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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46)화 (45/159)

46화

“왜, 왜 웃으세요?”

헛웃음도, 비웃음도 아닌…… 너무 낯선 웃음소리였다.

“정말이지, 그대의 행동은 예측이 안 되는군.”

그는 웃음기가 채 사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측이 안 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 듯한데.

한참을 웃던 일리온은 이번에도 별말 없이 휴지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곤 곧바로 외투를 걸치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세요?”

“잠시 다녀올 일이 있어서. 좀 더 쉬고 있어.”

“언제 들어오실 건데요?”

“글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럼 저녁에 야시장 데려가 주세요.”

“안 돼.”

왜? 내가 억울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또 한 번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감기가 낫기 전엔 밖에 나갈 생각 마. 걱정 말게. 당분간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니까. 감기가 나으면 축제를 즐기러 가게 해 줄게.”

“그럼 엘코르사에도 데려가 주실 거예요?”

“그래.”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순순히 내 요구를 들어주는 일리온이었다.

“참, 그리고…….”

막 나가려던 그는 뭔가 잊은 게 있는 듯 날 되돌아보았다.

“어제 일은 고마웠어.”

그렇게 말하는 일리온의 표정은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그가 그토록 온화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가 나간 뒤, 혼자 남겨진 난 멍하니 일리온이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았다.

일리온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다니……. 낙심하고 안타까워해야 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어째서인지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이, 이건 그래. 감기 때문이야. 감기에 걸려서 그런 거라고.”

괜히 달아오르는 얼굴을 부채질하며 누구에게 변명하는 건지 모를 핑계를 혼자 중얼거렸다.

부디 내 목소리에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숨겨지길 바라며.

***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야, 이 자식아. 사모님이 뭐냐 사모님이. 못 배운 티를 이렇게 내요! 죄송합니다. 이놈이 덜 배워서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마님.”

“하…… 하…….”

둘 다 틀렸어. 난 아직 결혼 안 했단 말이야. 사모님이고, 마님이고 난 아직 결혼 안 했다고!

오늘 찾아온 곳은 셀레스타인 상단의 사무실이었다.

일리온은 잠시 이 지역의 상단주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안쪽 방으로 들어갔고, 난 밖에서 차를 대접받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차를 대접하겠다며 앞다투어 나선 두 사람은 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공작님께서 결혼하신다니…….”

“전 또 기자 놈들이 헛소문을 퍼트리고 있다고 생각했지 뭡니까. 공작님께서 결혼이라니…… 전…… 우리 공작님은 절대 결혼을 못 할 거라고…….”

“마님 앞에서 무슨 추태를 부리는 거야.”

날 마님이라 불렀던 남자가 뒤통수를 한 대 치며 다른 한쪽을 나무란다.

둘 다 제발……. 나 아직 결혼 안 했으니까 기정사실로 만들지 말아 줄래?

“하지만, 너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너야말로 공작님이 여자를 안고 호텔에 나타날 거라 생각이나 해 봤냐?”

“그, 그건…….”

그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지 말끝을 흐렸다. 하긴 나라도 일리온이 그랬다 하면 일단 의심부터 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궁금했는데…… 공작님은 돈도 없으셨는데 어떻게 호텔 방을 잡으셨죠?”

감옥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이 그랜드 포르토였기에 거기로 간 건 이해가 갔지만…… 돈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호텔에 투숙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저, 혹시 못 들으셨어요?”

그가 내 질문에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뭘요?”

“공작님께서 호텔 프런트에 나타나셔서 난리 난 거요…….”

“호텔 직원들도 처음엔 웬 거지가 거짓말을 하나 했는데, 다행히 지배인이 공작님을 알아봤데요. 그러다 같이 온 여자에 대해 소문이 돈 거고요.”

“작은 도시라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소문이 빠르게 퍼지거든요.”

그랬구나. 어쩐지 호텔에서 나설 때 다들 날 힐끔거린다 했어.

“다행히 마님이라는 게 밝혀져서, 큰 오해 없이 소문이 사그라들었지만요.”

“하긴, 마님이 아프신데 사찰이 대숩니까? 마님 건강부터 챙겨야죠!”

그니까 그놈의 마님 소리 좀…….

“야, 너희들. 마님 앞에서 헛소리 말고 일이나 하러 가.”

마침 뒤에서 상단주가 나오며 두 사람을 해산시켰다.

그러니까 마님 아니라고!

“그럼 오늘 돌아가실 예정입니까?”

“그래. 영주랑도 얘기를 나눴고, 확답도 들었으니까.”

“일이 잘 해결되어서 다행입니다. 이게 다 마님 덕분이에요.”

일리온이라면 모를까, 내 덕이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다.

“전 그냥 공작님을 따라온 것뿐이라…….”

치켜세워 주는 게 불편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 겸손해하지 않아도 돼.”

“네?”

“이번 일은 그대 덕분에 쉽게 해결했거든.”

혹시나 날 비꼬기 위해서 하는 말인가 싶었지만, 일리온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듯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엘코르사에 도착해서야 풀렸다.

그날 점심, 우린 다시 한번 엘코르사에 방문했다.

셀레스타인 공작이라 밝히자마자 우릴 대하는 종업원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이렇게 쉽게 들어갈 것을…….

어쩐지 조금 억울해 일리온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공작님.”

“…….”

“설명해 주시죠.”

“……글쎄, 설명이 필요한가?”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단 말인가.

난 허망한 얼굴로, 접시가 날아다니는 레스토랑을 바라보았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접시가 날아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셀레스타인 공작, 이 어찌……!”

“……드뷔어 남작님을 보아하니, 공작님 때문인 것 같은데요?”

가게에 들어와 막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던 우리 앞으로 드뷔어 남작이 나타났다.

그는 웃으면서 얼마 전엔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며,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이냐며 넉살 좋게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일리온의 태도는 차가웠고 그가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경비대가 쳐들어와 드뷔어 남작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접시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 식사는 포기해야 할 듯 보였다.

“영주님이랑 무슨 얘길 나누신 거에요?”

“글쎄, 난 북쪽 지역 몬스터 토벌에 대해 얘기한 것밖에 없는데?”

일리온의 일을 돕다 보니 알게 된 거지만, 셀레스타인 기사단은 북쪽 지역 수비를 돕고 있었다.

설마, 그 건으로 영주를 협박이라도 한 거야?

“이 일의 흑막이 저 남작님이었어요?”

“그래. 그날 무전취식치곤 지나치게 무거운 벌을 받았지. 그게 우연은 아닐 테니, 남작이 뭔가 했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었어. 조사해 보니 금방 나오더군.”

하여간 머리 좋은 놈.

“그대에겐 고맙네. 덕분에 일이 빠르게 해결됐으니.”

일리온을 방해하려고 왔더니 되레 도움만 된 꼴이었다.

“그보다, 안 따라가 봐도 되나?”

“……누굴요?”

일리온이 눈짓으로 끌려 나가는 드뷔어 남작을 가리키며 물었다. 대게를 먹지 못해 낙심하고 있는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왜요?”

따라가 봐야 감옥밖에 더 가나 싶어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일리온이 대답했다.

“취향이라면서?”

“…….”

한때나마 그의 장점으로 뒤끝이 없다는 걸 꼽았는데. 그 말 취소해야겠다.

***

“어머나 아가씨, 이게 다 뭐에요?”

난 어마어마한 양의 게를 릴리에게 안겨 주며 말했다.

“선물.”

“어머, 어디서 받으셨는데요?”

“지역 상인들이 나눠 줬어.”

결국, 스페셜 대게 요리는 입도 못 대 보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레스토랑은 난장판이 되었고, 분위기는 뒤숭숭해 급하게 손님을 내쫓고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이대론 억울해서 집에 못 간다고 일리온 앞에서 난리를 쳤고, 그는 할 수 없이 근처 수산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 우리를 알아본 가게 주인이 돈은 필요 없다며 대게를 잔뜩 안겨 주었다.

드뷔어 남작이 잡혀갔다는 소문이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상인들 사이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두 분이서 즐거운 시간 보내셨어요?”

“즐거운? 말도 마. 감옥에 갇혔다 나왔는걸.”

“네? 왜요?”

“설명하자면 길어.”

릴리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참, 아가씨. 본가에서 편지가 왔던데…….”

“응. 알았어. 이따 열어 볼게.”

난 릴리의 말에 적당히 대답하고 곧바로 방으로 올라와 침대에 누웠다.

“아, 죽겠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오고 만다. 내가 다시는 일리온을 따라 나가나 봐라.

일리온을 괴롭히겠다는 소기의 목적은 실패로 끝났고, 대게 요리는 입에 대 보지도 못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감옥에 갇히고 감기에 앓아눕기까지.

정말이지 최악의 일주일이었다.

내가 가진 불행의 위력을 너무 얕잡아 봤다.

그러나 피곤한 몸과는 다르게, 머릿속에선 자꾸만 일리온과 성녀에 대한 일이 떠올랐다.

감옥에서 나온 다음 날부터 사실 다른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할 정도 일리온의 저주에 대해 생각했다.

반점은 생각보다 심각해 보였고, 성녀의 축복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그가 어째서 성녀에게 관심이 없던 것인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첫 만남부터 틀어지고 말았으니까.

내가 그날 황제의 춤을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리온은 내게 신경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녀와 차분히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었겠지.

막연히 잘되겠지 하고 놔뒀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던 모양이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려놔야 했다.

난 찬찬히 원작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연회가 있고 며칠 후, 일리온이 황성을 찾는 일이 생긴다. 그날 일리온은 성녀를 만나게 되고, 정원에서 차를 마시던 성녀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

성안에서 할 게 없는 성녀는 늘 일정한 시간에 정원에 나와 차를 마셨으니까.

그러니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원작을 돌려놓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찾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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