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어머나! 안녕하세요!”
난 두 사람에게 걸어가며 멀리서도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중년의 남자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다 내 얼굴을 확인하곤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안녕하십니까, 리슈펠트 양. 이런 곳에서 다 뵙는군요.”
“안녕하세요? 저…….”
“드미트리입니다. 벤자민 드미트리. 이쪽은……, 이놈아 뭘 빤히 쳐다보고 있어. 고개 숙여.”
그러며 푸른색 머리를 다급히 누르며 인사를 시켰다.
“어머나, 제 생명의 은인을 이런 곳에서 뵙네요.”
“네?”
“그분께는 벌써 두 번이나 도움을 받았거든요.”
드미트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와 푸른 머리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도, 도움이요?”
“네. 공작님께서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내 말에 드미트리는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가 금세 자세를 고치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그렇습니까? 하긴 미카엘 녀석이 유능하긴 하죠. 핫핫핫.”
“안 그래도 그때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잠시 자리를 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야, 물론이죠. 데려가시죠.”
드미트리는 그렇게 말하며 미카엘의 등을 떠밀어 내게 넘기고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천천히 대화 나누세요.”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보다 난 미카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영애. 덕분에 두 시간 들을 잔소리가 한 시간으로 줄었네요.”
미카엘은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게 감사를 건넸다.
“뭘 그리 잘못하셔서 혼나고 계셨어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시킨 대로 일한 것뿐인데 잘못되니까 제 탓이라고 화풀이하는 거지.”
저런. 그쪽도 고충이 많구나. 직장인의 비애란…….
“그보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전 늘 잘 지내고 있죠.”
“……포르토 지역을 또 한바탕 뒤집어엎어 놓으셨다던데.”
“그게…… 거기까지 소문이 났어요?”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아나 싶어 놀라 물어보니, 미카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제가 알 정도면 이미 황성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고 보셔도 돼요. 마법사들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어서 소문에 가장 어둡거든요.”
“하하…….”
대체 어떤 삶을 사는 건지. 자세히 듣지 않아도 대충 상상이 가는 그의 하루를 생각하며 멋쩍게 웃었다.
“아가씨께서는 참,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으시네요.”
“그러게요.”
“공작님께서 걱정하실 만도 해요.”
그 걱정의 대부분은 단순히 내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데, 공작님은 어디 계시고 혼자 계세요?”
내가 혼자서 황성을 돌아다니는게 의아스러웠는지 미카엘이 물었다.
“그게, 별건 아니고, 그냥…… 길을 좀 잃어서?”
“…….”
나도 내가 한심한 거 알아. 그렇게 보지 마. 어쨌든 덕분에 널 구해 줬으니까.
미카엘 덕분에 난 무사히 궁을 빠져나와 정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5분이면 될 것을 30분을 헤매고 있었다니. 역시 길치는 괜히 길치가 아니라니까.
“와! 드디어 나왔다. 고마워요, 미카엘.”
“뭘요. 아, 그리고…….”
미카엘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목걸이 하나 꺼냈다.
“이게 뭐예요?”
“……아티팩트에요. 가운데 구슬을 돌리면 절 호출할 수 있어요.”
“미카엘을요?”
“네……. 아무래도 아가씨께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아가씨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저희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고.”
“에이, 그럴 리가요.”
내가 웃으며 손사래를 치자, 미카엘은 정색하고 아티팩트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아뇨. 높은 확률로, 어디 있는지 찾아내라고 닦달할 겁니다. 저기 있는 저분이.”
그렇게 말하며 그는 정원 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일리온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리온한테 꽤 많이 시달렸구나. 저런……. 난 못 이기는 척 아티팩트를 받아 들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필요하게 된다면 잘 쓰도록 할게요.”
“부디 이걸 쓸 일이 없었으면 하지만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작님이랑은 얘기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게 말하고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황급히 황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를 보며 손을 흔들다 몸을 돌리자, 언제 온 건지 일리온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어머, 대화는 잘 나누셨어요?”
“무슨 얘길 한 거야?”
뭐, 얘기라고 할 만한 게 있었나?
“그냥, 저번에 구해 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했어요.”
“……나는 고맙다는 얘길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네?”
무슨 얘기지? 정말로 뜻을 몰라 그에게 되묻자 일리온이 말을 덧붙였다.
“심지어 그는 내가 고용한 마법사였는데, 나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하면서 미카엘한테는 고맙다고 하는군.”
“……어, 그게…….”
“난 그대가 고맙다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야.”
평소처럼 비꼬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어쩐지 묘하게 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설마 그걸 마음에 담아 뒀을 줄 몰랐는데…….
“물론 공작님께도 감사하고 있죠.”
“뭘?”
“음, 이것저것?”
“이왕 감사받는 거 정확히 뭘 얼마나 고마워하는지도 같이 얘기해 줬으면 하군.”
뭐지, 아까 자기 말을 무시한 것에 대한 앙갚음인가? 아니면 늦게 와서 화가 난 건가?
“어, ……제가 늦게 와서 화나신 건가요? 어서 집에 갈까요?”
그래, 성녀도 있는데 자꾸 애같이 굴지 좀 말고 그냥 집에 가자. 그러다 성녀가 너한테 정떨어지면 어쩌려고.
혹여 성녀가 이 꼴을 볼세라 억지로 웃으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감사 인사를 다 못 들었는데?”
내 뒤를 따르며 일리온이 물었다. 집요한 구석이 있는 건 알았지만, 오늘따라 정말 이상한 데서 집요하게 굴었다. 어디서 뭘 하다 늦게 온 거냐고 물었으면 이해라도 하지.
애초에 내가 너한테 감사 인사를 왜 해야 하는데?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네가 나랑 정략 결혼하려고 해서 그런 거잖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말을 할 대담함도, 일리온을 입 다물게 할 지위도 없었다.
그래, 해 달라면 또 해 줘야지. 두 번 다신 그런 소리 못 하게 아주 완벽히 질리도록.
난 몸을 휙 돌려 일리온을 바라보며 과장되게 손을 모았다.
“아아-. 공작님, 어찌 감사하단 한마디로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공작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시며 제 세계의 주인이세요! 이럴 게 아니라 기념비를 세우죠! 공작님께서 절 구해 준 날을 국경일로 만들어도 좋겠어요!”
“풉…….”
내 꼴이 우스웠는지 일리온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좀 만족하셨나요?”
“그래.”
미처 숨기지 못한 웃음이, 대답과 함께 새어 나왔다.
아, 먹고살기 힘들다.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돌렸다.
***
이른 아침, 뜻밖의 손님이 저택을 찾아왔다.
“어머……니?”
현관 앞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계에 와서 몇 번 얼굴도 보지 못한 라벤느의 어머니였다.
“뭘 그렇게 놀라느냐? 내가 못 올 데라도 온 것처럼?”
아침 드라마의 시어머니 같은 대사를 친어머니가 내뱉고 있는 건 둘째 치고, 편지 한 통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올 줄…….
당황하는 내 표정에서 생각을 읽은 모양인지, 같이 온 동생 테오가 대신 대답했다.
“편지를 썼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어서 말이죠.”
편지가 왔었나? 릴리를 바라보니, 멋쩍게 웃으며 책상 위에 올려놓았는데 못 보셨냐 물었다.
그러고 보니, 출장에서 복귀하던 날 릴리가 편지를 보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일리온을 성녀랑 이어 주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냥 넘긴 내 실수였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제가 미처…….”
“기껏 공작가에 보내 놨더니, 호사에 정신을 못 차리는 모양이구나.”
그녀는 내 말을 끊고서 잔뜩 날이 선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 기세에 눌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언제까지 네 어미를 현관에 멀뚱히 세워 놓을 셈이냐.”
“……아, 네. 들어오세요.”
난 서둘러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하고 차를 내왔다.
“공작님은?”
“잠시 외출을…….”
“그래? 언제 돌아오시지?”
“글쎄요. 저에게는 말을…….”
“이제 곧 공작 부인이 될 건데,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니? 대체 여기서 뭘 배운 것이야.”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 들어오는 건 그녀의 특기인 듯했다.
말을 하는 족족 잘라 내던 그녀는 결국 앙칼진 목소리로 날 다그쳤고 그 기세에 눌린 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일을 배우러 공작가에 온 것은 맞지만, 정작 내가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전부터 가정 교사가 찾아오긴 했지만, 그것도 예법을 배우기 위해서였지 공작가와 관련된 일은 아니었고.
애초에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기에 그런 거지만…….
“하아, 정말이지. 어미는 너 때문에 하루도 편히 잘 수가 없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알면, 미리 조심했어야지! 넌 늘 그 모양이구나. 그 말로 때우는 몹쓸 버릇 좀 그만두지 못하겠니?”
으으. 대체 라벤느는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산 거야? 백작가에 머물렀던 일주일간은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긴 그때는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얼굴을 자주 못 보긴 했었지. 용건이 없으면 찾지도 않았고.
“그보다 요즘 신문에 자주 나오더구나.”
“아, 네.”
난 또다시 혼나지는 않을까 잔뜩 긴장한 채로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마석이 묻힌 땅을 발견했다고?”
“네.”
“그런 땅을 샀으면 가족들에게 먼저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내가 이런 소식을 네 입이 아니라 기사로 먼저 접해야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구나.”
“…죄, 죄송합니다.”
역시나 또다시 날 혼내기 위해 꺼낸 말이었구나. 오늘 종일 혼만 나다 끝날 것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그 건도 겸해서 왔다. 아무리 결혼하는 사이라고 해도, 그 땅은 엄연히 우리 것인데 당연히 우리 쪽에서 관리해야 하지 않겠니?”
엄밀히 말하면, 그 땅의 소유주는 나인데……. 어디까지 고개를 끄덕여 줘야 할지 난감했다.
“어머니, 그건 잠시 후 공작님께서 오시면 얘기하도록 하시지요. 그보다…….”
아까부터 가만히 있던 테오가 말을 잠시 끊고 들어왔다.
“그래, 내가 갑자기 흥분해서 정신이 없었구나. 네 누나만 보면 답답해서 잔소리가 끊이질 않으니…….”
그녀는 마치 나보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처음 빙의했을 때도 어느 정도 눈치챘지만, 라벤느는 집안에서 미운 오리 새끼였던 모양이었다.
정말 형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대우였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본론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