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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47)화 (46/159)

47화

“안 가신다고요?”

“그래.”

“왜요?”

“역으로 묻고 싶군. 내가 왜 가야 하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원작에서 넌 황성에 들렀는걸?

“일 없으세요? 황성에 볼일 같은 거?”

“없네.”

단호하게 말하는 일리온 때문에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아니 그럼 그때 성녀랑은 어떻게 만난 건데? 그냥 없는 일 만들어서 황성에 갔던 거야?

세상에. 이미 그때부터 성녀한테 단단히 반했었구나, 너?

원작에 대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무척 흥미롭긴 했지만,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이로써 더 확신했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는걸.

“안 그래도 폐하께 그림을 돌려드리러 가야 하는데, 생각난 김에 오늘 어떠세요?”

“오늘?”

“네!”

“다음에 가도…….”

“아뇨! 오늘 가죠! 안 가실 거면 저 혼자라도 다녀올게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일리온은 마지못해 따라올 것이다.

뭐, 나만 보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그의 앞에서 생글거리며 선택을 강요하자, 결국 일리온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승낙했다.

그렇게 도착한 황성 앞.

난 한발 물러서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림 돌려드리고 오세요. 전, 정원에서 잠시 쉴게요.”

일리온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폐하를 뵙고자 온 거 아니었나?”

그럴 리가. 내가 라벤느에 빙의하고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2위가 클라우스인걸.

참고로 1위는 너란다.

“제가 꼭 가야 하나요. 그냥 돌려드리면 되는 일인데요.”

“그렇게 가고 싶다고 할 땐 언제고.”

대체 이럴 거면 왜 가자고 졸랐냐는 듯 질책이 섞인 눈길로 날 바라봤다.

“여인의 마음은 갈대와도 같아 하루에도 수십 번은 바뀌는 것을, 누구 탓을 하겠어요.”

“누구 탓이라니, 그야 그대의…….”

“그럼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일리온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자 재빨리 손을 흔들고 정원으로 뛰쳐나왔다.

내 헛소리를 깡그리 무시했던 예전에 비해 요즘은 제법 대꾸를 하긴 했지만, 일리온은 기본적으로 말싸움에 강한 타입은 아니었다.

은근 고지식한 면이 있어 내 논리 없는 헛소리에 이성적으로 대응하려 하니, 그게 될 리가 있나.

어제까지 추운 지방에서 오들오들 떨다 와서 그런지, 따스한 햇볕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날이 좋은 날엔 성녀도 반드시 정원에 나올 것이다.

황성에 오게 된 지 일주일 만에, 성녀는 눈앞에서 하녀가 죽는 모습을 보게 되고 점차 성에서 고립되어 간다.

시종들은 황제가 무서워 될 수 있는 한 성녀의 주변에 머물지 않았고, 성녀 역시 필요한 일이 아니면 시종들을 부리지 않았다.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이, 그렇게 며칠을 벙어리처럼 지내는 게 답답해, 성녀는 매일 정원에 나와 그 답답함을 달랬다. 그러다 우연히 황성에 들른 일리온을 만난다.

그게 두 번째 만남이었다.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단숨에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새하얀 백금 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림 같은 장면에, 순간 천사가 사는 정원에 발을 들인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안녕하세요?”

소설을 읽으며, 같이 울고 웃었던 그녀였기에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마저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목소리는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반가운 티를 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르티아는 살짝 날 경계하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명목상 그녀는 제국의 손님이었지만, 실상은 전쟁의 포로로 잡혀 온 처지였으니까.

그런 그녀에게 난 적국의 귀족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전 라벤느 리슈펠트라 합니다. 아르티아 성녀님 맞으시죠?”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마침 황성에 들렀다가 우연히 아는 얼굴이 보여서요. 혹시 여기 잠시 앉아도 되나요?”

아르티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 그리 내켜 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난 눈치 없게 웃으며 옆에 있던 시종에게 차를 한 잔 부탁했다.

“황성에서 지내시는 건 어떠세요?”

“지낼 만합니다.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죠.”

그렇게 말하는 아르티아는 조금 지쳐 보였다. 하긴, 이 일주일간 많은 일이 일어났을 테니 지친 것도 당연했다.

난 그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지내면서 어려운 건 없는지, 황성의 음식은 입맛에 맞는지.

그때마다 그녀는 애써 괜찮다고 대답했다. 딱 그뿐이었다. 본인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생각도, 나와 대화를 이어 가고 싶은 생각도 없어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가 내게 친절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 끊임없이 친근하게 굴어야만 했다.

본론을 꺼내기 위해서.

***

“라벤느는 안 왔나?”

언제 봤다고 저리 이름을 다정하게도 부르는 것인지. 일리온은 어쩐지 속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모처럼 왔는데, 같이 차라도 한잔하지?”

“이후에 다른 일정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미루면 되네.”

“굳이 그러실 것 없습니다. 제 아내도 이해할 테니까요.”

보여 주기 싫다는 이야기를 빙빙 돌리는 일리온을 보며 클라우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알겠네. 오늘은 내가 물러서지. 그보다 공작은 정말 공사다망하군. 언제 그사이에 포르토를 다녀온 건가?”

“잠시 축제를 즐기러 다녀온 것뿐입니다. 아내가 게를 좋아해서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일리온을 보며 클라우스는 속으로 비소를 지었다.

클라우스의 관심사는 제국민의 안위가 아닌,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기에 영주들이 각 영지를 어떻게 관리하든 관심이 없었다.

알고 있음에도 방관하는 것이다.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그러나 일리온은 저번부터 미꾸라지처럼 제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고 다녔다.

덩달아 제국민의 찬양까지 받고 있으니, 제법 그럴듯한 왕 놀이를 하는 게 아닌가?

“포르토 영주가 안 그래도 구구절절 상소문을 올리더군. 나야, 공작을 믿으니 포르토 영주의 말은 적당히 무시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지는 말게. 중간에서 중재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 줘야 하지 않겠나?”

일리온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클라우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다른 놈들은 제가 말 한마디 하면 재깍재깍 대답하곤 했다. 목이 날아갈 게 무서우니 거짓 충성이라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대 공작도 그렇고 눈앞의 이도 그렇고, 개국 공신이라 칭송받으며 황실에 목숨을 바친다는 놈들이 정작 황제인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충성을 보이지 않았다.

정통 후계자의 목을 자르고 황위를 찬탈한 서자이기 때문일까?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클라우스는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나는 전대 공작도, 그리고 자네도 꽤 믿고 있어. 그대의 가문은 개국 공신으로서 황실에 충성을 바쳐 왔으니까.”

클라우스는 푸른색 눈을 길게 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번 일도 그대 나름대로 잘 해결했으리라 믿고 더 얘기는 꺼내지 않겠네. 다만 앞으론, 다른 영지의 일은 그쪽 영주에게 맡기게. 서로 얼굴 붉힐 일 없게 말이네.”

딱히 이름조차 모르는 포르토 영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끼리 서로 물어뜯든 말든, 자신의 관심 밖이었다. 다만, 일리온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

“……명심하겠습니다.”

기어이 그의 입에서 바라던 대답을 듣긴 했으나, 기분이 썩 좋지는 못했다.

뒤돌아 문을 닫고 나가는 일리온을 클라우스의 푸른 눈동자가 좇았다.

역시나 눈엣가시였다.

“충성심도 좋지만, 모시는 게 누군지 망각하진 말아야지. 개가 주인을 몰라봐서야 쓰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개는 쓸모가 없었다.

***

“정원이 참 예쁘네요. 성녀님은 좋아하는 꽃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딱히 없네요.”

쉴 틈 없이 끊기는 대화의 공방은 지속되었다. 일리온을 상대하면서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일리온 정도면 양반이었다.

역시, 뛰는 놈 위엔 나는 놈이 있는 법.

“참고로 전 마리골드를 좋아하는데 물에 우려먹으면…….”

“아…….”

대화 내내 관심이 없던 아르티아가 무언가 발견한 듯 반응을 했다. 드디어 내 말에 관심이 생겼나 했으나,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일리온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연회 때 둘이 만나긴 했던 모양이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만나지도 않았으면 어쩌나 했는데, 서로 초면이 아니라면 일이 좀 더 수월할 듯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제 약혼자가 몸이 좀 안 좋지 뭐예요.”

내 말에 아르티아는 드디어 관심이 생긴 듯 날 바라보았다.

“약도 영 신통치 않은 모양이라. 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성녀님께서 축복을 걸어 주실 수 있을까요?”

“축복……이요?”

“요즘 정말 손대면 부서질까, 바람 불면 날아갈까 노심초사하고 있답니다. 물론 제가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도 염치없는 건 알지만…….”

내가 말을 흐리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도와드릴게요.”

“어머나, 정말요? 정말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마침 저기 오고 있거든요. 참, 제가 부탁했다는 건 비밀로 해 주세요.”

내 부탁에 그녀의 표정엔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적당히 못 본 체하며 일리온에게 이쪽으로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지.”

일리온은 테이블 근처에 오자마자 돌아가자 재촉했다.

“뭐가 그리 바쁘세요? 정원도 예쁜데 성녀님이랑 구경 좀 하다가 들어가죠?”

“이러려고 황성에 오자고 조른 건가?”

“이러려고라니요?”

“일하기 싫어서 시간 보내려고.”

오늘도 역시나 내가 노는 꼴을 못 보는 악덕 고용주다웠다.

뭐, 내가 그동안 뻔질나게 땡땡이를 치려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오늘은 다 너 때문에 온 거라니까? 그러니 그 의심스러운 눈초리 좀 거둬 줄래?

일단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그를 달래기 위해, 항복의 의미로 양손을 들며 말했다.

“알았어요. 집에 갈게요. 그 전에 전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 성녀님과 대화라도 나누시는 게 어때요?”

그의 얼굴엔 내가 왜? 라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난 억지로 그의 옷깃을 끌어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혔다.

“앉아 계세요. 금방 갔다 올 테니까요!”

그래, 금방 갔다 올게. 한 30분 뒤?

그 정도면 대화도 나누고 축복도 받기에 충분한 시간일 것이다. 늦은 이유를 추궁하면, 황성에서 길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될 일이고.

길 잃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럴듯한 핑계까지 준비한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황성 안으로 향했다.

그 계획에서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난 정말로 길을 잃을 정도의 방향치라는 사실이었다.

“…….”

그리고 대개 방향치는 느낌만으로 길을 찾으려 하지.

길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나는 거침없이 황성을 누비는 중이었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자네 지금 정신이 있는 건가?”

때마침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노성이 들렸다.

이런 재밌는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는 난 일단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원래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남이 야단맞는 구경이거든.

“그게, 제가 분명 아닌 것 같다고 했는데, 드미트리 님께서…….”

“지금 내게 말대꾸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한쪽에 숨어서 살피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일전에 날 도와준 적이 있는 푸른 머리의 마법사는 상관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에게 연신 깨지는 중이었다.

대화를 들어 보니 자기 잘못도 아닌데 혼나고 있는 것 같은데…….

지난번에 도움받은 것도 있으니 오늘은 내가 도와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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