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45)화 (44/159)

45화

새벽부터 한차례 심하게 앓았던 일리온은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세바스찬이 걱정스럽게 절 바라보고 있는 걸 보니, 이미 일어날 시간이 훌쩍 지난 듯했다.

발작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저주의 흔적은 온몸을 잠식해, 쇄골 근처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이대로 가면 더 이상 옷으로 가리기 힘들어 보였다.

일리온은 무덤덤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셔츠 단추를 채웠다. 죽음이 점점 자신을 잠식해 간다고 하더라도, 마냥 누워 있을 순 없었다.

“오늘 출장은 다음으로 미루시는 게 어떨까요?”

세바스찬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미 충분히 미뤘어. 더 미룰 수도 없는 일이고.”

“하지만…….”

일리온은 세바스찬의 걱정을 무시했다. 그는 쓸데없는 걱정이 많았고, 걱정만으로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언젠가 죽을 거라고 해서 지금 해야 할 일을 안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은 이 가문을 지탱하기 위해 키워졌으니까. 그러니 죽기 전까지 그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세바스찬의 기우이길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이번만큼은 그의 걱정이 들어맞았다.

일리온의 몸 상태는 저녁 무렵부터 그리 좋지 못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기어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발작의 고통은 몇 번을 겪어도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온몸이 타는 듯한 고통에 내던져진 그 끔찍한 감각은 잔인하게도 매번 새로웠다.

때로는 그저 이대로 죽길 바랄 만큼.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에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한 시야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웃긴 일이었다. 분명 경계하기 위해 라벤느를 좇던 눈동자가, 어느새 습관처럼 그녀를 따라가고 있다는 건.

녹색의 동그란 눈동자에선 연신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그 눈에서 새어 나오는 눈물을 보면, 어쩌면 지금까지 괜한 의심을 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기대를 하고 만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매일 자신을 헷갈리게 했다.

믿어도 될지, 믿지 말아야 할지.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오르내리고, 결정이 뒤집혔다.

그러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 말고는…….

어쩌면 자신은 그녀를 믿을 이유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그녀를 믿고 싶기에 그 이유를 찾고 있을 뿐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잘못에 유독 너그러웠던 이유도, 쉬운 길을 놔두고 돌아가는 이유도.

그저, 믿고 싶을 뿐이었다.

***

앓고 난 다음 날의 아침은 여전히 힘들었다. 일리온은 간신히 정신을 차려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의 초점을 맞추자, 가장 먼저 동그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꿈이…… 아니었나?”

어디서부터 꿈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이었는지 모호했다. 당연히 꿈이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심하면 종종 그런 꿈을 꾸곤 했으니까.

고통에 몸부림치던 기억은 언제나 끔찍했다.

그러나 그 고통보다도 더 끔찍했던 건, 자신의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두려움이었다.

손자의 몸에 손대는 것조차 싫어했던 할머니, 자신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려 했던 할아버지, 그리고 그를 돌보는 걸 끔찍하게 여겼던 보모.

고통에 몸부림칠 때면, 여섯 개의 눈동자는 언제나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처롭게 뻗은 작은 손은 늘 허공만 쥐었다.

그러다 지쳐 잠들 때면, 종종 꿈속에서 모르는 이가 나타나 제 손을 잡아 주곤 했다.

얼굴도, 목소리도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새하얀 손가락만은 제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게, 라벤느로 바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더라. 분명 최근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생각을 더듬어 가다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때도 꿈이…… 아니었나?’

진통제와 수면제 때문에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하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연히 꿈일 거라 생각했는데.

몸을 일으키던 일리온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외투도 없이, 지푸라기 더미 위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째서? 라는 의문은 제 몸에서 스르륵 흘러내리는 외투를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목에는 어제 그녀에게 주었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바깥의 냉기가 고스란히 들어오는 이 감옥에서 얇은 옷 한 장으로 밤을 지새울 생각을 하다니. 용감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하아…….”

일리온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라벤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약점을 이용하고자 했다면 벌써 그리했을 것이다.

제 약점을 빌미로 무언가 요구할 수도, 제 비밀을 캐물을 수도 있었다.

더욱이 어젯밤에 자신은 완벽하게 무방비한 상태였고, 지켜 줄 사람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라벤느는 그러지 않았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결국은 그 모든 의심을 걷어 낸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면, 자신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녀를 향한 의심이 녹아내리며, 그 안에서 작은 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벤느라면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그러나 이내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깨달았다.

가족이라 불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자신을 경멸했다. 그녀라고 다를 리 없었다. 알면서도 손을 잡아 줄 사람은 없었다.

일리온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알고 있지 않은가. 언제나 자신을 위로해 주던 건 기대가 아닌 체념이었다는걸.

***

감기에 걸렸다.

“훌쩍.”

당연한 일이었다.

코트도, 아티팩트도 없이 그 추운밤을 지샜으니까.

지금껏 살면서 지푸라기 위에서 자 본 적이 없어 몰랐는데, 지푸라기는 생각보다 보온력이 우수했다.

어디까지나 ‘생각보다’ 말이다.

덕분에 얼어 죽는 불상사는 피했으니 이 정도면 우수한 거 아닌가?

“공작님, 저 목 아파요. 머리도 아프고. 콜록콜록.”

내 말에 일리온은 말없이 따뜻한 물을 건넸다.

실은 다음 날 아침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추위에 떨며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 보니 감옥이 아닌 그토록 원했던 그랜드 포르토 호텔 침대에 누워 의사의 진찰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일리온이 내 시중을 들어 주기까지……. 설마 꿈은 아니겠지?

“공작님.”

“왜?”

“어떻게 감옥에서 나온 거예요?”

“……경비병을, 잘…… 설득해서.”

뭔가 중간중간 말이 생략된 것 같은데?

어쩐지 설득이 아니라 협박을 했다고 하는 편이 좀 더 그럴듯했지만, 의문은 그냥 마음속으로만 담아 두기로 했다.

“예전에…….”

일리온은 천천히 운을 뗐다. 그래, 왜 잔소리가 없나 했네.

잘못한 게 많았기에 나는 마음을 비우고 일리온의 말을 기다렸다.

“어제와 비슷한 일이 있었나?”

“……네?”

비슷한 일? 아, 내가 세르지오를 집에 초대한 날 쓰러진 일을 말하는 건가?

“의사가 찾아왔을 때 말이죠?”

“세바스찬에게……. 뭔가 들었나?”

“별 얘기는 아니고, 몸이 좀 안 좋다고?”

내 대답을 들은 일리온은 어쩐지 조금 긴장돼 보였다. 이 커다란 남자에게 긴장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초조해 보이는 손가락이나, 날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은 어쩐지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일리온은 한숨을 내쉬더니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그대에게 해 줄 말이 있어.”

그리곤 갑자기 셔츠 단추를 풀기…… 응? 잠깐만!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야?

“고, 공작님! 잠깐,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당황스러워 양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눈동자를 굴리는데, 일리온이 입을 뗐다.

“난 어렸을 때 마녀의 저주를 받았어. 이건 그 저주의 흔적이고.”

“…….”

명치 부근까지 단추를 푼 일리온은 셔츠 자락을 벌려 검은 반점을 보여 주었다.

저주의 흔적은 일리온의 몸을 빼곡하게 점령하고 있고, 상태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심각했다.

“저주를 봉인하긴 했지만, 어제처럼 가끔 발작하지.”

“어쩌다 저주에 걸리셨는데요.”

“글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조부 말로는 내가 어릴 적에 마녀를 죽였다더군.”

의자에 앉은 일리온은 여전히 내 얼굴을 바라보지 않은 채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기억나는 건,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손가락에 묻은 피 정도야. 아마, 내가 그녀를 죽여서 손에 피가 묻은 거겠지…….”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성녀에겐 마녀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니까.

“아…….”

“생각보다 많이 놀라지 않는군. 하긴, 믿기 힘들 만도 하지.”

사실 대부분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 더 놀랄 것도 없었다. 마녀의 외모에 대해서는 처음 들었지만 그게 충격적인 사실도 아니었고.

다만, 어째서 내게 이런 얘기를 해 주는지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남에게 쉽사리 털어놓을 성격도 아닌데. 어젯밤의 일에 대한 책임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걸까?

“무, 물론 놀랐답니다. 다만, 어떻게 위로를 드리면 좋을지 몰라서. 세상에, 공작님께서도 정말 힘드셨겠어요.”

눈치 없이 흐르는 콧물을 훌쩍이며 혼신의 연기를 해 보였다.

“그, 참. 저주라니 훌쩍, 쉽게 받아들이기가…… 훌쩍.”

훌쩍. 훌쩍. 아, 진짜…….

“저, 이런 말 하는 와중에 죄송한데 휴지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콧물이……. 훌쩍. 그치질 않아요.”

세상 심각한 목소리로 저주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는데 앞에서 콧물이나 훌쩍이다니.

하지만 콧물은 생리적인 현상이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왜 감기로 고생하는데?

진지한 얘기로 한창 가라앉은 분위기에 콧물이 난입하자 그제야 일리온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말없이 옆에 있는 휴지를 뽑아 내게 건넸다.

휴지를 받아 콧속 깊은 곳에 있는 콧물까지 뽑아 버릴 기세로 코를 푼 뒤 휴지를 곱게 접었다.

“공작님, 손 좀 내밀어 보세요.”

“왜?”

그는 내가 못 미더운 듯 되물었다. 그런데도 손은 고분고분 내민다. 역시 아픈 게 최고의 방패였다.

나중에 불리할 때 되면 무조건 아픈 척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의 손에 코를 푼 휴지를 꼭 쥐여 주었다. 두 손으로 친절하게 손가락을 꾹 접어 가며.

“쓰레기통에 버려 주세요.”

미간이 잔뜩 찡그려졌다. 그리고 난 그 앞에서 해맑게 웃어 보였다.

내게 어제의 일을 설명해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해도 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일리온과 그리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러니 그의 비밀을 더 듣고 싶지도, 무거운 분위기를 계속 이어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럴 때면, 난 언제나 비겁하게 핵심을 벗어난 주제로 그의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일리온은 당장에라도 더럽다며 내 손을 뿌리치고, 진저리를 치며 방을 나갈 것이다.

예상대로 일리온은 날 한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