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저기요, 저희가 돈을 잃어버려서 그렇지,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래, 그러니까 나가려면 돈을 내.”
우릴 감방에 처넣은 경비병은 히죽거리며 내 말에 대답했다. 무전취식에 대한 대가가 감옥이라니!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얼마나요?”
“글쎄, 10골드, 아니 20골드는 내야겠군.”
“무슨! 우리가 먹은 밥은 고작해야 1, 2골드였단 말이에요!”
간수의 말에 열이 받아 소리를 빽 지르자 그가 귀를 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가씨는 태도가 나쁘니 30골드는 내야겠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나가고 싶으면 돈을 내면 될 일이야. 보아하니 아가씨도 저쪽도 그냥 평민은 아닌 것 같은데.”
경비병은 나와 일리온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 자식이. 보석금으로 장사를 하려고 하다니.
나와 일리온의 얼굴을 보고 돈을 슬금슬금 올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우리가 돈이 될 것 같으니 잡아 온 듯 보였다.
“아 참, 우리 쪽에서 우편을 보낼 거니까 집 주소만 알려 줘. 그쪽에서도 소식을 알아야 돈을 가져오지 않겠어?”
그는 연신 이죽대며 물었다.
주소를 알려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셀레스타인 공작이 무전취식으로 감옥에 갇혔다고 광고할 일 있나?
내가 말을 못 하고 입만 꾹 닫고 있자, 경비병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말하기 싫으면 말던가. 참고로 여기에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벌금에도 이자가 붙으니까 그리 알고 있어. 뭐 정 돈이 없으면 노역이라도 해서 갚으면 되니까.”
그렇게 말한 남자는 낄낄 웃으며 사라져 버렸다.
저 망할 놈이!
처음부터 끝까지 재수 없는 놈이었다.
약이 잔뜩 올라 철창 사이로 얼굴을 바짝 대고 멀어지는 경비병을 노려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무전취식치고는 벌이 심한 것도, 멀쩡한 지갑을 때마침 잃어버린 것도 내가 운이 좋지 못한 인간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이제 와 새삼스레 억울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운이 나쁜 것도 정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정도에는 바닥이 없었다.
대게도 못 먹고, 감옥에 갇히고. 차라리 아까 그 여관방이 호텔 스위트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몸을 돌려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분명 사탕을 살 때까지만 해도 돈이 있었는데……. 내일 간수가 다시 오면 얘기를 해 볼게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리는데, 이미 뭐라고 한 소리 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어쩐지 잠잠했다.
“저기, 공작님?”
벽에 기대앉아 있는 자세가 조금 이상했다.
서둘러 다가가 보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설마, 또 발작한 거야? 바로 얼마 전에 성녀를 만났는데, 왜? 그때 축복을 걸어 준 거 아니었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쳐 경비병을 불렀지만, 텅 빈 감옥 복도에는 내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울릴 뿐이었다.
일리온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듯 입도 벙긋 못 하고 쓰러져 있었고, 내 손에는 진통제도, 여길 나갈 수 있을 만한 돈도 없었다.
불현듯 스치는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혀 왔다.
“아냐, 괜찮아. 이 세상엔 소설의 강제력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선 죽지 않을 거야. 그럴 거야.”
막힌 숨을 애써 내뱉으며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고개를 든 의심은 또다시 내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런 게 없으면 어떡하지? 소설의 강제력 따위, 증명된 것도 없잖아? 만약 이대로 일리온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나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속 깊숙이 묻어 두었던 기억 하나가 거센 파문을 일으키며 떠올랐다.
***
기억도 나지 않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날 가엾고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지만, 내게 그리 미안한 표정을 지을 이유도, 안쓰러워할 필요도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가엽지도 안쓰럽지도 않았으니까.
평범을 정의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계신 것을 평범하다고 한다면 난 그리 평범한 가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을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겐 부모님처럼 날 돌봐 주시는 할머니가 있었으니까.
그리 풍족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할머니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모두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엔 평소 갖고 싶은 장난감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단지 부모님이 안 계셨을 뿐이지 난 또래들과 비슷하게, 큰 부족함 없이 자랐다.
당시 내 인생의 최대 고민은 그 달의 용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몇 장 살까 하는 것일 정도로.
그런 평범한 일상이 무너진 건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으로부터였다.
“지하야, 어떡하니. 할머니가 쓰러지셨어.”
“……네?”
그전부터 할머니는 속이 안 좋다는 말을 종종 하셨다.
‘그러지 말고 병원이라도 가자.’
‘병원은 무슨. 나이 먹어서 그런 거야. 며칠 지나면 또 괜찮아져.’
‘그러다 정말 아프면 어떡해?’
‘할미가 아프긴 왜 아파? 할미는 우리 지하 결혼해서 잘 사는 거 보고 죽을 건데.’
그렇게 말하며 괜찮다고, 안 가도 된다고, 병원 가 봐야 쓸데없이 돈만 쓰고 온다며 할머니는 거절하셨다.
“췌장암입니다. 발견이 너무 늦었어요. 이 정도로 악화할 정도면 증상이 있었을 텐데…….”
며칠간의 검사 끝에 의사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 뒤로도 분명 무어라 더 말한 것 같지만 내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다른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암이라고? 할머니가? 검사 결과가 잘못된 건 아닐까, 그래 잘못된 걸 거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멀쩡하셨는걸. 그저 속이 좀 안 좋으셨던 건데 암이라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말없이 의사 앞에 놓인 종이 쪼가리만 응시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의사의 이야기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만 간신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병원 구석에서 한참을 울었다. 눈물이 더 나오지 않을 만큼 울고 또 울었다.
몸에 있는 물이 모두 쥐어짜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운 뒤에야 내가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계실 할머니가 떠올랐다.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부어오른 눈가를 씻어 내 보았지만, 오히려 꼴만 우스워졌다.
한참을 화장실에서 머물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여 병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내 노력이 부질없게도 할머니는 내가 울었단 걸 단박에 알아채셨다.
“의사가 뭐라고 하든? 나, 참. 별거 아닐 건데 또 그놈이 우리 강아지 겁준 모양이네.”
“할머니…….”
“울지 마라. 할미 괜찮다. 울지 마.”
더 이상 짜낼 눈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간신히 그친 눈물이 무색하게 난 또 한 번 목 놓아 울었다.
그날 할머니는 한참 내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해 주셨다.
항암 치료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던 할머니는, 그 후로 매일같이 고통에 시달리며 진통제에 의존해야 했다.
종종 내가 온 것도 모르실 정도로 침대 위에서 앓으셨고, 난 또 울면서 간호사를 부르러 달려 나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 정도였다.
울면서 도와줄 사람을 부르는 것뿐…….
할머니는 의사의 말대로, 그해 겨울이 지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장례식은 조용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신 우리 아빠를 제외하고는 자식이 없으셨고,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할머니와 같이 일하는 동료 몇 분이 왔다 가셨을 뿐이었다.
“손녀가 상주를 하고 있네.”
“하나 있는 아들이랑 며느리가 사고로 죽었대. 손녀만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하더라고.”
할머니의 동료분들은 내가 들을 거라 생각하지 못하셨는지 장례식장에서 식사하시며 얘기를 나누셨다.
상주 자리에 앉아, 난 멍하니 들려오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혼자서 손녀 키우느라 그렇게 억척스럽게 일을 했던 거구만. 늘그막에 고생만 하다 가다니, 안됐어.”
“내 말이. 요즘 암은 미리 발견하면 살 수 있다던데……. 발견이 너무 늦었다나 봐.”
“그러고 보니, 올해 초에 다 같이 건강 검진 가자고 했었는데 그날 갑자기 손녀가 아파서 못 왔잖아.”
“맞네. 아이고, 그때 같이 검진만 받았더라도,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대화는 배경음처럼 지나갔고, 난 멍하니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 나 때문이었구나.’
할머니가 고생하신 것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고통받으신 것도, 암을 미리 발견할 수 없었던 것도 모두 나 때문이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문득 할머니가 드라마를 보며 종종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런 놈이 여자 인생도 말아먹는 기다.’
할머니께서는 정작 본인의 인생을 망쳐 버린 눈앞의 나쁜 나를 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눈앞에 일리온과 겹쳐졌다. 여전히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성녀에게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 그건 분명 나 때문일 것이다. 내가 원작대로 행동하지 않아서…….
그런데도 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내겐 일리온의 저주를 풀어 줄 능력도, 그가 고통받지 않도록 치료해 줄 지식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하다못해 이야기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했다.
“제발, 죽지 마. 내가 어떻게든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테니까,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