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일리온은 날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아……. 대체 날 도와주러 온 건가, 방해하러 온 건가?”
그야 물론, 방해할 생각이지. 뭘 당연한 걸 물어보실까?
난 혹여 드뷔어가 우리 대화를 들을까 봐 일리온을 좀 더 구석으로 끌었다.
“그렇지만, 여기 꼭 가고 싶었다고요.”
“드뷔어 남작이랑?”
“뭐, 못 들어갈 것도 없죠. 어차피 밥만 먹고 나올 건데.”
“그대는 내 약혼자라는 자각이 있는 건가?”
아니 그러니까 음식 포장해서 오겠다니까? 평소엔 아침도 같이 안 먹으면서 왜 자꾸 성질이야?
“게다가 그가 어딜 봐서 돈이 많고 잘생겼는데?”
목소리 낮춰라. 드뷔어 듣겠다.
“얼굴이야 주관적인 거고, 돈은 많은 것처럼 보이던데요.”
난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저런 사람이 취향이라고?”
“공작님한테는 세상 사람들이 다 오징어로 보이시겠지만, 눈코입 제대로 달리셨고 옷도 잘 입으시고…….”
어째서 대화가 드뷔어의 외모로 향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지금 왜 중요한데?
“그리고 이것도 다 조사의 일환이라니까요. 돈이 모이는 곳에 정보도 모인다고 하잖아요. 게다가 여긴 귀족들만 받는다면서요. 괜찮은 정보가 있을지 혹시 알아요?”
내 말에 일리온은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했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혼자 들어가는 건 안 돼.”
혼자 가는 편이 땡땡이치긴 더 좋지만……. 표정을 보니 절대 허락해 주지 않을 기세였다. 난 항복의 뜻으로 두 손을 들며 말했다.
“……좋아요. 같이 들어가요.”
“어떻게?”
“그냥 제 장단에 맞춰 주세요.”
내 제안에 일리온은 영 못 미더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려 봐.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난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띠고, 남작에게 다가갔다.
“저, 남작님. 사실 이쪽은 제 애인이 아니고 시종인데…….”
“……!”
굳이 일리온 쪽을 바라보지 않아도 그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부모님께서 제가 너무 걱정되어, 어디를 가든 항시 시종을 데리고 다니라 하셔서요. 송구하지만, 그와 동행해도 될까요?”
애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자 남작은 뭐가 재밌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이었구만? 알겠네. 그럼 같이 들어오게.”
드뷔어 남작은 연신 재밌다는 듯 껄껄 웃으며 동행한 여자와 가게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시종이라고?”
두 사람이 저만치 걸어가자 뒤에서 일리온이 물었다.
“호칭은 제 마음대로 정하라면서요? 그리고 목적도 달성했고.”
태연하게 말하는 날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잠깐, 태도가 그게 뭐야? 그럼 안 되지. 넌 지금부터 내 시종인데.
“참, 그리고 드뷔어 남작님 앞에선 절 아가씨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아니, 불러 주렴. 리온아.”
싱긋 웃으며 넌지시 그의 태도를 지적하자, 일리온의 표정이 벌레를 씹은 것마냥 불쾌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시종인 일리온은 당연히 겸상할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일리온은 음식을 입에 대 보지도 못하고 내 뒤에 서 있어야만 한다는 얘기다.
물론 가만히만 있으면 안 되지.
“흠흠,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메뉴판 좀 넘겨 보거라.”
자리에 앉은 난 뻘쭘해할 그를 위해 메뉴판을 건네며 부탁했다.
굳게 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가는 거로 보아, 짜증이 난 눈치였다.
그러나,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다 심지어 평민으로 위장까지 한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겠어. 순순히 메뉴판을 넘겨 줘야지.
“아, 아니, 다시 앞으로, 아니다, 뒤로, 뒤로. 아냐, 역시 앞쪽에 있던 걸 먹을까?”
“…….”
눈으로 욕을 할 수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닐까. 후환이 아주 조금 두려우니 이쯤 할까?
사실 일리온을 시켜 메뉴판을 넘길 필요는 없었다. 원래부터 먹고 싶은 걸 염두에 두고 온 거니까. 메뉴판은 그냥 뭐……. 소심한 복수지.
“스페셜 대게 요리로 할게요.”
“죄송하지만, 대게는 오늘 품절입니다.”
“……네?”
“죄송합니다.”
오늘따라 안 되는 게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그럼 들어오기 전에 말해 달라고! 그걸 먹으려고 여기까지 온 건데, 품절이라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여긴, 대게 말고도 스테이크가 맛있네. 티본 스테이크를 추천하지. 대게야 뭐, 너무 흔해서…….”
드뷔어 남작은 그렇게 말하며,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음식에 대한 흥미가 싹 가신 나는 다시 한번 일리온을 불렀다.
“리온아, 메뉴판.”
탁!
테이블이 작게 울릴 정도로 메뉴판을 올린 일리온은 날 바라보며 웃었다. 아니, 억지로 웃고 있었다.
“아, 가, 씨. 그냥 스테이크로 하시지요.”
한 번만 더 메뉴판 넘겨 달라고 했다간 날 요리 재료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난 서둘러 삐뚜름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고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스테이크로 할게요. 아, 안 그래도, 스테이크가 먹고 싶더라. 하하하.”
우린 철저하게 관광객인 척하며, 드뷔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드뷔어는 이곳의 지리에 밝은 모양인지, 관광객이 갈 만한 장소를 여기저기 추천해 주었고, 난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왔는지 못 물어봤군.”
“남쪽에서 왔어요.”
“남쪽 어디?”
“어…….”
지명에 밝지 않은 내가 머뭇거리자 뒤에서 일리온이 대신 대답했다.
“르하에서 왔습니다.”
“르하라, 예전에 가 본 적 있지. 거긴 뭐가 유명하더라?”
“음, 그러니까…….”
내가 또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가 다시 한번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
“밀이 유명하죠. 포르토 지역에도 많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아, 맞아. 맞아. 거기 밀로 만든 빵이 맛있기로 유명하지, 참.”
그렇게 말하며 드뷔어 남작은 와인을 한 모금 홀짝였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곤 시종의 얼굴이 하얗군.”
“……네?”
“르하 지방은 햇볕이 따가워서 살이 잘 타던데 말이야. 그쪽 시종은 포르토 지역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어.”
말에 뼈가 있는 것처럼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하하. 워, 원래 피부가 좀 하얀 편이에요.”
“총애하는 시종이라 아끼는 건 아니고?”
백작의 동행인인 금발 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생긴 것도 곱상하니, 데리고 놀기 좋겠어.”
아무리 시종의 지위가 낮다지만, 본인 앞에서 외모 평가도 모자라 무시하는 발언까지…….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여는데, 일리온이 좀 더 빨랐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안타깝게도 전 아가씨의 취향이 아니라서요.”
“그래? 그럼 우리 집에 올래? 마침 괜찮은 시종을 하나 찾고 있었는데.”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서 일한다면 보수를 더 챙겨 줄게.”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일리온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리온의 표정이 안 좋아 보였다.
난 황급히 그녀에게 끌려가는 일리온의 손목을 잡았다.
“제가 아끼는 시종이라서요. 그러니 너무 놀리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애써 웃으며 최대한 공손하게 부탁했다.
“그래, 멜리나. 장난은 그쯤 하게.”
남작의 말에, 멜리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거뒀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때쯤, 남작과 멜리나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만족하나?”
“아가씨라고 불러 주시죠.”
“아, 가, 씨?”
“좀 더 공손했으면 합니다.”
“라벤느…….”
하긴, 옆에서 밥도 못 먹고 내 시중이나 들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듣지 않아도 될 불쾌한 얘기까지 들었으니…….
“그, 그래도 제 덕분에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잖아요.”
“그리고 대부분 쓸데없는 얘기였지.”
그건 그렇지만…….
오로지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벌였던 일이었기에, 그 이외의 것은 사실 핑계에 가까웠다.
다만 욕망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을 뿐.
그렇게 잠시 대화를 하며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두 사람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먼저 집에 돌아갔나 싶어 웨이터를 불러 물어보니, 두 사람은 아까 먼저 가 보겠다며 돌아갔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가지?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여식에게는 인사할 가치도 없다 이건가? 이 제국의 예의범절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어쩔 수 없죠. 저희도 돌아가기로 해요.”
난 속으로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기 위해, 프런트에서 코트를 찾아 입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지갑이……. 어디 있더라.”
이 옷 주머니에 넣어 뒀는데? 코트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져 보았지만, 지갑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다급하게 코트를 벗어 탈탈 털어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없었다.
“어…….”
나는 멍한 표정으로 계산을 기다리는 웨이터를 바라보았다.
“지, 지갑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요.”
자본주의의 미소가 머물던 직원의 입가가 순식간에 굳었다.
***
드뷔어 남작은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 두 사람, 남작님이 찾던 사람 맞아요?”
“그래. 맞는 것 같군.”
종일 상점가를 들쑤시고 다니는 연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우연히 찾아갔던 레스토랑에서 만날 줄 몰랐다.
인상착의도 보고받은 것과 흡사했고, 출신지를 속이는 것도 수상했다. 르하에서 온 사람들 같지 않은 피부색과 잘 교육받은 듯 보이는 말투.
수상한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늠은 안 되지만, 거슬리는 건 사실이었다.
드뷔어 남작은 수완이 좋은 상인이었다. 그는 벌어들인 돈으로 포르토의 영주에게 로비해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가게를 열기 위해 영주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그 승인에 남작의 입김이 닿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상인들은 남작의 눈치를 보며 장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상점들의 물건 가격이 높은 것도, 특정 상단과만 거래를 하는 것도 모두 드뷔어 남작의 지시였다.
그랬기에, 몰래 자신의 뒤를 파고 다니는 사람은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상단 쪽 사람일까요?”
“글쎄…….”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상단 쪽 사람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하지만 뭐,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고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장난이 짓궂으시네요. 두 사람에게 저녁을 먹자고 하시고.”
“그대도 장난이 심하지 않았나?”
“제 장난이야, 남작님에 비하면 별거 아니죠. 윌리엄한테 지갑을 훔치라고 시키셨잖아요. 경비대도 미리 불러 놓으신 거죠?”
“하하. 거기까지 눈치채고 있었나?”
“제가 남작님을 따라다닌 세월이 얼만데요. 남작님이 하시는 생각쯤은 다 알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남작의 팔을 끌어안고 어깨에 기댔다.
“그런데 두 사람의 목적은 뭐였을까요?”
“뭐, 꿍꿍이가 뭔지 몰라도, 당분간은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겠지.”
드뷔어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