게 보는 일리온뿐이잖아. 게다가 걔가 제일 무서워!
“역시 지금이라도 못 가겠다고 할까?”
“또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어서 나오세요. 재단사분 도착하셨어요.”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어느새 방에 돌아온 릴리가 내 말을 자르며 날 잡아끌었다.
제 무덤 제가 판다는데, 난 무덤 파는 것도 모자라 영구차가 지나갈 길까지 닦고 있는 기분이었다. 괜히 일리온 괴롭혀 보겠다고 나서서…….
결국, 내키지 않는 걸음을 터덜거리며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 내려가 보니, 그 넓은 방이 색색의 드레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소설 속에서 종종 상상했던 장면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전보를 넣은 게 오늘 아침일 텐데, 고작 말 한마디로 이렇게 많은 드레스가 신속하게 배달되다니, 새삼스레 공작가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졌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패션에 민감한 직업답게, 정장을 잘 차려입은 남자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응접실로 오는 길에 릴리가 잔뜩 호들갑을 떨던 것으로 보아 수도에서 꽤나 유명한 재단사인 모양이었다.
짧은 인사를 건넨 후 릴리의 도움을 받아 줄자로 몸의 치수를 잰 뒤 샘플을 하나씩 대보기 시작했다.
“세바스찬 님께 연락은 받았지만, 일주일이라니, 정말 빠듯하긴 하네요.”
재단사는 조금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그러는 것도 이해는 갔다. 사실 이런 큰 파티의 초대장은 늦어도 보름 전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야 초대받는 입장에서도 준비할 수 있으니까. 다만, 주최자 본인조차도 날 초대하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공작과 나의 약혼 소식이 알려진 게 이제 겨우 일주일 전이었고, 그전까지 세상은 라벤느 리슈펠트라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후작 부인도 발표를 듣자마자 부랴부랴 공작저에 초대장을 보냈을 것이다.
난 지금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니 무리해서라도 초대하고 싶었겠지.
그나저나 이 많은 옷을 언제 다 대본담.
이건 어떤지 저건 어떤지 하고 묻는 재단사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시작부터 의욕이 떨어진 나는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엄청나게 화려한 자수랑 엄청나게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하고 싶어요.”
솔직히 말해 원단이 어떻고, 색상이 어떻다 떠들어 봐야 어렵기만 할 뿐이었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돈 처바른 느낌 물씬 나는, 사치와 허영에 찌든 귀족 영애의 모습이었다.
이왕이면 돈을 처바르다 못해 드레스 때문에 사람이 안 보일 정도가 딱 좋았다. 그 정도는 되어야 일리온의 뇌리에 박힐 테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금으로 만든 판금 갑옷이라도 입을 수 있었다.
“시간이 빠듯해 화려한 자수는 지금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안 돼요? 그럼 금으로 만든…….”
판금 갑옷이라도 내놓으라고 하려던 나는 응접실로 들어오는 일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잠시 놀라긴 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샘플로 대보던 드레스를 펼쳐 일리온 앞에서 한 바퀴 돌아 보았다.
“연회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고르던 중이랍니다. 이 옷 어때요? 여기에 금이랑 루비로 장식하고, 커다란 리본을 추가할 생각이에요. 예쁘겠죠?”
아까와는 다르게 너무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나를 보며 재단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 아저씨도 알잖아요. 원래 먹고살기가 이렇게 힘든 거. 더러워도 서로 조금만 참읍시다.
그러나 일리온은 눈앞에서 난리를 치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 듯 재단사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드레스는 남색으로 하고, 장식은 최소한으로 부탁하지. 세바스찬, 액세서리는 다이아몬드 세트로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주인님.”
옆에 서 있던 세바스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다예요? 저, 저는 이 드레스가 입고 싶은데요!”
나는 그냥 핑크도 아니고 10km 밖에서도 한눈에 들어올 법한 끔찍하리만치 눈부신 강렬한 핑크 드레스를 공작의 눈앞에 갖다 대며 외쳤다.
그러나 공작은 이렇게나 눈이 아픈 분홍색에도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가만히 날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의 드레스를 누구 돈으로 산다고 생각하지?”
아니, 이렇게 나온다고? 진짜?
나는 얼이 빠져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소설의 일리온이라면 상상도 못 할 대사였다.
성녀한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굴더니! 내가 간을 달랬어! 쓸개를 달랬어? 고작 드레스 한 벌 사 달라고 한 거로 그런 소리까지 들어야 해?
그러나 그런 소리를 듣고도 차마 따질 용기가 없는 나는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리다가 마지못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공…자…ㄴ…….”
“뭐?”
진짜! 누가 이딴 쪼잔한 놈이 최애래? 응? 누가?
이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남자의 크나큰 아량에 감탄하며,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야 물론 공작님이시지요.”
“잘 알고 있군.”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젠장! 내가 분을 못 참고 핑크색 드레스만 꼭 쥔 채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 세바스찬이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아가씨. 아무래도 두 분이 약혼하시고 처음 가는 공식적인 자리라 공작님께서 일부러 그러신 겁니다. 게다가 란셀 후작 부인께서는 분홍색을 좋아하시니, 당일도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오시겠지요. 주최자와 드레스 색이 겹치면 아가씨께서 눈치가 보이시지 않겠습니까?”
위로해 줘서 고마워요, 세바스찬. 역시 당신뿐이야.
하지만 잘못 짚었어요. 내가 화내는 이유는 좀 더 공작의 돈을 뜯어내지 못해서라구요!
드레스에 보석 하나 정도는 박아 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나 돈을 쥔 최종 결정권자가 안 된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어차피 마음이 있어서 집착한 것도 아닌 분홍색 드레스를 던져 버리고, 남색 계열 드레스를 몇 벌 더 대보았다.
“이 중에서 제일 비싼 거로 주세요.”
아직 가격에 미련을 못 버린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